〈 55화 〉성장하는 이야기(?)
나타난 자는 기사였다. 제국가 황실의 상징인 황금빛의 전신 갑옷을 입고 있어서 자세한 성별은 알 수 없으나 목소리로 미루어보아 남자 같았다.
"너는...!"
기사를 본 루진이 놀라 뒷걸음질 친다. 나도 기사를 바라보다 전신에 드는 오한에 꿀꺽, 침을 삼켰다. 압도적이나 잘 갈무리된 기세.
저 남자, 엄청나게 강하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의 옆에는 리린 플라비스가 있었다. 리린 플라비스는 우리 쪽의 루진을 바라보며 씨익 웃고 있었는데 루진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새하얗게 물들었다.
"갑작스레 끼어들어 죄송하나, 황녀님 이제 돌아가실 시간.."
"거절한다! 난 여기에 있어야 한다! 아직 해야 할게 있다고!"
기사가 뭐라 하기도 전에 루진이 거절을 외쳤다. 하지만 기사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황녀님. 이건 폐하의 직언입니다. 당장 귀환할 준비를 하시죠. 바깥에 이미 황실 제 3기사단이 나와 있습니다. 부디 그들이 헛걸음하지 않게 해주시길."
부드러운 목소리이나 묘한 압박감이 있다. 루진은 리린을 날카롭게 째려봤다.
"단장님, 단장님께서 알리신 겁니까?"
마치 네가 꼰질렀냐며 위협하는 일진을 보는 느낌이다.
"내가 한 거 아닌데? 황제 폐하까 친족 관련해서 얼마나 빠른지는 나도 알잖아? 분명 어디선가 정보를 얻으신 거겠지. 그리고 내가 여기 온 건 얘네 3명한테 공지할 게 있어서란다."
리린은 루진의 기세에 조금도 눌리지 않았다. 애초에 리린이 누구인가, 황금 길드의 단장이다. 그런 자가 저 정도에 압박에 어떻게 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루진의 말에 간단히 대꾸했다. 기사는 끊임없이 루진에게 돌아가자고 강요하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황제가 그녀를 부른 모양이다.
하지만 루진은 가기 싫은 건지, 아니면 나랑 더 붙어있고 싶은 건지 내 팔을 놓지 않았다.
근데 황제가 부른 거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거기에 그녀는 황제의 딸이다. 명령을 어기는 건 불가능할 터, 나는 루진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황제 폐하의 부름이면 응해야지. 가봐."
다른 누구도 아닌 황제의 부름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그 부름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저 투정을 부르는 것뿐이겠지.
"크윽! 너까지 그렇게 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러면 짐을 싼 다음 내일..."
"아니요, 지금 바로 가셔야 합니다. 황금의 성에서 황제 폐하께서 당신이 돌아오시길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그러면 이번에 유진, 너도 나랑 같이 가지!"
"그것 또한 불가합니다. 황제 폐하께서 부르신 건 황녀님뿐입니다. 다른 분을 황금의 성에 동행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이동을 게이트를 이용할 것이니 가는 길까지의 동행도 불가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기사가 나를 슬쩍 보았다.
"...또한 동행이 가능할 만큼 저분이 한가하지도 않으신 것 같군요."
마지막 말은 작고 조용하게 말했지만, 감각이 뛰어난 나이기에 다 들렸다.
'근데 저거 나 말하는 건가?"
묘한 배려이자 확신이다. 저 기사 방금의 사과도 그렇고, 아까부터 묘하게 나를 신경 쓰는 것 같다.
복장이나 분위기, 그리고 루진과 리린이 막대하지 못하는걸 보면 나름 고위층 같은데 왜 저러지?
'뭐, 저 기사에 관한 건 그다지 중요치 않으니 상관없으려나.'
나는 대충 그렇게 생각하며 넘겼다. 그사이 내 예상대로 루진은 기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고, 이 사실에 가장 신난 건 다름 아닌 아리스였다.
그녀는 실실 웃으며 기사에게 쩔쩔매는 루진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은근히 비꼬는데 사이가 어느 정도 좋아졌어도 앙금이 남아있었나 보다.
"아무래도 황녀님께서는 아주 바쁘신 모양이네. 그렇지 유진아?"
그녀는 그리 말하며 내 팔을 방금의 루진처럼 꼬옥 껴안았다. 제대로 된 한방에 루진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하나 싶었으나 기사의 재촉에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아, 알았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지."
길고 긴 말싸움 끝에 먼저 백기를 든 건 루진이었다. 그녀는 진이 다 빠진듯한 모습으로 기사의 말에 승낙했다.
이에 기사는 루진을 호위하듯 곁에서서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여태까지 황녀님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진경."
"이정도야 별거 아니죠, 근데 제가 왜 경이라는 거죠?"
'경'은 특정 지위의 신하나 기사에게 사용되는 용어인데? 이걸 왜 나한테 쓰지? 설마 창세의 용사인가 뭔가 때문인가?
나는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냐는 의미로 기사를 빤히 보았다. 의미가 통한 건지 기사가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아마 경이 추측하시는 게 맞으실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기사의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있었지만 웃고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짙은 투기는 마치 즐겁고도 재미있는 장난감을 찾아낸 어린아이 같은, 그리고 호적수를 발견한 전사 같은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역시 그런가요."
하지만 나는 이런 경력만 수백 년. 연륜이 이것이라는 걸 보여주듯 투기를 넘겼다. 이에 기사의 몸이 옅게 떨렸으나 곧 밝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대단하군! 소문과 내가 예상한 것 이상이야, 이거 추후가 기대되는군!"
어느덧 존댓말까지 때려치우니 그곳에 있는 건 전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듯 크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는 고개 숙여 사과했다.
기사의 행동과 반응을 보자니 창세의 용사에 관한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근데 루진의 말로는 창세의 기사와 관련된 건 고위층만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러면 저 기사도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높은 지위의 기사란 건데...
"그러면 빠른 시일 내 애 수도에서 유진 플라비스라는 이름으로 뵙길 기원하며,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연스럽게 내가 루진한테 데릴사위로 들어갈 거라 말하며 기사는 사라졌다. 여기에 올 때와는 달리 매어 빠른 발걸음이 인상적이다.
"후우, 이제야 사라졌네."
기사가 사라지자 리린이 목을 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쩔쩔매던 루진도 그렇고, 지금 리린 플라비스의 반응도 그렇고, 누구길래 저런 반응이지?
나는 궁금해져서 물어봤다.
"대체 저 기사가 누구길래 루진이 쩔쩔맸던 겁니까?"
"아, 너희는 저 남자가 누군지 모르겠구나. 저 남자는 황실 기사단 중에서도 가장 특이하며 가장 강력한 황제의 검인, 제 1기사단의 일원이야."
제 1기사단! 그 말에 나는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제 1기사단은 황제 직속의 기사단 중 단 3명으로만 구성된, 기사라기보다는 살육 병기에 가까운 자들의 모임이다.
이들의 활약상만 찾아봐도 단신으로 성을 쓸어버리고, 상대 영지로 쳐들어가 왕의 멱을 따오는 등등,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득하다.
저들은 제국처럼 던전을 지니지 못한 나머지 잡졸 왕국이 제국에 감히 반항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양반이면 두 사람이 쩔쩔 매는 게 납득이 가네요. 그리고 저 사람이 저한테 유진 플라비스로 만나자는 말을 하다니…. 이거 사실상."
"응, 너 루진이랑 결혼 확정이야. 이미 황제 폐하의 귀속에 너랑 루진이 얼마나 끈끈한 사이이진 연락이 가서 빼지도 못해."
나랑 루진의 사이를 표현하는 건지 리린이 한쪽 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고 다른 손의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쑤신다.
음, 이거 좋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황녀와 결혼 하는 것 자체는 좋다. 신분 상승에다가 단번에 엄청난 재력을 얻게 되는데 싫을 리가 있나.
다만 인생의 무덤이라 불리는 결혼생활을 몇 번이나 해본 만큼 개인적으로 결혼은 최대한 늦추고 싶다.
"설마 지금 당장 결혼하라고 하지는 않겠죠?"
아무리 루진이 매력적인 여자라도 난 좀 더 많은 여자를 만나보고 싶다. 여기는 나를 위한 세계이니 최대한 본전을 뽑을 생각이다.
"흐음..."
리린은 내 말을 어떻게 알아들은 건지 뭔가를 고민하더니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루진이 별로라면 결혼 상대로는 나도 있단다. 황금 길드의 단장을 떠나 나도 황족이자 황가의 인물이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유혹하듯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자기도 할 때는 할 줄 안다고 말하듯 저번과는 달리 끈적하고 관능적인 눈길로 내 전신을 흩었다.
그러면서 한쪽 눈을 찡긋하는 게 장난 같다. 하지만 워낙에 본판이 뛰어나다 보니 평소와는 심히 다른 모습도 꼴린다.
꼴리다 보니 자지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며 커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아리스가 리린을 경계하듯 몸을 더욱 밀어붙이면서 가슴이 내 몸에 꾸욱꾸욱 눌린다.
아무 말 없이 이러고 있으니 가슴의 감촉이 더 잘 느껴진다.
나는 흥분한 걸 감추고자 일부러 장난스레 말했다.
"근데 저보다 10살 이상의 연상은 조금..."
"저기, 이런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저를 부른 이유를..."
"뭐라고!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그런 소리를 해!"
"음, 30대?"
내 말에 리린의 몸이 순간 멈췄다. 마치 조각상처럼 우뚝 멈춰버린 몸은 끼기긱, 나를 향해 돌아갔다.
"저기, 내 말 좀..."
"아니야! 아니라고! 난 이제 막 20대 중반이란 말이야!"
오, 의미는 없지만, 신기한 정보를 알았다. 루진의 이모라고 하길래 30살 이상일 거라 판단했는데 설마하니 20대 중반일 줄이야.
아, 물론 그녀가 나이 많아 보인다는 건 아니다. 그녀와 루진을 동일한 곳에 놓고 보면 그냥 자매로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다.
"근데 단장님은 뭐랄까. 분위기? 그런 게 어른스럽고 그렇다 보니 아, 이 사람이 나이가 많구나. 이런 생각이 절로 들어요."
"...저기요?"
"끄읏!"
"근데 외모가 너무 어리다 보니 헷갈리기도 하네요. 솔직히 루진이랑 단장님이랑 그냥 자매 같거든요."
"훗! 우리 황가의 외모가 뛰어나긴 하지!"
내 지적에 그녀가 분하다는 듯 몸을 떨었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 눈이 태양빛에 녹듯 사르르, 얼굴이 풀려버렸다. 의외로 칭찬에 약한 모양이다.
"아오, 쫌! 내 말 좀 들어달라고!!!"
그때 리린의 옆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근원지를 보니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유벨이 화났다는 표정으로 방방 날뛰고 있었다.
"무시하는 거야 뭐야! 왜 사람을 불러놓고 방치하는데! 왜 몇 번이고 말해도 안 들어 주는데!"
마치 고양이가 햐악질을 하듯 잔뜩 날을 세운 채 으르렁거린다.
"뭐야, 너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 투명 마법 쓰고 있었니?"
기사라는 양반의 기세가 워낙에 강력한 탓에 그녀가 있는걸 알아채지 못했다.
"뭐가 투명 마법이야! 나 그런 거 배워도 못쓰거든! 난 아직 하급 마법사라고!"
어지간히도 화가 났는지 마법사의 생명이라는 지팡이를 휘두른다. 오, 나름 힘이 좋구나. 나중에 시간 되면 전투 마법이란 방망이질 좀 가르칠까.
그런 시답잖은 생각이나 하며 유 벨을 지팡이를 잡아 세웠다. 이에 지팡이를 잡아당기며 낑낑댄다.
아리스는 그런 내 팔을 감싸며 말했다.
"유진아, 유벨 너무 괴롭히지 마."
그녀의 말에 나는 지팡이를 놔주었다. 유벨은 지팡이를 회수하며 나를 찢어 죽일듯이 노려봤다.
"그만, 장난은 이제 여기까지 하지."
카리스마 모드를 ON 한 리린이 유벨을 말렸다. 그리고 그녀가 진짜 목적을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 3명인 한 조다. 그리고 3명이서 졸업 시험을 진행하겠다. 너희 둘의 성장 속도가 빠른 탓에 특별히 해주는 거니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도록."
"잠깐, 시험이라니! 저는 아직 마법을 전부 익히지 못했는데요!"
"전투 마법은 전부 익혔으니 상관없지 않나. 그리고 졸업했다고 해서 수업이 끝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때부터 시작이지."
리린은 아리스를 가리켰다.
"저 소녀는 현재 라피드의 제자로서 수행 받는 중."
이번에는 유 벨을 가리켰다.
"너는 졸업 후 마탑에서 원하는 마법을 익히면 된다. 시험은 3일 후에 시작이며, 첫 시험은 던전 10층에 서식하는 몬스터의 부산물을 얻는 거다. 준비 단단히 하도록."
그녀는 그렇게 폭탄을 터트린 채 유유히 가버렸다. 그리고 졸지에 나는 아직 허점과 미숙함으로 무장한 두 명을 데리고 새로운 모험(구르기)을 하게 되었다.
절로 식은땀이 흐른다. 맹한 표정으로 헤헤 웃으며 마력을 잘써보려 노력 중인 아리스와 아직도 씩씩대는 유벨까지.
씨발, 내 능숙하던 황녀님 돌려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