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데이트를 즐기다.
공연장엔 사람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이 세계도 중세 세상의 특성상 즐길 오락 거리가 적기에 소수의 오락 거리에 사람이 많이 몰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연은 공연장으로 보이는 커다란 건물에서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제대로 된 공연이다.
"괜히 황제 폐하의 부름을 받을 거란 얘기가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치! 나 벌써 두근거려!"
이렇게 공연장을 대여해서 공연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그들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리스는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총 몇 분 이 신가요?"
"2명입니다. 표 2장 주시죠."
"네, 하나당 50 동화씩이니 총 은화 1개입니다."
비싸다.
이상하게 비싼 가격이지만 이렇게 차려입고 저런 가격에 태클 걸기도 뭐해서 그냥 샀다.
"아리스, 이제 들어가자."
"응! 기대된다!"
우리는 표를 구매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우와~"
아리스가 건물 내부를 둘러보고 감탄을 터트렸다.
건물 내부는 창문 하나 없어 전체적으로 어두웠으나 곳곳에 걸린 향로 같은 것들이 밝은 빛을 내며 은은한 향기를 냈다.
또한 복도 정중앙에는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사치스러운 입장 문과 그 옆에는 갈색의 평범한 입장 문이 있었다.
아마 귀족과 평민을 나누는 문이겠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같지만, 평민과 같은 문을 지나는 건 프라이드 강한 귀족한테 있어서는 모욕이나 마찬가지니까.
"정말이지. 귀족들은 어떤 세계든 피곤하게 산다니까. 융통성이란 게 없어요."
"응? 뭐가 말이야?"
"아니, 별거 아니야. 그보다 공연 시작하기 전인 것 같은데...여기 구경이나 해보겠어요. 레이디?"
공손하게 몸을 숙여 마치 신사처럼 말해봤다.
"어...어? 응! 구경할래요!"
"내가 에스코트해줄게."
뒤늦게 화들짝 놀라며 반응하는 귀여운 아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놓칠세라 내 손을 꾸욱 잡았다.
나는 그녀를 껴안듯 허리에 손을 두르고 함께 복도를 걸었다. 운치 있고 분위기 좋은 복도는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단순히 걷는 것 뿐이지만 그것만으로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 좋다.
"하아~ 여기 분위기도 그렇고 정말 좋아. 오길 잘한 것 같아."
"그러게. 나도 처음에는 좀 거북했었는데. 아리스랑 단둘이 걷는 것 만으로 기분 좋아."
우리 사이로 애틋한 감정이 무럭무럭 자라난다.
"야야, 저기 봐봐."
"어디? 우와! 선남선녀네!"
누군가가 우리를 바라보며 평가한다. 그제야 우리는 둘만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드니 주변에서 우리처럼 혹은 혼자 서 있는 모험자를 비롯한 평민들이 보였다.
그들은 나름 깔끔해 보이는 옷을 입었지만, 평민인 티가 팍팍 났고 그런 만큼 화려한 옷을 입은 우리를 보며 더 수군거렸다.
그리고 수근 거림의 대부분은 칭찬이었다.
"저 여자 좀 봐. 가슴 엄청나게 크다. 어떻게 저런 드레스 위로 빵빵하게 솟아있을수 있지."
"가슴 말고 얼굴도 한번 봐봐. 가슴만 큰 여자들이랑 다르게 얼굴도 존나 예쁘잖아! 씨발, 저런 여자랑 연인인 남자가 부럽네!"
주로 남자들은 아리스 에게 군침을 흘리며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면 그들과 같이 온 여자들이 코웃음 친다.
"웃기네. 여자만 예쁘고 매력적이냐. 저 남자 좀 봐봐. 너네랑 달리 몸이 딱! 조화를 이루고 깔끔한게 보기 좋은데다 엄청나게난 미남이잖아! 씨발, 여자 쪽 겁나 부럽네. 분명 아래쪽도 엄청나게 클거야."
"에효~ 더러운 세상 같으니 누구는 귀족에 잘생기고 돈도 많고 미인까지 데리고 다니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인데 누구는 고릴라나 데리고 다니니..."
"누가 고릴라라는 거야!"
"우왁! 그만두라고 고릴라!!!"
소란스럽다.
신경 쓸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칭찬받으니 기분은 좋았다.
"유진아. 너도 들었어? 우리 잘 어울리는 한 쌍이래!"
자애롭고 유독 나와 엮이는 걸 기뻐하는 아리스는 잘 어울린다는 칭찬이 어지간히도 좋은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팔장을 통해 엮인 팔로 그녀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잘 전해진다.
"이러고 있으니까 가슴이 간질거려."
아리스는 그리 말하며 자신의 풍만한 가슴 사이에 손을 꾸욱 눌렀다. 이에 크게 흔들리는 가슴.
주변 사내들은 아리스의 풍만한 가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간혹 너무 집중하다 파트너로 보이는 여성에게 차가운 눈총을 받는 사내도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 남자라면 어떻게 이런 크고 아름다운 가슴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가슴이 나만의 전유물이기에 우월감도 들었다. 이를 만끽하며 시계를 보니 공연 시간이 가까이 다가왔다.
"아리스, 이제 안으로 들어갈 시간이야."
그녀를 에스코트해 중앙에 있던 문으로 향했다. 문에는 험상궂어 보이는 사내들이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입고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중 한 명이 여기 사람 중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은 우리에게 다가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번에 저희 공연단의 공연을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표를 확인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구매한 표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는 표를 확인했다.
"아이고~ 스페설 표를 구매하셨군요! 여기로 오시죠!"
그가 안내한 곳은 다름 아닌 거대하고 화려했던 문. 곧 다른 사내들이 더 몰려와 우리에게 친절하기 머리를 안내하고는 공연 관람에 사용되는 전용 망원경을 주고 갔다.
"표가 비쌌던 이유가 우리를 귀족으로 착각해서 비싼 표를 줬던 거였어."
"어쩐지 표 한장에 동화 50개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이더니! 그, 그래도 이렇게 넓은 곳에 단둘이 있으니까 좋다!"
아리스는 밝게 웃으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화려한 문을 통해 들어가는 곳과 평범한 문을 통해 들어가는 곳은 단순히 문의 차이만 있는데 아니라 실제로 공간도 갈라져 있었기에 우리 외에 사람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거리낌 없이 스킨쉽했다. 우리는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곧 조명이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몇 번째인가 이를 반복했을 때 무대에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났다.
"저희 공연단에 찾아와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희 공연단의 공연을 관람해 주십시요!"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
이 이야기는 전설을 모티브로 하여 제작 된 이야기 입니다.
늑대의 기사 아스토리우스!
그는 창세신의 축복을 받아 세상을 구할 자이며 잿빛 늑대 모라타와 함께 세계를 누비는 고귀한 여행자이니.
그가 거리를 걸었다. 한때 자신의 고향이자 친우들이 살던 마을은 그 무엇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아...아아!"
늑대의 기사는 주저앉았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갈기갈기 찢긴 부모님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부짖었다.
아아, 하늘이여!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시련을 내리십니까 어찌 제가 사랑하는 자들을 전부 하늘로 데려가실 수 있습니까!
기사는 울분을 담아 외치고 또 외쳤다. 그러나 답변을 돌아오지 않았다. 신은 어떠한 계시도 내려주지 않았다.
끼이잉~
그런 그에게 잿빛 늑대가 다가왔다. 늑대는 자신의 주인이자 고귀한 기사인 아스토리우스가 슬픔에 잠겨 자신을 스스로 망가트리는 것이 싫었다.
"아아, 나의 유일한 친우 모라타여. 너는 아직 내 곁에 있구나. 그래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다! 나는 억울하기 살해된 사람들의 원수를 갚겠다!"
아스토리우스는 힘차게 일어나 길을 떠났다. 자신의 마을을 공격했던 마물들을 찾아내 한 명씩 처리해 나갔다.
거대한 도끼를 든 오우거들의 왕이 목이 잘려 주저앉았다.
사악한 흑마법을 다루는 리치와 그의 언데드 군세가 늑대의 발톱에 찢겨 죽었다.
사람을 잡아먹어 온 식인 야만 전사는 자신의 쌍도끼가 아스토리우스의 검에 부서지며 절명했다.
인간을 학살해 온 다크 엘프는 자신의 활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하늘을 누비며 재앙을 흩뿌리던 사악한 마룡 아투스가 허공에서 떨어져 차갑게 식었다.
하나같이 무섭고도 강인한 존재들이었으나 결국 아스토리우스의 심판에선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대망의 마지막 숙적을 앞두게 되었다.
키잉~ 키이잉~
잿빛 늑대가 늑대 기사의 몸에 안긴 채 작게 울었다. 잿빛 늑대는 늑대 기사가 이 싸움을 멈추길 간절히 바랬다.
"나의 친우여. 너가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여기까지 느껴지는구나. 나도 안다. 이번에 상대할 적은 여태까지 상대란 놈들과 격 자체가 다르다는 걸."
그는 마지막 숙적이 있는 골짜기의 깊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너무나도 두렵고 무서우나 동시에 불쌍하게 느껴지는 어둠을.
끼이잉~
잿빛 늑대는 다시 한번 그를 만류했다. 아스토리우스는 늑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하구나 나의 친우여."
늑대의 기사는 이미 멈출 수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늑대 대검을 들고 모든 것의 원흉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차갑고도 어두운 냉혹한 골짜기의 왕. 이 세상의 모든 악의 합쳐진 듯한 존재였으니.
아스토리우스는 그 존재를 처단하기 위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는 더는 개인의 복수심이 아닌 진정으로 세계를 지키기 위하여 그 존재를 상대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나도 막강했다..어둠처럼, 혹은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하는 몸은 아스토리우스의 모든 검을 흘려보냈다.
"아니! 이, 이럴 수가!"
그는 경악했다. 자신의 검이 통하지 않는 존재를 그는 단 한번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신에게 받은 그 잘난 가호 따위로 날 상대하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어둠이 그를 감싼다. 신의 가호는 더는 빛을 내지 못했다. 아스토리우스는 어둠에 잠겨가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친우인 잿빛 늑대를 보호했다.
아스토리우스는 이윽고 어둠에 삼켜졌다. 그렇게 그의 생은, 그의 전설은 막을 내렸다.
•••
공연이 끝났다. 아리스는 여운이 깊게 남았는지 멍한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있었다.
하긴 여운이 깊게 남을만한 작품이었다.
"비록 배드 엔딩인게 조금 거슬리지만, 충분히 좋았어."
늑대의 기사라는 이야기 자체도 좋았지만, 공연단의 공연 실력도 좋았다.
마치 늑대를 형상화한듯한 커다란 대검과 갑옷은 물론이고 잿빛 늑대는 직접 길들인 티가 나는 멋진 늑대가 직접 맡았다.
덕분에 위화감이 적어 쉽게 극에 몰입할 수 있었다.
"우, 우와아..."
아리스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뱉은 말은 일말의 감탄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리스 이제 나가자. 공연은 끝났어."
그녀의 머리를 톡 건드렸다. 화들짝 놀란 아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공연 끝났구나."
"많이 아쉬운가 보네."
"응! 엄청나게 아쉬워! 진짜 재미있는 공연이었잖아! 근데 마지막에 영웅이 악당한테 패배하고 끝나다니..."
우리는 공연장에서 나와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아리스가 공연의 엔딩에 툴툴거린다. 진짜 어지간히 좋았던 모양이다.
"근데 나는 오히려 배드 엔딩이라 더 좋던데. 거슬리긴 하지만 늑대의 기사 이야기는 배드 엔딩 이었기에 좀 더 의미 있었던 것 같아."
이 공연은 마을이 파괴되고 친우와 가족을 잃게 된 늑대의 기사 시점에서 시작된다. 그가 누구인지 어떤 과거를 지녔는지는 짧게 언급만 될 뿐 직접 나오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늑대의 기사는 그야말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그저 신의 축복을 받은 영웅이라는 것만 알뿐이다.
그런 그가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그라는 인물에게 몰입하고 감정이입을 할수 있었다. 밝혀진 사실이 적을수록 주인공을 자신이라 여기기 쉬운 법이니까.
그렇기에 배드 엔딩으로서 최후를 맞이할 때 그의 고귀함과 끔찍한 죽음은 더욱 긴 여운을 남겼다.
뭐랄까...희망을 보여주다가 그걸 콱! 짓밟는 인상 깊은 전개였다.
"어, 아니...그건 좀."
"아리스. 원래 비극이란 건 희망과 대조되고 희망을 거름 삼아 피어나기에 더욱 의미 있고 재밌는 거야. 흔히들 이걸 유-열이라 말하지."
"유열이라.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는 않네."
우리는 공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의견을 나눴다.
"아, 여기야!"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딘가에 도착했다. 그곳은 식당이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식당.
"미리 예약했으니 들어가기만 하면 될 거야."
아리스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여기 어제 예약했던 사람인데요."
그녀는 꽤나 능숙하기 종업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리고 음식을 시켰다.
음식 맛은 상당히 훌륭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만찬을 즐기다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왔네?"
피곤한 얼굴로 유벨이 우리를 맞이해줬다.
아리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언니. 오늘은 충분히 즐긴 것인지? 내일은 내 차례야."
"알고 있어. 순서는 지킬 테니까 걱정 마."
아리스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유벨의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유벨은 얼굴을 붉히고 내 손가락을 꼬옥 쥐었다.
"내일은 나랑 같이 마법에 관해 이야기를 좀 나눠야겠어."
아무래도 아리스랑 유벨 둘이서 나를 나눠 쓸 계획을 세웠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