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82화 〉 유적 공략­마녀의 유산 (182/198)

〈 182화 〉 유적 공략­마녀의 유산

* * *

어딘지 알 수 없는 몽환적인 세계. 저 멀리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이 반짝거리고 땅은 없이 나 홀로 두둥실 떠올라 있다.

이것들은 현실 같지 않은, 마치 꿈같이 덧없고도 황홀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 광경은 꿈이다. 아주 오래전 내 끝나지 않는 삶이 시작된 계약의 장소다.

"갑자기 왜 그때의 꿈을 꾸는 거지..."

내 인생에 단 한 점의 후회도 없으나 유일하게 후회하는 것이 있다면 이때 이 꿈속에서 창세신의 말을 단순 꿈으로 착각했다는 거다.

그탓에 그 시절의 나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창세신의 제안을 덥썩 받아들였다.

명백히 나를 속인 사기계약이었지만 이미 계약은 맺어진 뒤고 계약이 아니어도 창세신은 철저한 갑이었기에 반항도 못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신나게 구르고 있지.

"쩝,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왜 사람들 사이에서 회귀물이 유행하고 회귀물이 사랑 받는지 나는 절절하게 깨달았다.

후회되고 과거로 돌아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런 거다.

실제로 내가 만난 회귀자들은 천재든, 범재든 특이한 변수가 없는 한 알아서 잘했다.

"아, 나도 회귀하고 싶다."

가능했다면 내가 계약을 맺지 않을 텐데. 그렇게 되면 지금의 인연도 사라지겠지.

그래도 적어도 창세신의 장난감으로서 무한하게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나도 회귀하고 싶다고 외쳐대다가 문득 허무해져서 입을 다물었다.

회귀, 회귀 외쳤지만 창세신은 시간조차 초월한 존재다. 회귀한들 시간의 역행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내 계약도 사라지지 않겠지.

"....어라?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창세신은 과거, 현재, 미래에 전부 영향을 끼칠 수 있었지. 그렇다면 그는 미래의 나도 지켜보고 있나?

창세신이 현재의 '나'만이 아닌 과거나 미래의 나 또한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미래의 나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 보다 미래의 나는 얼마나 망가져 있고 얼마나 경험이 쌓여있을까 같은 생각이 먼저 드는 나도 정상은 아닐 것이다.

한숨이나 마저 내쉬며 이 몽환적인 공간에 몸을 맡기려니 저 멀리 인기척이 느껴졌다.

내 꿈속에 웬 인기척인가 해서 그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고등학생 교복을 착용한 고교생이던 내가 있었다.

그리고 고교생인 나는 환한 빛무리. 자신을 창세신이라 자칭하는 존재와 마주하고 있었다.

"안돼애애애애애!!!!!"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땅이란 게 없는 이곳에서 단숨에 힘을 주고 나를 항해 날아갔다.

콰앙­!

하지만 투명한 벽에 막혔다. 이것은 환상이니, 한순간의 꿈에 불과하니 다가가지 말라는 듯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은 날 멈춰 세웠다.

"씨이발! 이딴 벽에 막힐까 보냐!"

무기 따윈 없지만, 나에게는 그것보다 강력한 두 주먹이 있다! 양손을 들어 세차게 벽을 후려친다.

콰앙! 콰앙!

"부서져! 부서져! 부서져! 부서져! 부서지라고!!!"

몸의 마력과 힘을 전부 끌어모아 끊임없이 벽을 두들겼다.

이게 꿈이라 해도 내가 보는 환상이라 해도 씨발 내가 사기 계약 당하는 걸 지켜보기만 할수 없잖아!

"어떻게 하겠나?"

그때 창세신이 입을 열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았던 빛을 한층 더 키우며 성스러운 오오라를 내뿜어댔다.

그 빛에 어린 시절의 나는 두 눈을 가리고는 작게 투덜거렸다.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진 않지만 꿈 주제에 뭐 이리 밝은 빛이냐고 투덜거리고 있을 것이다. 이거 꿈 아니야 병신 새끼야!

"멈춰! 저 새끼 창세신이 아니라 개새끼의 신이야! 지옥의 악마 같은 놈이야! 당장 멈춰!"

콰앙­!!!

모든 마력을 손에 끌어모아 장벽을 때렸다.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수준의 마력과 힘에 왼손이 박살 났다.

"절대 저놈이랑 계약하지 마! 계약하는 순간, 네 인생은 끝이야! 살아있는 게 산 게 아니라고!"

오른손에 신성력과 마력을 융합시킨다. 서로 다른 두 에너지가 반발하며 강력한 공명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것도 내 오른손만을 부술 뿐 장벽에는 흠짐도 나지 않았다.

"씨발...씨발....씨발!!!"

나는 강하다. 나는 반신의 영역에 오른 자다. 그러나 이 장벽을 부수기엔 약했다.

내가 강해지길 포기한 건 아니지만, 지금의 상태가 나의 한계고 성장은 멈춘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의 나는 빛무리와 계약을 맺기 위해 손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역으로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후우~ 좋아. 이렇게 된 거 내가 뒤지는 한이 있어도 이거 부순다."

이게 창세신의 계략인지 아니면 진짜 내 꿈인지는 이제 알 바 아니다. 그저 저걸 부수고 과거의 내 뺨을 한 대라도 후려친다.

"그게 내 목표다!"

남아있는 마력과 신성력을 모조리 끌어온다. 몸 이곳저곳에서 반발작용이 일어났지만 무시했다.

이제 이 벽에 꼴아박는다! 몸이 조각나겠지만 저걸 부술 수는 있겠지!

박살난 두 팔 대신 발로 걷어차려는 그때. 누군가가 기척도 없이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밀쳤다.

그다지 강하게 민 것도 아닌데 내 몸은 갓난아이 마냥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장벽에서 멀어졌다. 기껏 모인 힘이 허공에 녹아 증발했다.

"이런 개씨발!!!"

이제 모을 힘도 없는데! 날 방해한 게 누구인가! 나는 날 밀어버린 장본인을 보았고...아무말도 꺼낼 수 없었다.

"어, 라?"

그곳에 있던 건 또 다른 '나'였다. 나는 여러 번 생을 반복하며 여러 번 외모가 바뀌었다.

하지만 첫 인생이자 이런 삶의 시작이었던 고교생 시절의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저건 고교생 시절의...'

"내가 아니지. 그야 그때 이런 힘을 가지고 있을 리 없고 널 건드릴 수도 없을 테니까."

그가 입을 열었다. 그때의 내 목소리나 그 속에는 연륜이 가득했고 이에 직감할 수 있었다. 저건 미래의 나라는 것을.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입이 굳어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저 쉬이 받아 드릴 수 없는 정보를 보고 받아들이고자 애쓰는 게 최대였다.

'미래의 내가 어째서 여기에? 역시 이건 꿈이 아니었나! 그보다 미래의 나는 외모가 왜 저런 거지? 설마 창세신이 나중에 본래 내 세계에 떨구기도 하는 건가!'

"어이, 네 심정은 알겠지만 진정해. 그리고 머릿속을 정리해. 이곳은 꿈이지만 동시에 꿈이 아니야. 이게 뭔 개쌉소리인가 싶을 텐데. 주인공 곁에서 오래 지낸 너라면 무슨 뜻인지 알 거 아니야."

그 말에 나는 절로 진정되었다. 그리고 그 말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정리라기보다는 받아들이기 어렵고 이해도 안 되는 현 상황을 머리 한곳에 치워버렸다.

"좋아, 잘했어.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것도 많겠지만 이제 슬슬 헤어질 때니까 이거 하나만 말할게. 여태 너를 보고 했던 신들의 말을 기억해."

"...뭐?"

"어어...지금 네 상태가 두자릿수 초반부쯤이니까...분명 아주 작은 위안을 얻게 된 구간이겠지. 그리고 아마 던전이나 유적에 있을 테고. 그러면 조만간 알게 될 거야."

"자, 잠깐만!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아니, 설명도 환상도 여기서 끝이야."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작은 단검을 꺼냈다. 기껏해야 과도 수준의 작디작은 검을 꼬옥 쥐며 미래의 나는 장벽에 다가갔다.

"이게 뭔 개 같은 일인가 싶겠지. 나도 지금 마찬가지야. 과거의 나를 만나 반갑기는 하지만 나는 바쁘거든. 이곳에 묶여있을 시간이 없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단검을 들어 올렸고 그대로 아래로 그어내렷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멀쩡했던 장벽이 단숨에 잘려나갔다.

그 광경을 끝으로 내가 있던 장소는 블랙홀에 흡수되듯 검게 물들었다.

미래의 나도 과거의 나도 더는 보이지 않게 될쯤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단숨에 힘을 줘 몸을 일으켜 세운다. 박살 났을 손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의 상처는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멀쩡했고 나는 알몸의 상태로 땀에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씨발."

기억났다. 웬지 몇 주나 지난 것 같은 기분이지만 실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나는 플로네랑 떡을 치고 잠들었었지. 근데 꿈에서 그런걸 볼 줄이야.

"과거랑 현재랑 미래가 마주 본다니 그야말로 주인공한테나 있을법한 일이네."

그리고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지. 나는 마른 세수를 하며 나를 지켜보고 있을 창세신을 올려다보았다.

저 위에는 유적의 벽만이 존재하나 창세신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이 든다.

"이번 일도 네 짓이겠지."

[ㅋ]

내 말에 창세신은 간단하게 답했다. 이 만악의 근원 같으니! 이가 갈린다.

"하아~ 진정하자. 저 새끼한테 화내봤자 나만 손해지."

몸의 땀을 수건으로 닦으며 옷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플로네는 피곤했는지 새근새근 잘도 잔다.

밖으 고요했다. 나만 깨어났나. 유적의 구석진 곳. 커다란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앉는다.

그리고 두 눈을 감으며 미래의 내가 한 말을 떠올렸다. '신들이 나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라' 인가.

"신들이 나한테 한 말이라."

기억하고 있다. 신들은 나를 볼 때마다 육체와 영혼 간의 간극이 너무 큰 불안정한 존재, 혹은 반신이라 불렀었다.

"그리고...뭐였더라 영혼의 그릇을 만들라고 했었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만나는 신들마다 죄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했었지.

신들의 말 중 지금 나한테 도움이 될만한 조언은 없다. 그렇다고 미래의 내가 구라를 쳤을 리는 없는데.

나는 미래의 나를 믿으며 신들의 말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다른 모두가 깨어날 때 까지 그럴듯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

?

?

유적 공략을 이어나간다.

왕자의 명령에 모인 러셀 왕국의 병사들과 플로네와 아이샤 펜드라건의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엘프들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왕자의 곁에서 걸어오는 면포로 얼굴을 가린 마녀 모르간이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나왔다.

"후후훗."

모르간이 날 힐끔 바라보더니 수상하게 웃는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진득한 욕망이 느껴졌다.

모르간은 나를 원하고 있다. 이를 느낄 수 있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하지만 마녀란 족속이 원래 그런 종족이기에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언제쯤 나를 노리려나 기다렸다. 저쪽에서 개수작을 부린다면 이쪽은 더 큰 수작을 부릴 준비가 되어있지.

'준비는 됐지. 나의 형제여!"

[당연하지! 언제든지 나를 풀어라! 최강의 힘을 보여줄 테니!]

든든한 흑룡의 외침을 듣고 있으니 얼른 마녀가 수작을 부려줬으면 한다.

우리는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찾아냈다. 투기장 같은 커다란 외형 공간에 계단이 있었다.

"저건..."

"용사님께서는 이게 뭔지 아시겠나요?"

"대충 알 것 같아. 아마 개인, 혹은 단체의 힘을 증명하라는 거겠지. 준비된 괴물하고 싸워서 말이야."

이런 장소는 자주 봐서 어떤 용도인지 바로 감이 잡힌다.

"오오오! 역시나 용사님이세요! 용사님의 선구안은 대단하네요!"

플로네는 기분 좋게 나를 치켜세우며 두 눈을 반짝였다. 나에 대한 감탄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어 기분이 좋다.

"여길 보도록! 내가 어제 새로운 정보를 알아냈다!"

왕자는 모르간한테 정보가 적힌 석판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찾은 것 마냥 들어 올리며 자랑했다.

"이 석판에 따르면 이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힘을 증명해야 한다!"

역시 내 추측대로다. 아마 여기서는 자기 부하들은 존나 쉽게 통과시키고 나는 힘을 빼놓기 위해 최대한 강한 괴물을 많이 풀어놓겠지.

"용사. 그대는 우리 중 가장 강하지. 그러니 기사도의 모범으로서 먼저 나서는 게 어떤가? 아, 두렵다면 무리할 필요는 없지."

왕자의 뒷말은 무시하고 투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마력장막이 둘러져 있는 투기장은 내가 들어가자 급격히 단단해졌다.

"과연. 한 명이 들어가면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가는 것도 들어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거지."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들어가니 다들 놀란 듯이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모르간은 더 마음에 든다는 듯이 혀를 날름거리며 입술을 핥았다.

얼굴이 가려져 있으나 그 요염한 기색에 자지가 움찔거린다. 저년은 내가 반드시 좆쭐내준다.

그리 다짐하며 투기장에 서서 가볍게 몸을 풀어준다.

"까득! 그, 그래! 위대한 용사가 먼저 나섰으니 그의 활약을 지켜보자고!"

왕자는 이를 갈며 나를 노려보다가 어찌어찌 밝게 웃으며 그리 말했다. 그리고 곧 음험하게 웃었다.

"후후, 용사의 활약을 지켜보자고."

보아하니 가장 강한 몬스터를 풀어서 내가 고전하는걸 보고 싶은가 보네.

'얼간이 녀석. 나를 고전시킬만한 상대는 이 유적에서 흑룡밖에 없다.'

[상대의 수준을 탐색. 최적의 몬스터 배치. 몬스터명:흑룡]

그리고 진짜 흑룡이 배치되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