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8화 (8/193)

<-- 임신시키기 -->

학교에 도착한 성준은 오랜만에 입는 교복에다가 오랜만에 오는 학교에 어색한 기분을 느끼면서도 한 편으로는 비밀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정신이 없었다. 1학기와 달리 새롭게 자리가 배정되고, 고3에 조금 더 가까워진 만큼 교실 내에는 전과 다른 분위기가 흘렀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비밀을 유지해야 된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인사들도 모두 그의 머리를 빗겨나가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복잡한 정신을 깨버린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가 짝사랑하던 같은 반 여자애였다. ‘이민정’이라는 이름의 그 여학생은 성준이 작년부터 좋아했던 인물로, 그가 다니는 학교 내에서 가장 예쁘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유명했다.

“너 헌터부대 준비한다면서?”

“으응? 아...응, 맞아. 어떻게 알았어?”

성준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 건 순전히 외모 때문이었다. 검은색 긴 생머리에 지적이면서도 청순한 외모를 지닌 그녀는 얼굴부터 몸매에다가 성격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원래 이 시기에 이성 관계는 다른 것보단 외모에 중점을 두지 않던가. 그녀의 외모는 하나부터 열까지 성준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았기에 그녀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병석이가 그러던데?”

“아아, 그랬구나. 그런데...그건 왜?”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타고난 모태솔로였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제대로 말 못하는 건 당연했으며, 거절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용기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거기에다가 눈치까지 없었기에 아직까지도 그녀와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지금 그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이 기회를 어찌 그냥 날릴 수 있겠는가. 순식간에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던 비밀에 대한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오로지 그녀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다.

“그냥, 조금 신기해서. 고등학생인데 벌써부터 헌터부대 준비한다는 게 신기하잖아. 그리고 사실, 나도 대학보다는 HM연구소에 조금 더 관심이 많거든. 일단, 엄마 때문에 대학은 진학하겠지만, 솔직히 요즘 세상에 대학 나온다고 취업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니까. 몬스터가 아직까지도 이렇게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대학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그녀는 성준에게 헌터부대에 대해서 물었다. 우수한 성적을 지닌 그녀는 대학보다 이쪽으로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그녀 정도의 성적이라면 헌터부대에서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에 그녀의 고민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쪽이랑 수능 공부랑은 완전히 달라서 고민인 거지?”

“응응, 맞아. 대학 졸업 후에 다시 새로 공부하는 건 조금 시간 낭비니까. 그래서 말인데...네가 옆 반에 이강성이랑 친하다고 들었거든. 강성이 좀 소개해줄 수 있어? 걔네 부모님이 HM연구소에서 일하신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그녀의 목적은 성준이 아니라 이강성이었다. 이강성의 부모를 통해서 HM연구소에 대해서 알아내는 게 그녀의 목적이었다. 성준은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라고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그녀와 대화를 나눈 것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근데 왜 병석이가 아니라 나한테 부탁하는 거야?”

“병석이는 내가 이런 부탁하면 분명히 여기저기 말하고 다닐 애잖아. 너는 안 그럴 거지?”

“아...그래, 알았어. 내가 강성이한테 잘 말해볼게.”

“헤, 고마워. 부탁할게.”

그녀가 밝게 미소를 지으면서 성준에게 사탕 하나를 주었다. 고작 이거에 친구를 팔아넘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 덕분에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나아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려운 부탁은 아니니까...’

성준이 그녀가 준 사탕을 까먹었다. 그리고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비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직까진 괜찮아. 이 정도면 아무 문제 없겠는데?'

벌써 학교에 온지 여러 시간이 지난 후였다.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으며, 원래 예상했던 대로 흘러갔다. 이대로라면 큰 문제없이 지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 이번에 전학 왔다고 했는데 하도 정신이 없어서 무책임했어. 인사라도 해볼까?’

담임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번 여름에 전학을 왔다고 들었다. 중간에 전학을 오는 바람에 친구도 없이 많이 심심하고 외로웠을 텐데, 짝이라는 남자애가 아무 말도 없이 내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했을까. 성준은 괜히 죄책감이 들어서 그녀에게 정식으로 인사라도 하고자 했다.

현재 그녀는 폰을 만지작거리며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주변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로지 폰에만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성준은 어떤 식으로 말을 걸어야 될지 고민했다.

‘이제 와서 갑자기 인사하며 조금 어색하려나? 그래도 짝인데, 인사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그녀의 외모는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예쁘다기보다는 평범한 쪽에 가까웠지만, 연한 화장에 안경을 착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나 착해 보이는 외모가 성준에게는 마음에 들었다. 말 많고 활발한 친구보다는 이런 친구가 조금 더 짝으로 지내기는 편했기 때문이다.

“흠, 흠. 저기...”

“...응?”

괜스레 헛기침을 한 뒤, 그녀를 불렀다.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성준을 바라봤다.

“미안한데...펜 좀 빌릴 수 있을까? 내 펜이 안 나와서...”

고민 끝에 성준이 꺼낸 이야기는 펜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펜은 너무나도 잘 나오고 있었지만, 그는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며,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예쁜 모양의 핑크색 필통에서 검은색 펜을 하나 건네주었다.

“이번에 전학 왔다고?”

“아...응...”

그녀에게서 펜을 빌린 그는 이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자 했다.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짝이 된 만큼 어느 정도 통성명은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었다.

“어디서 전학 온 거야? 다른 지역?”

“아니...저기 하늘고등학교에서...”

“아아, 거기가 아마 여고였지? 거기서 왔구나.”

“응, 맞아...”

그녀는 보이는 것과 같이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직 그녀와 친해지지 않아서 본래의 성격은 알 수 없었지만, 성준이 그녀에게서 느끼는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조용한 성격의 애라면 굳이 이상한 일에 휘말릴 일도 없었고, 자신이 그녀에게 크게 휘둘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되는 건 그녀가 전학을 온 이유였다. 굳이 물어보진 않았지만, 다른 지역이 아닌 멀지 않는 학교에서 이곳으로 전학을 왔다는 건 특별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은 전 학교에서 특정 사건으로 인해 전학을 가는 경우가 많았으니, 아마도 그녀에게도 말하기 힘든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내 이름은 성준이야. 너는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미안, 내가 기억력이 썩 좋은 편이 아니라서.”

“나는...박수아...”

“수아? 이름이랑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앞으로 잘 지내자.”

“응, 그래...”

“오늘이 첫날이라서 아직까진 적응하기 힘들지? 미안해, 짝인데도 이제야 인사해서. 내가 요즘 정신이 없거든.”

“헌터부대 때문에...?”

“응? 아아, 그것도 그렇지.”

“아...미안, 아까 친구랑 했던 얘기...어쩌다보니까 엿들었거든.”

“괜찮아, 바로 옆에서 말하는데 못들을 수가 없지.”

이런 식으로 성준은 계속해서 그녀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쉬는 시간동안 이루어진 짧은 대화였지만, 이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그녀와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서는 짝사랑하는 이민정처럼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에 굉장히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성준의 그러한 태도는 그녀에게도 편안함을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새로운 짝궁하고도 친해질 수 있었던 성준은 이후로 마음 편하게 학교에서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학교생활에 녹아들어갔고, 이제 더 이상 비밀에 대한 걱정은 필요 없을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시간을 지나 6교시가 되었다. 6교시는 가장 지루하다고 할 수 있는 국어시간이었다. 국어 자체가 지루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국어 선생님 자체가 워낙 수업을 지루하게 진행했기에 누구도 졸음을 피해갈 수 없었다. 특히나 점심을 먹고 난 오후 시간이라면 더욱 그랬다.

이는 성준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더군다나 국어는 헌터부대와 전혀 관련이 없었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이 수업이 더욱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끝없는 헤드뱅잉 끝에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오늘이 27일이니까...27번? 27번이 일어나서 지문 읽어봐.”

국어선생님은 평소와 같이 수업을 진행했다. 항상 그날, 날짜에 맞는 번호의 학생을 불러서 지문을 읽게 했는데, 하필이면 27번이 성준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27번? 27번 누구야? 성준!! 헌터부대 준비한다고 해서 수업시간에 자도 괜찮지? 자꾸 이런 식이면 헌터부대고 뭐고 고등학교도 졸업 못하는 수가 있다. 얼른 일어나!”

한창 꿀잠을 자고 있던 성준은 국어선생님의 큰 목소리의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는 고개를 좌우로 크게 돌리며 한숨을 내쉬고, 짝궁에게 어느 부분을 읽어야 될지 물어봤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그에게는 사소하면서도 매우 큰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젠장...하필 이럴 때에...’

그의 문제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봤을 문제였다. 이 치명적인 문제는 단순히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생리현상이었으며, 돌이키기 위해서는 순간적인 엄청난 집중력과 함께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떡하지...분명히 금방 알아차릴 거야...그렇게 되면...나는...’

하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부족했다. 선생님이 소리까지 지른 마당에 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집중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었다가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반 애들이 의심할 게 뻔했고, 곧 그가 발기가 가능한 사람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될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되자,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생체실험부터 시작해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얼굴과 신상정보가 공개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기이한 현상이 몬스터의 짓이라면, 필시 그들의 공격까지 받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까지 들자, 성준은 더욱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그의 운명이 한 순간에 나락을 떨어지게 될 것인가.

“저, 선생님!”

“무슨 일이니?”

“저...제가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보건실에 잠시 다녀와도 괜찮을까요?”

그런데 그때였다. 성준의 옆에 있던 그녀, 성준의 짝궁인 박수아가 갑자기 손을 들고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들의 관심은 그녀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성준은 황금 같은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아, 너 전학생 맞지? 그래, 얼른 다녀와라.”

“네, 죄송합니다.”

그녀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던 성준은 간신히 화나있던 자신의 중심부를 잠재울 수 있었다. 그녀가 일어서서 교실을 떠나자마자, 성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나서 지문을 읽기 시작했고, 다행히 무사히 비밀을 지켜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그에게는 이 찰나의 순간이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