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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다음날
최근에 연달아 발생한 일들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했던 성준은 오늘도 역시 꿀잠을 자고 일어났다. 복잡한 머리와 달리 이상하게도 잠만 자면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마다 상쾌함을 느끼곤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제 발생했던 문제들로 인해서 또 다시 고민에 빠지고는 했지만, 그래도 잠을 잘 잘 수 있다는 점에서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은 이 고민들을 어느 정도 해소할 기회가 있었다. 어제 공부도 못한 채 오랜 시간을 고민했던 그는 한 가지 결심을 내렸다. 그는 그 결심을 다시 한 번 머릿속에 떠올리며, 각오를 단단히 한 채 학교로 출발했다.
‘아직 안 왔나보네. 설마 결석은 아니겠지?’
학교에 도착한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그의 짝궁, 박수아였다. 하지만 어제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구해준 그녀는 아직 학교에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함과 동시에 물어볼 게 있었던 성준은 그녀가 올 때까지 대기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제 아파서 조퇴했다고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아?”
“아...으응...지금은 괜찮아졌어.”
“다행이네. 나는 짝인데도 그렇게까지 아픈 줄 몰랐어. 내가 이런 쪽으로 좀 둔한 편이라.”
“아니야, 이젠 괜찮으니까.”
그녀의 모습은 어제와 크게 다를 게 없어보였다. 연한 화장에 어깨까지 오는 검은색 머리와 안경, 평범하면서도 귀여움이 느껴지는 외모 역시 그대로였다. 성준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고, 그녀는 성준에게 전혀 불편함 없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으음...그...어제 있잖아...”
“...으응?”
그렇게 그녀와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던 성준은 드디어 어제의 일에 대해서 물어보고자 했다. 지난밤에 고민 끝에 결심을 내린 만큼 꼭 오늘 안에 해결할 생각이었다.
“혹시 어디가 아파서 조퇴한 거야?”
“아...그냥...몸이 조금 안 좋아서...원래 내가 몸이 약한 편이거든...”
“그랬구나...처음에는 날 도와주기 위해서 무리수를 던지는 게 아닐까 엄청 오해했거든, 하하.”
“내가? 아아...어제 국어시간에 발표였나? 선생님이 지문 읽으라고 했던 거 말하는 거지?”
“맞아, 자다가 일어나서 정신이 없는 바람에 크게 혼날 뻔했지.”
“내가 딱 타이밍 좋게 시선을 끌었구나.”
“뭐, 의도한 것도 아니고, 아파서 그런 거지만 그래도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혼났을 거야. 물론, 그래도 다음부턴 절대 아프지 말고. 7교시 내내 혼자 앉아있어서 얼마나 심심했는데.”
“아아...으응...고마워. 걱정해줘서...”
다행히 어제 그녀의 행동은 의도된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몸이 안 좋은 상태였고, 기가 막힌 타이밍에 성준을 도왔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성준이 발기 때문에 고생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는 듯 했다. 그렇게 그의 걱정거리가 하나 덜어질 수 있었다.
“혹시 학교에 대해서 궁금한 점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봐. 그런 게 아니더라도 그냥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탁하고. 그러고 보니까 우리 서로 번호도 모르고 있던데.”
고민 하나를 덜 수 있었던 성준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그는 밝게 미소를 지으며 더욱 그녀에게 잘해줬다. 그녀 역시 성준의 과한 친절에도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고마움과 호감을 느꼈다. 전학 와서 친구가 한 명도 없었던 그녀는 더욱 성준에게 의지하게 되었고, 성준 역시 자신을 도와준 그녀를 잘 챙겨주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렇게 성준의 학교생활은 아무런 문제없이 시작될 수 있었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혹시라도 발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단 1분도 졸지 않고 버티는 바람에 조금 고생을 하긴 했지만, 덕분에 친구들에게 비밀을 들킬 걱정은 없었다. 거기에다가 헌터부대 관련해서 짝사랑하는 김소영과 대화도 나누었기에 그의 12시를 향하는 컨디션은 모든 수업이 마칠 때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좋아, 이대로면 학교생활도 문제없겠어. 잠만 자지 않는다면, 갑자기 발기될 일은 없으니까, 앞으로 최대한 밤에 일찍 자는 게 좋겠다. 점심시간에 축구하는 것도 좀 자제하고.’
앞으로도 쭈욱 이런 모습이라면 그의 학교생활에 큰 문제는 없어보였다. 짝궁하고의 관계도 좋았고, 짝사랑하고도 나쁘지 않았으며, 성적이야 어차피 헌터부대를 준비하고 있기에 상관없었다. 가장 큰 문제인 비밀 유지만 철저하다면, 이전처럼 학교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학교가 아닌 곳에서의 문제였다. 현재 그의 남은 고민은 친누나와 옆집에 사는 신지은에게로 향했다.
두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될 것인가. 이 부분은 박수아의 경우처럼 오늘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둘을 도와주고 싶었기에 그는 남은 시간동안 진지하게 고민해보고자 했다.
그렇게 성준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집을 향해 이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이 있는 5층에 도착한 그는 긴 복도 끝에 위치한 자신의 집, 501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그가 503호를 지나서 502호를 향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502호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어제와 비슷한 상황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었다.
“시애미 알기를 아주 개떡같이 알지? 너는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하니?”
“그게 아니라요, 어머님...그러니까 제 말은...”
“됐어!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당장 이혼부터 준비해야 될 거야! 어디서 시어머니가 얘기하는데 말꼬리를 잡고...애초에 너 같은 며느리를 들인 내 잘못이지, 에휴.”
“어머님...제발...”
“따라 나오지마!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문이 열리고 어제 복도에서 목소리를 들었던 신지은의 시어머니가 성준의 눈앞에 나타났다.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표독스러운 외모를 지닌 그녀는 오늘도 신지은을 향해서 독설을 내뿜고 있었다. 신지은은 거의 울먹이다시피 그녀에게 애원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집을 빠져나와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 구경났어요, 학생? 뭘 그렇게 사람을 빤히 쳐다봐?”
“아...죄송합니다...”
심지어 그녀는 지나가다가 마주친 성준을 향해서도 독설을 내뿜었다. 난데없이 왜 모르는 사람에게 욕을 먹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성준은 반사적으로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준의 사과마저 무시한 채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진짜 특이한 사람이네. 저런 사람이 시어머니라니...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녀는 전형적인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만 보던 시어머니의 모습과 똑같았다. 꼰대 중에서도 왕꼰대 스타일로, 무조건 자신의 의견만 강요하고, 기분이 나쁘면 주변 사람들까지 기분 나쁘게 만드는 최악이었다. 저런 사람이 시어머니라니, 신지은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을지 눈에 훤했다.
“누나...”
“...준이구나...학교...다녀오는 거야?”
성준이 사라진 시어머니에게서 고개를 돌려 신지은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상황을 아는 사람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민망했는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말을 길게 이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성준은 가볍게 그녀에게 인사를 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응, 그렇지. 난 급한 일이 있어서...”
“아, 그래.”
그녀의 입장에서는 지금 상황이 많이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아는 사람 앞에서 모욕을 당하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인 게 얼마나 창피한지는 성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과거에 짝사랑하는 이민정 앞에서 선생님에게 크게 혼나서 맞은 적이 있었기에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최대한 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이혼이라니...고작 애 때문에 이혼을 하라는 게 말이 되는 건가? 내가 어른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거겠지? 하지만 그래도...이런 상황이 발생할 거라고 누가 예상했겠어...’
집으로 들어간 성준의 머리는 또 다시 복잡해졌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이 문제를 조금 더 지켜보면서 결정하자고 생각했지만, 어제에 이어서 한 번 더 시어머니에게 혼나는 누나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만 갔다. 특히나 이혼이라는 단어에 결심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위잉
그렇게 신지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그의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친누나인 성하은이 보낸 문자였다.
‘우리 누나, 타이밍 한 번 기가 막히네. 요즘 들어서 운명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다니까.’
그녀가 보낸 문자는 경비실에 어제 주문한 과일이 도착했으니, 하나는 냉장고에 넣어두고, 하나는 신지은에게 가져다주라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신지은을 한 번 만나서 대화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던지라 그녀의 문자는 성준의 결정을 도와주는 결정적인 작용을 하게 되었다.
‘계속 고민한다고 해결 될 문제도 아니니까...그냥 오늘 말해버리자. 어차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라면 충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어려움에 빠진 그녀를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신지은은 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와 보낸 오랜 시간도 이유였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이 그녀로 하여금 높은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조심해야 되는 법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였기에 그는 한 번 믿어보고자 했다.
그렇게 결심을 내린 그는 샤워를 하면서 그녀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그리고 잠깐의 대기시간을 가진 뒤, 과일을 향해, 그리고 신지은을 향해 출발했다. 어떻게 보면 앞으로의 그의 운명이 달린 선택이었다.
누나가 주문한 과일은 9월에 먹기 딱 좋은 잘 익은 포도였다. 재빨리 경비실에서 포도를 가지고 올라온 그는 한 박스를 자신의 집에 보관해두고 나머지 한 박스를 들고 신지은이 살고 있는 옆집 문 앞으로 이동했다.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누구세요?”
문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성준의 심장은 쿵쾅거리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준이였구나. 무슨 일로...?”
조금 전만 하더라도 울상이었던 그녀의 표정은 많이 괜찮아져 있었다. 시어머니에게 당했던 일이 어제오늘이 아니었기에 그녀도 나름대로 자신의 처지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갑작스러운 성준의 방문에 살짝 놀라면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아무래도 조금 전의 일 때문인 듯 했다.
“포도...누나가 지은이 누나 가져다주라고 해서...”
“아아...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누나한테는 내가 직접 고맙다고 문자 보낼게. 가져다줘서 정말 고마워. 공부해야 되는데 괜히 나 때문에 방해된 게 아닌가 싶네.”
“에이, 고작 이 정도로 무슨.”
“나한테 줘. 내가 갖다놓을게.”
“아냐, 아냐, 배송은 확실히 해야지.”
포도 한 박스의 무게는 그리 무겁지 않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성준은 포도 박스를 받으려고 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이곳에 온 목적은 단순히 포도 박스를 전달해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포도가 잘 익었더라고. 아직 맛은 못 봤지만 분명 맛있을 거야.”
“그래? 그럼, 한 번 먹어볼까?”
성준이 포도를 식탁 위에 올려두며 포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녀가 바로 그의 미끼를 물고 말았다.
그녀는 포도 박스에서 포도 두 송이를 꺼내서 물에 씻어서 그릇에 담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식탁에 앉아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제 중요한 건, 그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