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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
‘오늘은 어떻게든 공부해야겠어. 계속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해서 언제까지 머리만 싸매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아파트에 도착한 성준은 학교에 있었던 일들을 애써 떠올리지 않으며, 집으로 올라갔다. 고시원에서 집에 돌아온 이후부터 그는 집에서 제대로 공부를 해본 적이 없었다. 공부만 하려고하면, 가지고 있는 엄청난 비밀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면서 그를 괴롭히곤 했다. 공부에 있어서는 생각보다 예민한 편이었던 그는 조금만 고민거리가 있어도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기에 지난 6일 동안의 공부를 모두 망치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오늘만큼은 크게 다짐을 했다. 비록 학교에서 자신의 실수 때문에 엄청난 일이 발생하고 말았지만, 남은 하루를 그거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는 짝궁에 대한 걱정은 잠시 내일로 미루고 잠시 휴업 중이었던 공부에 집중하고자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늘은 오늘도 그가 공부하기를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집이 있는 5층까지 계단을 이용해서 올라가던 중에 그의 코에 낯선 냄새가 느껴졌다. 그것은 무언가가 타고 있는 냄새였다.
‘뭐지? 담배라고 하기엔 냄새가 더 심한데...’
그는 냄새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냄새는 정확히 그의 집이 위치한 5층에서 나고 있었다. 혹시라도 불이 난 건가 싶어서 급하게 복도를 살피던 그는 곧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뭐야? 진짜로 불난 거야?’
탄 냄새가 나는 곳은 505호였다. 아파트 구조상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통해서 복도에 도착하면 우측으로는 1호에서 4호까지가 위치해있고, 좌측으로는 5호에서 6호가 위치한다. 성준이 복도 가운데에 위치해서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살짝 열려있는 505호에서 탄 냄새와 함께 연기가 조금씩 모락모락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성준은 긴급하다는 걸 생각할 틈도 없이 바로 몸이 반응했다. 빠르게 문을 열고 연기가 자욱한 집안으로 들어간 그는 가장 먼저 연기의 근원을 찾았다. 자욱한 연기를 만들어낸 물건은 그의 예상대로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냄비였다. 다행히 불이 나지는 않았기에 그는 재빨리 가스레인지를 끄고는 창문을 열어서 집안에 가득한 연기를 빼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쓰러져있는 한 명의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기요! 저기요!! 정신 차려 봐요!!”
“으으...으읏...”
성준이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를 곧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성준의 모습에 굉장히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이내 집안 상황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불은 껐으니까 걱정마세요.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제, 제가...왜 여기에...아아...냄비를 올려놓고는...기절했나 봐요...”
“냄비가 다 타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불이 나진 않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네...죄송해요...갑자기 왜...”
“갑자기 정신을 잃으셨나보네요. 병원부터 가셔야 될 것 같아요.”
성준은 차분하게 놀란 그녀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냄비가 전부 타버리긴 했지만, 불이 난 것도 아니고, 사람이 다친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기 역시도 창문과 문을 활짝 열어둔 덕에 금방 사라질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제가 요즘 정신이 없어서...”
“정신이 없다기보다는 정말로 기절하신 거라면, 병원에 가보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아...빈혈...때문인 것 같아요. 지금은 괜찮으니까...아무튼 감사합니다.”
그녀는 연신 성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성준은 자신 역시도 급박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고, 그제야 그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505호...그 여자였구나.’
이 아파트에서 10년 넘게 지냈던 성준이 그녀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었다. 3년 전에 이 아프트에 남편과 함께 자리 잡은 그녀는 이 동네에서도 꽤나 유명한 사람이었다. 2년 전, 사고로 남편을 잃은 것부터 시작해서, 그 후에 폐인처럼 지냈던 것까지, 성준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사연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들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소문이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소문은 최악이었다. 원래 소문이란 과장되기 마련 아니던가. 소문을 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성준 역시 그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곤 했었다. 특히나 오랜 시간을 집 밖으로 나오지 않는 그녀 때문에 무슨 사고라도 터져서 괜한 일에 휘말리는 게 아닐까 걱정까지 했던 적도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건 멀쩡하네. 집도 깔끔하고. 방금 전에 태워먹으려고 하긴 했지만, 의도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과거에, 그녀가 남편을 잃기 전에 가끔씩 복도에서 마주치곤 했는데, 그때의 모습하고 별다를 게 없었다. 이웃들의 말에 의하면 그녀가 완전 폐인이 되어서 마녀처럼 지낸다고 했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이 어딜 봐서 마녀인가. 성준은 새삼스럽게 찌라시는 역시나 믿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안 좋게 생각했던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채찍질을 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501호에 살고 있어요. 예전에...그러니까 2년 전에는 가끔씩 복도에서 마주치고, 인사도 했었는데...”
“아...전에 봤던 것 같아요. 학생...맞죠?”
“네, 지금도 교복입고 있으니까요.”
“아, 그러네요. 아무튼 오늘 일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웃끼리 이 정도는 돕고 살아야죠. 다친 곳이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그녀는 겉모습뿐만 아니라 성격도 나빠 보이지 않았다. 2년 전에 보였던 친절하고 다정하던 성격과 유사했다. 이 사람이 정말로 2년 가까이 폐인처럼 지내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이 정도로 연기가 났는데, 화재감지기는 아무런 작동도 안 하는가 보네요. 여기 아파트가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문제가 많거든요. 관리실에 따로 말해야 될 것 같아요.”
“아아...”
“차라리 제가 말할까요? 괜히 여자 혼자 산다고 무시할 수도 있거든요. 관리실 사람들 중에 꼰대들이 많아서...그나저나 정말 몸은 괜찮으신 거죠?”
“네, 정말로 괜찮아요.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화재감지기는...제가 말할게요. 이렇게까지 도와주신 것도 고마운데, 더 이상 폐 끼칠 수는 없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병원 한 번 가보세요. 아무리 빈혈이 심해도 이 정도로 기절하는 건 드문 일이잖아요. 연기를 많이 마셨을 수도 있는 일이고요.”
“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화재감지기 꼭 바꾸시고요. 다음에 또 봬요.”
그렇게 그녀와 간단한 대화를 하면서 성준은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는 성준에게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했고, 성준은 그런 그녀를 위로해주면서 대화를 마무리 했다. 문득 그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남의 집에 오래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간단히 샤워를 하고는 바로 공부할 준비에 들어갔다. 학교에서도 그렇고, 집으로 오는 중간에 일이 생기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지금부터 밤까지 공부를 하면 충분히 하루 목표치를 달성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언가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말았다. 그가 막 집중력을 높이면서 공부에 열중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벨을 눌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벨을 누른 사람은 505호에 사는 그녀였다. 그녀가 왜 성준의 집을 찾아온 것일까.
“아...무슨 일로...? 혹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아뇨, 그런 게 아니라...조금 전에 너무 고마워서...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감사하단 말을 제대로 못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보답의 의미로 간단히 요리를 했는데...물론, 고작 이걸로 고마움을 대신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거라도 드려야 될 것 같아서...”
그녀가 성준의 집까지 찾아온 까닭은 조금 전에 성준이 자신을 구해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보답을 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 성준은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뭘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유난일까 싶었다. 특히나 공부를 방해했다는 점에서 살짝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지금까지 항상 집에서만 갇혀 살던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큰 용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 그는 짜증보다는 밝게 웃으면서 그녀를 맞이해주었다.
“이런 걸 바라고 도운 건 아닌데...아무튼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그런데 음식은...?”
다만, 이상한 점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어야 될 음식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 깜빡한 것일까. 성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더욱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그...음식한 게 조금 많아서...들고 올 수가 없었어요. 괜찮으시면...저희 집에서 들러서 가져가실 수 없을까요?”
그녀의 대답은 다소 황당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만들었다면서, 자기네 집에서 가져가라고 말을 한단 말인가. 성준의 그녀의 대답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집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알겠다고 말하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집에 도착하는 순간, 그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그녀가 만든 요리들의 모습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이걸...다 만드셨다고요?”
“네...제가 가장 아끼는 냄비가 타버리는 바람에 조금 고생하긴 했지만, 맛은 괜찮아요.”
“불까지 날 뻔했는데, 오늘은 무리하지 마시지...아무튼 정말 대단하시네요.”
성준이 그녀의 집에서 나오고 집에 도착해서 샤워를 마친 뒤, 공부하기까지 약 한 시간 반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반이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요리를 만들기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요리 실력에 감탄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렇게까지 많이는 필요가 없는데...저도 지금은 혼자 살고 있거든요. 동생은 기숙사 생활하고 있고, 누나는 남자친구랑 동거하고, 아버지는 지방으로 출장 가셔서 사실상 혼자 지내고 있어요. 그래서 조금만 가져가도 될 것 같아요.”
“아...냉장고에 두었다가 드셔도 되는데...”
“그러면 딱 여기까지만 가져갈게요. 저희 집 냉장고가 또 작은 편이라...하하.”
하지만 이 정도 양은 혼자 먹기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그는 그녀와 타협을 해서 적당한 양을 챙겼다. 그녀는 이 마저도 내가 들고 가기 편하게 따로 포장을 해주었다. 보면 볼수록 그녀의 성격이 결코 마녀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그...이건 뜨거울 때 바로 드셔야 되는데...혹시 저녁 드셨어요?”
“아뇨, 아직...”
“그럼...여기서 드시고 가셔도 되는데...”
“...네? 여기서요?”
“아...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이건 꼭 뜨거울 때 드셔야 해서...”
그렇게 그녀가 싸준 요리들을 챙긴 성준은 다시 자신의 집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녀가 성준을 붙잡는 것이 아니던가. 그녀는 성준에게 이곳에서 저녁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흐음...성의가 있는데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요. 알았어요, 이건 먹고 갈게요.”
“다행이다. 잠시만요. 식었을지도 모르니까...조금만 더 데워드릴 게요.”
딱히 배가 고프지도 않았고, 아직 저녁 생각이 없었던 그였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의 집에서 밥을 먹는 게 편한 것도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그녀가 부탁을 하는데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 대해서 조금 더 궁금했기에 그는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