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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준은 하던 공부도 멈춘 채, 이곳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펼쳐진 자신의 상황에 조금은 황당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해준 음식의 맛이 그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다. 그녀의 요리솜씨는 단순히 많은 양을 순식간에 만드는 것을 넘어서 맛까지 예술이었다. 항상 집에서 혼자 지내면서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했던 그의 입장에서는 꿀맛이 아닐 수가 없었다.
“진짜 맛있어요! 항상 집에서 편의점 음식이나 배달 음식 아니면 누나가 가져다준 반찬만 먹곤 했었는데...역시 방금 만든 집밥이 최고네요.”
“헤, 다행이네요. 맛있다니 저도 기분 좋네요.”
밥을 먹으면서 좋아하는 성준의 모습에 그녀 역시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마치 아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성준이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성준은 그녀의 모습에 살짝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녀의 미소가 워낙 편안함을 주었기에 기분 좋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으음...실례지만 제가 뭐라고 불러야 될까요?”
“네? 아...그...아줌...마? 제가 나이가 좀 많아서...”
그리고 문득 그녀를 뭐라고 불러 될지 궁금해졌다. 성준이 알고 있기로는 그녀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사람에게 계속 이런 식으로 대할 수 없었던 그는 서로에 대한 호칭부터 정리하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줌마는 좀 그렇죠. 외모로만 따지면 저랑 거의 비슷한 나이 때로 보이시는데요. 편하게 누나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그녀의 외모는 상당한 편이었다. 그녀를 구했을 때만 하더라도 크게 느끼지는 못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녀가 매우 뛰어난 외모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얼굴부터 몸매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동안 외모도 좋았지만, 특히나 가슴이 유독 눈에 띄었다. 얼핏 봐도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사람에게 아줌마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그러면 저야 좋죠. 고마워요.”
“저는 편하게 불러주세요. 제 이름은 성준이거든요. 말도 편하게 하셔도 좋고요.”
“네...저는 하셔윤이라고 해요.”
“하서윤...이름 정말 예쁘시네요. 그나저나 편하게 하시라니까요.”
“아...으응, 그래.”
그렇게 대략적으로 호칭을 정리했다. 성준이 누나라고 부르자 그녀가 조금은 쑥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새삼스럽게 그는 그녀가 참 사랑스럽게 생겼다고 생각되었다. 이런 사람을 마녀라고 표현하다니, 동네 사람들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로 잘 먹었어요. 설거지는 제가 할게요.”
“아, 아니야. 내가 고마워서 대접한 건데, 당연히 내가 해야지.”
“에이, 아니에요. 이 정도는 제가 해야죠. 누나 몸도 안 좋은데, 이만큼 요리하느라 엄청 힘들었을 텐데, 좀 쉬고 계세요.”
“아...내가 해야 되는데...”
“이 누나가 은근히 고집이 강하시네. 그래도 오늘은 안 됩니다.”
밥을 다 먹고 성준이 설거지를 했다. 이렇게 맛있게 좋은 음식을 먹었는데, 설거지까지 그녀가 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던 성준은 억지로 그녀를 소파에 앉힌 뒤, 자신이 뒷정리를 시작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미안한 표정으로 성준을 바라보았지만, 성준 역시 이런 쪽으로는 한 고집했다.
“후우, 끝났네요. 이제 집에 가볼게요. 오늘 저녁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아...차라도 한 잔 먹고 갈래?”
“아뇨 아뇨, 정말 괜찮아요. 이제 집에 가서 공부해야 되거든요.”
“...공부? 아아...학생이라고 했지. 수능 공부하는 거야?”
“아뇨, 수능 공부나 내신은 아니고, 제가 실은 헌터부대 준비하고 있거든요. 차는 다음에 먹을게요.”
설거지까지 끝낸 성준은 이제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아직 해야 될 공부가 남아있었기에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집을 나서고자 했다.
“헌터부대? 우와, 아직 18살인데, 벌써부터 준비하는구나.”
“네, 어쩌다 보니까...공부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내 남편도 헌터부대 출신이었는데...”
“정말요? 신기하네요. 왜 그동안 몰랐지.”
“나나 남편이나 워낙 집에서만 지냈으니까.”
그런데 집을 나서는 중에 그는 그녀에게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은 성준이 갈망하는 헌터부대 출신이었다. 그것도 연구소 직원이나 행정 업무를 하는 일반 직원이 아닌, 군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랬군요. 신긴하네요. 그런 줄 알았으면 진작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아니야, 어차피 지금은 없으니까...”
“아...죄송해요...”
“아냐, 아냐, 그런 뜻으로 말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은 걸. 벌써 2년이나 지났으니까...흐응...헌터부대와 관련해서 내가 특별히 얘기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남편이 가지고 있던 물건들이 있는데 다음에 보여줄까?”
“정말요? 그러면 저야 좋죠.”
“헤, 그래면 내일도 저녁에 우리 집에 올래? 사실, 집에 혼자 있다 보니까 조금 심심하기도 해서...가끔씩...저녁 같이 먹고 싶은데...괜찮을까?”
더군다나 그녀는 남편이 지니고 있던 헌터부대와 관련된 물건들을 성준에게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여기에다가 추가로 오늘처럼 밥까지 주겠다고 하니, 성준의 입장에서는 최상이었다. 조금 부담을 느끼기도 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어보였다.
“네? 아...저야 당연히 괜찮죠. 다만, 너무 민폐가 아닌가 싶어서...”
“내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왜 민폐야. 앞으로 자주 놀러와. 내가 언제든지 맛있는 요리해줄게.”
“알겠어요. 아, 근데 내일은 힘들 것 같아요. 내일은 일이 있어서. 으음...대신, 모레 저녁에 놀러올게요.”
“내일은 안 되는구나...그래, 어쩔 수 없지. 대신, 모레 저녁에는 오늘보다 더 맛있는 요리 해줄게.”
“고마워요. 그럼, 모레 다시 만나요.”
“으응, 오늘 정말 고마웠어. 잘 가.”
그렇게 그는 그녀와 다시 모레 약속을 잡았다. 뭔가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서 밥을 먹는다는 게 민폐가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그녀가 상당히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성준은 그녀가 싸준 음식들을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 덕분에 오늘 공부량을 채우기를 힘들 것으로 보였지만,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상이었다. 뭔가 새로운 친구가 생긴 것 같은 생각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
*
*
-7일
-다음날
기분 좋았던 지난날 밤과 달리 오늘 아침, 성준의 기분은 상당히 꿀꿀해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그의 짝궁, 박수아 때문이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공부와 함께 갑작스럽게 505호에 사는 하서윤에게 일이 터져서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오늘 아침이 되어서야 박수아와 있었던 일이 떠오른 그였다.
‘하...어제 오늘 사이에 다른 사람한테 말한 건 아니겠지? 인터넷에 글이라도 올렸다가는 바로 생체실험 행인데...제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기를...’
박수아가 가장 걱정이 되는 것은 그녀가 혹시라도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다녔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성준으로부터 알게 된 비밀은 지금 상황에서는 엄청난 이슈였다. 한 명 한 명에게 퍼지기 시작한다면, 끝도 없이 퍼져나갈 것이고 결국, 그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 부분이 걱정이었던 그는 어떻게든 오늘 안에 그녀와 단판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오늘따라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 성준보다 먼저 학교에 도착해 있었던 그녀는 수업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아픈 표정으로 책상에 엎드려있었다. 그 덕분에 그는 열심히 세웠던 계획을 전혀 실현시키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게 되었다.
‘미치겠네. 수업시간에는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더니, 쉬는 시간만 되면 귀신같이 아픈 척하면서 엎드려 있잖아. 하...오늘은 어떻게든 말해야 되는데...’
성준의 입장에서는 당연하게도 그녀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업시간에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멀쩡했으며, 틈을 봐서 선생님 몰래 그녀에게 말을 걸어도 모르는 척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는 식으로 넘기고는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성준은 다른 방도를 떠올리고자 했다.
“수아야, 박수아. 담임선생님이 너 찾으시던데?”
“...으응?”
“지금 담임이 너 찾고 있다고.”
“아아...으응.”
“교무실 말고 매점으로 가봐.”
“...매점?”
“거기서 다른 선생님들이랑 뭐 드시고 계시거든. 할 말 있으신 것 같던데? 그나저나 너 어디 아파?”
“아, 아니...괜찮아. 알았어, 가볼게.”
성준이 이용한 방법은 담임 선생님을 팔아먹는 것과 함께 같은 반 내에 있는 다른 친구들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는 점심시간에 그녀의 옆에서 대놓고 축구를 하겠다고 큰 소리로 얘기를 해서 방심하게 마든 뒤, 친구에게 부탁을 해서 그녀를 매점 앞으로 불러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담임이 자기를 매점 앞으로 부른다는 사실에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전학생의 신분이었고, 성준도 옆에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매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준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되었다.
“아앗...왜, 왜 이러는 건데?”
“잠깐 할 얘기가 있어서...제발...부탁할게...”
그녀는 매점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준을 보자마자 자신이 속았음을 눈치 채고는 바로 뒤돌아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성준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고, 그는 그녀를 아무도 없는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제 3자가 보면, 굉장히 놀랄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그들의 모습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이거 놔! 아프단 말이야!”
“아아...미안...”
그녀는 갑작스러운 성준의 행동에 크게 당황하고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괜스레 미안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반드시 얘기해야 된다고 생각했기에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이렇게까지 해서 미안해. 하지만 오늘 꼭 얘기해야 될 것 같아서...”
“너무해...나빠...”
“미안, 미안...많이 아팠지?”
“됐어...할 얘기 있으면 빨리 해...”
“그래...그러니까...어제 일 말이야...그거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며서 불렀어.”
“......”
어제 일이라는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상당히 흔들렸다. 그녀도 이미 성준이 무슨 얘기를 꺼낼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 크게 긴장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피할 수는 없었기에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이야기를 들었다.
“너도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만...맞아, 네가 생각하는 게 맞아.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나는 발기가 가능해.”
성준은 조금 망설이기도 했지만, 자신의 입으로 솔직하게 비밀을 털어놓았다. 어차피 그녀에게 들킨 상황에서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할 이유는 없었다. 최대한 진실을 털어놓으며, 그녀에게 부탁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 그, 그래서?”
성준이 사실을 털어놓자, 그녀는 더욱 크게 당황했다. 얼굴까지 붉게 물들이면서 그녀는 어찌할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이 귀엽게도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에 성준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너도 알다시피 요즘 세계가 이 문제 때문에 난리잖아. 아직까지도 별 다른 발표도 없고, 원인도 파악 못했고, 해결될 기미도 보이지 않아. 이런 상황에서 나 같은 사람이 등장하면...어떻게 될 것 같아? 물론, 나를 통해서 원인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나는...아마도 생체실험 끝에 온갖 고통 속에서 죽을 수도 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부탁 하나만 할게. 벌써 다른 사람에게 얘기 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최대한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그가 진심어린 표정으로 그녀에게 부탁했다. 그녀는 성준의 진지한 모습에 더욱 얼굴이 빨개지면서 입술을 깨물다가, 이내 입을 열고 말했다.
“저, 정말로...그게 가능한 거야?”
“응, 어제 봤듯이.”
“아...왜 너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그거 때문에 요즘 고생이거든.”
“그랬구나. 혹시 저번에 국어 시간에도...”
“응, 맞아. 그때도 그거 때문에 그랬었지. 그래서 정말로 고마웠던 거고.”
“그러니까...이걸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할게. 대신,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말해줘. 힘들겠지만, 내 능력이 되는대로 들어줄게.”
“아아...우선, 지금까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마. 앞으로도... 말할 일은 크게 없을 거야. 최대한 노력해볼게.”
다행히 그녀는 아직까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했다. 성준은 그제야 긴장을 풀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하아...다행이다. 나는 어제부터 엄청 걱정했었거든. 정말로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도 괜찮아. 내가 가진 돈은 없지만, 몸을 때우는 거는 자신 있거든.”
“지금은...괜찮은데...”
“그래, 언제든지 얘기해줘. 정말 고마워. 진심으로 고마워.”
성준은 연신 그녀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했다. 앞으로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녀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고민 하나가 떨어져나가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