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시키기 -->
이후에 성준의 학교생활은 180도 달라졌다. 근심걱정이 사라진 나머지 수업시간에 더욱 집중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으며, 쉬는 시간에도 박수아와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가 그녀를 더욱 잘 챙겨주는 것은 당연했으며, 그녀 역시도 처음에는 어색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성준과 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나중에 꼭 생각해서 말해줘. 뭐든지 다 들어줄게.”
“에이, 굳이 그럴 필요 없다니까. 지금도 나 엄청 챙겨주면서.”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
“치이, 나를 못 믿는 거야?”
“그럴 리가. 그냥 너무 고마워서. 고마운 사람한테는 꼭 보답을 하는 게 내 신념이라. 그럼, 이렇게 하자. 성준 이용권을 가졌다고 생각해줘.”
“성준 이용권?”
“응, 성준 이용권. 돈 빼고는 뭐든지 다 해줄게. 안마를 시켜도 좋고, 간단한 심부름도 좋아. 하루에 하나씩 사용해줘.”
“하루에 하나는 너무 그렇고, 일주일에 하나씩 하자.”
“으음, 좋아. 그렇게 하자.”
“헤, 잘 써먹어야겠다.”
“마음껏 부려 먹어주세요.”
그녀의 입장에서는 성준의 제안이 전혀 나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성준은 그녀가 이 학교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게 많은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와 조금 더 친해질 수 있다면, 이런 것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시킬 일 없고?”
“오늘은 괜찮아. 지금은 내 친구가 되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나 사실, 친구가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거든. 그래서 예전부터 속으로 너한테 엄청 고마워하고 있었어.”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더 고마운데? 아무튼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말해줘. 바로 달려갈 테니까.”
“아...으응,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주말 잘 보내고. 아, 주말에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불러줘.”
학교 수업이 끝나고 성준이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어제는 굉장히 우울한 표정으로 학교를 나왔다면, 오늘 그는 어제와 달리 웃으면서 학교를 나올 수 있었다. 어제 오늘 가장 큰 고민이었던 그녀의 입을 막았으니, 이제 한 시름을 덜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것은 옆집에 사는 신지은이었다. 지난번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늘쯤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아직까진 연락이 없었지만, 성준은 오늘만큼은 공부보다는 그녀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이제 이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의 걱정은 끝이었기에 여기에 최대한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위잉
그리고 때마침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재빨리 폰을 열어서 확인하자,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문자를 확인한 성준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집이 있는, 그리고 그녀의 집이 있는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
*
*
-신지은
‘하...이게 맞는 걸까?’
소파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던 그녀가 아까부터 자꾸만 크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에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 후회하다가 이내 체념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만큼 그 결정이 그녀의 앞으로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다 내 탓이야...이런 일이 생길 줄 몰랐다고 해도, 애초에 내가 심하게 거부하지만 않았더라도...’
그녀는 자신이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를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일에 대한 욕심이 자신을 이곳까지 몰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생각과 달리,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녀는 크게 잘못한 게 없었다. 그녀는 이제 결혼한 지 고작 2년차 신혼부부였다. 요즘 세상에 2년 만에 아기를 가지는 부부는 그리 많지 않다. 속도위반이 아니라면 대부분 조금 더 경제적인 안정을 찾은 후에 2세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녀 역시도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었고, 잠시 임신 계획을 미뤘을 뿐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것도 그녀는 불과 이번 일이 발생하기 2일 전에 일을 모두 마치고 남편과 시어머니가 바라는 대로 2세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었다. 타이밍이 엇갈려도 이렇게 어긋날 줄은 그녀뿐만 아니라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더욱 후회스러웠다. 조금만 더 빨리 일이 끝났으면, 조금만 더 기이한 현상이 늦춰졌으면 어땠을까 매일 매일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었다. 과거는 돌아올 수 없었기에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시댁으로부터 멸시와 핍박을 받게 된 것이었다.
‘2주가 지나고 나서는 더욱 난리시겠지. 만약 임신이 아니라고 뜨면...어떤 취급을 받을까...지금도 너무 힘든데...그때는...하아...’
그녀의 시댁, 특히나 시어머니는 전형적인 아침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과 비슷했다. 시월드라는 표현이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며느리에게 막 대했고,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아들만을 중시했다. 그 덕에 안 그래도 힘든 시기를 보냈는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이후로는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다.
매일 그녀를 찾아와서 한바탕 난리를 피우는 것은 기본이었고, 시어머니는 더 이상 그녀를 며느리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워낙 불같은 성격에 보수적인 분이시라, 아무리 그녀가 좋게 이야기를 해봐도 전혀 소용이 없었다. 그녀 역시나 이번 일로 너무나도 마음 아프고 힘들어 죽겠는데, 시어머니까지 이러니 속이 얼마나 망가지겠는가.
여기에 또 그녀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어떤가. 애초에 그녀의 남편은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변변찮은 학벌에 직업, 거기에다가 집안도 그리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며, 외모도 평범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여자 문제가 전혀 없었으며,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사랑해주는 사람을 어떤 여자가 마다하겠는가. 비록 능력은 조금 부족해도 어차피 자신이 능력이 있었기에 그녀는 그를 선택했고, 이번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결코 후회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 이후부터는 그마저도 가끔씩 후회가 되곤 했다. 처음에는 그녀를 위로해주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오로지 자신의 어머니, 그녀의 시어머니 편에 서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그녀를 나무라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억장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 사람까지 그럴 줄이야...내 인생...이대로 끝나는 걸까...’
하루하루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피는 말라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더 이상 생기를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녀 자신도 매일매일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이런데, 주변 사람들은 어떻겠나. 원래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주변 사람마저도 괴롭게 만드는 법이다. 그녀는 갈수록 어두워지고 예민해져 가는 자신의 모습에 지칠 때로 지쳐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맥과 가지고 있던 돈을 최대한 활용해서 지금 같은 시기에도 임신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내고자 노력했다. 인터넷 카페를 뒤지고 뒤져서 냉동정자에 대해서 알아보기도 했고, 심지어는 히어로 협회 쪽 사람을 알아내서 지금 상황에 대한 정보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전 세게적으로 발생한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그녀는 좌절감에 빠지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좋은 건 다음 주에 테스트기 결과가 양성이 뜨는 건데...그것만 기다릴 수는 없어. 다른 방법이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잖아. 잘 한 거야...분명히 잘 결정한 거야...’
그런데 그러던 그녀에게 한 가지 엄청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놀랍게도 임신이 가능한 사람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스스로 찾아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이면서 괘씸하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에 믿을 수 있었다. 아직 정자의 운동성 여부는 조금 더 알아봐야 했지만, 적어도 한 가지 희망이 생긴 셈이었다.
‘그 애를 믿어도 되겠지?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착한 애니까...그치만...이래도 되는 걸까...’
다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아직 그 사람의 능력이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혹시라도 그의 정자를 받아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정말로 끝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물론,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런 것 따위는 감수할 수 있었기에 상관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바로 도의적인 부분이었다. 그녀는 결혼한 사람이 있는 유부녀였다. 그리고 그녀를 임신시켜주겠다고 말한 사람은 그녀의 절친의 남동생이었으며, 심지어 미성년자였다.
유부녀와 미성년자...만약 이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켰다가는 그녀는 바로 사회에서 매장당할 것이 분명했다. 굳이 법적 처벌이 아니더라도 이혼당하는 것은 당연했고, 소중한 친구도 잃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의 결정이 옳은 것인지 아직도 고민이 되었다.
띵동 띵동
그렇게 그녀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져있던 중에 드디어 그 사람이 그녀의 집에 도착했다. 이제 드디어 그녀에게 운명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커피를 단숨에 들이킨 그녀는 크게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현관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떨리는 손에 애써 힘을 꽉 주며 문을 열었다.
*
*
*
-성준
“아...누나...”
“왔어? 들어와.”
신지은의 연락을 받고 성준이 찾아간 곳은 당연히 그의 옆집, 신지은이 살고 있는 502호였다. 그녀는 성준이 벨을 누른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문을 열었는데, 표정이 그리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성준은 혹시라도 그녀의 마음이 바뀐 것일까 걱정하며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밥은 먹었어?”
“점심은 학교에서 먹었지. 저녁은 아직 생각 없고.”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공기가 흘렀다. 성준 역시나 최대한 긴장하지 않으며 여유롭게 생각하고자 했지만,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시어머니는...오늘은 안오셨고?”
“오늘도 오셨지. 아침에 한 바탕 하고 가셨어. 하루에 한 번씩은 꼬박꼬박 찾아오시거든. 이제 더 이상 찾아올 사람은 없으니까 안심해도 괜찮아.”
“아...으응.”
“차라도 한 잔 줄까?”
“아니...그...혹시 찬물이나 주스 있으면 괜찮을까?”
“오렌지 주스 있는데, 잠시만.”
이런 분위기에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될까. 어차피 두 사람이 만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다른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둘이었지만, 자꾸만 그 얘기가 입에서만 맴돌뿐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기...”
“응, 고마워...그...생각은 해봤어?”
이대로 가다간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낼 것 같았던 성준은 먼저 선수를 치고자 했다. 그저께도 자신이 먼저 용기를 내서 그녀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용기를 내고자 했다. 그녀는 성준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듯 눈동자가 흔들렸지만, 이내 침착함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으응, 그저께 준이, 네가 그 얘기 한 뒤로 계속해서 고민해봤어. 처음에는 최대한 다른 방법을 이용해볼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다른 방법은 없더라. 그래서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어. 정말 미안한데...하아...네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그녀의 선택은 예스였다. 임신이 간절하게 필요했던 그녀는 결국 성준의 도움의 손길을 붙잡았다. 그녀가 자신을 선택해주길 기다렸던 성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두 사람의 선택은 내려졌고, 그것을 실행에만 옮기면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