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시키기 -->
*
*
*
-8일
-다음날
성준이 개학을 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주말이 되었다. 그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조금은 찝찝함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한 채로 오늘만큼은 하루 종일 공부에 집중했다. 처음으로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이후로 신지은과의 사이가 꽤나 어색해졌다는 사실 때문에 자꾸만 집중력이 흐트러졌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목표했던 공부량을 채워나갔다.
그렇게 그의 공부는 아침부터 밤까지 쭈욱 이어졌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어서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은 약속이 있었기에 미리 계획했던 대로 공부를 마치고 나갈 준비를 하고자 했다.
‘오늘은 아무 연락이 없네. 기다리는 수밖에.’
공부를 마친 그가 폰을 열어서 혹시나 문자가 왔는지 확인했다. 그가 기다리는 연락은 역시나 신지은의 연락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서는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한 번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기분이 나빠서? 내가 도대체 뭘 잘못한 거지? 하...누나를 도와주고나면 마음이 편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구나.’
성교육 시간에 집중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한 번도 그 시간에 졸았던 적이 없었다. 때문에 임신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 잘 알고 있었다. 한 번의 사정으로 임신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대부분 한 번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기본 상식이었다.
그렇기에 애초에 계획도 그녀와 적어도 3번 이상의 관계를 가지는 것이었다. 이 부분은 그녀 역시도 동의를 했다. 그런데 어째서 왜 연락이 없는 것일까. 그는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주말이라서 그렇겠지? 어쩌면 남편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남편이 집에 있으면 아무래도 힘드니까...그래도 언제 하자고 연락이라도 주지...에휴, 모르겠다. 일단, 기다리는 수밖에.’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가 원한다고 해서 다짜고짜 그녀를 찾아가서 섹스를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녀에게서 연락이 올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아쉬움을 접은 채 마저 외출 준비를 했다.
‘가볍게 입고 나가도 상관없겠지? 어차피 바로 옆이니까. 오늘은 밥 먹으면서 헌터부대에 대해서 조금 더 물어봐야겠어.’
성준이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그의 약속은 다름 아닌, 505호 여자, 하서윤과의 저녁 약속이었다. 그는 옆집에 놀러가는 마음으로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밖을 나섰다.
그녀의 집까지는 불과 몇 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집에서 나온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서 그녀의 집 앞에 도착한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미리 약속을 잡고, 오늘 아침에 연락까지 했지만, 그래도 이제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기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철컥
“왔구나. 기다리고 있었어. 많이 배고프지?”
문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굉장히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성준을 맞이해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안녕하세요? 요리하고 계셨던 거예요?”
“으응, 낮에 잠깐 낮잠 잔다는 게 그만, 3시간을 넘게 자버린 거 있지? 그래서 부랴부랴 나가서 재료사와서 지금까지 요리하고 있었어.”
“너무너무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저는 정말 간단히만 먹어도 괜찮거든요.”
“에이, 생명의 은인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얼른 들어와.”
성준이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주방으로 이동하자, 성준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음식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음식의 양도 양이었지만, 하나 같이 만들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그가 또 다시 감탄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혹시 누나 과거에 요리 공부하셨어요? 이 정도면 전업주부 실력이 아닌데...”
“전에 아주 잠깐 요리학원을 다니긴 했었어. 평소에 요리가 취미이기도 하고.”
“그래도 이건 너무...시간도 오래 걸리고 손도 많이 가는 요리들이잖아요. 안 그래도 빈혈 때문에 큰일 나셨던 분이...”
다만, 성준은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그녀가 너무 무리한 게 아닐까 싶었다. 안 그래도 빈혈 때문에 기절까지 했던 그녀였는데, 몸이 좋아질 때까지는 안정을 취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그냥...준이한테 맛있는 요리 해주고 싶기도 했고, 집에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롭거든. 외로우면 자꾸만 오만가지 생각이 드니까...차라리 그럴 바에는 힘들어도 바쁜 게 좋다고 생각했어. 식겠다, 얼른 먹어.”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뜻밖에 말이 나왔다. 그녀는 외로움을 견디기 위해서 요리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그 말은 성준의 정확히 가슴을 울리고 말았다.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이렇게까지 무리를...사랑하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만큼 슬픈 건 없지. 그녀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을 놓아주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야.’
성준도 그녀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몇 년 동안 마음속에 공허함을 안고 살아갔다. 아무리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기쁜 일들을 겪어도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최대한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는 거만이 유일하게 공허함을 잊는 길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맛있어요! 누나가 해준 요리랑 저랑 정말 잘 맞는 것 같아요!”
“헤, 다행이다. 천천히 먹어. 얼마든지 있으니까.”
하지만 성준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녀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해준 요리를 맛있게 먹는 것만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달래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위로란 때론,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그렇게 저녁 식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고 간단히 차와 함께 후식을 먹으면서 성준은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헌터부대에 대해서 물었다. 처음에는 괜히 남편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도 됐지만, 오히려 신나서 설명해주는 그녀였다.
“이건 전에 남편이 입었던 군복이고, 그리고 이건 인천에서 큰 작전이 있었는데, 그때 공로로 받은 표창장. 처음에는 엄청 어설퍼서 위에서 많이 욕도 얻어먹고 혼나기도 했는데, 갈수록 인정받았거든. 아, 남편이 전에 공부했던 책들도 있는데, 한 번 볼래? 옛날 거긴 해도 지금이랑 크게 다를 건 없을 거야. 그때 정리했던 노트들도 있었는데, 잠깐만.”
헌터부대와 함께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소개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성준은 그녀가 남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문득 그녀의 모습에서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우와, 노트 필기를 엄청 잘하셨네요. 이것만 보고 공부해도 될 정도예요.”
“그래? 그럼, 이거 가져가도 괜찮아.”
“네? 하지만...누나한테는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나는 어차피 필요도 없는 걸. 거기 적혀있는 내용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몰라. 그 사람도 자신의 물건이 더 필요한 사람한테 가는 걸 바라고 있을 거야. 그게 앞으로 후배가 될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겠지.”
“아...감사합니다. 꼭 합격해서 다시 돌려드릴게요.”
“후훗, 더 필요한 거 있으면 얼마든지 가져가도 돼.”
성준이 느끼는 감정과 달리 그녀는 계속해서 업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종일관 성준에게 미소를 잃지 않았고, 남편의 물건들을 건네주기도 했다. 어쩌면 이러한 행동을 통해서 남편을 하나씩 잊어가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건 뭐예요? 아기 옷이랑 신발 같은데...아...죄, 죄송해요...”
그렇게 그녀와 함께 물건을 살피던 중에 성준의 눈에 한 가지 특이한 것들이 보였다. 그것은 굉장히 작은 사이즈의 아기 신발과 옷이었다. 이게 왜 이곳에 있지, 하는 생각에 그는 무심코 그녀에게 물어봤지만, 이내 스스로 그 이유를 알아차리고는 바로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성준의 추측이 맞다면, 아마도 그녀는 유산을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아아...예전에 산 물건들인데, 버리기 좀 그래서. 엄청 예쁘지? 남편도 그렇고, 나도 엄청 좋아했었거든. 이거 말고 더 예쁜 거 있는데...짜잔! 이건 최근에 샀어. 어때? 예쁘지?”
성준은 자신이 큰 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최대한 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더니, 갑자기 최근에 구입한 아기 신발과 옷들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 덕에 성준의 머리는 순식간에 복잡해지고 말았다. 혹시 그녀는 유산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아기 용품들을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임신 상태인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2년 전에 떠난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새로운 남자친구가 생긴 것일까.
성준이 복잡한 표정으로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그녀는 마치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아기 용품을 내려놓고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후훗, 그런 거 아니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마.”
“아...죄송해요...”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네. 너도 알 거야. 내가 2년 가까이 집에만 갇혀서 폐인처럼 지냈다는 거.”
“그동안 많이 힘들었으니까요. 누구나 누나 상황이었으면 그랬을 거예요.”
“솔직히 죽고 싶을 때도 많았어. 하지만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니더라고. 너무 무서워서 제대로 시도조차 못했지.”
그녀의 과거에 대해서는 성준도 들은 게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은 어디까지나 과장되거나 자기들 식으로 각색되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던 내용들을 모두 비우고 최대한 집중하며 그녀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면서 살아가는데, 최근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 말이야. 그때부터 결심했어. 이제 내 삶의 목표는 딱 하나야. 내 아이를 가지는 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라고 생각해. 그렇게 결심을 내리고 나니까, 조금씩 용기가 생기더라고.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서는 계속 폐인처럼 지낼 수는 없잖아. 어떻게든 힘을 내서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 중이지.”
“그랬군요. 아이...하지만...”
“맞아.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길 줄 누가 알았겠어. 혼자서도 잘 키울 자신 있었는데...그래도 아직 포기하기는 이르다고 생각해. 이 문제가 빨리 해결 될 수도 있는 거고, 알아보니까 정자은행에서 냉동정자를 구하는 방법도 있더라고.”
하지만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은 성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남편이 죽은 이후에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하필이면 아이일 줄은 몰랐다. 임신 능력이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곤란한 입장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그녀는 아직 그가 그런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만약에...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이번 사태가 더욱 악화되면서 임신이 안 된다고 하면...”
“그러면 내 인생도 끝나는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분명히 상황이 좋아질 거고,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믿을 거야.”
“아아...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갑자기 내가 너무 진지한 얘기했지? 미안해. 그냥...이유는 모르겠지만, 준이 너한테는 해주고 싶었어.”
“아니에요. 오히려 고마워요. 덕분에 누나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사랑한다는 사람을 잃는다는 거...엄청 슬픈 일이잖아요. 그걸 극복해내고 일어서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역시 준이는 착하구나.”
그렇게 그녀와의 대화가 끝이 났다. 성준은 오늘 하루 동안 그녀에 대해서 더욱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마음 한 편은 찝찝함이 가득했다. 신지은도 모자라서 그녀까지 임신에 대한 고민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신지은과 달리 그녀는 고작 두 번 만난 사이라 바로 도움을 줄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이 부분으로 상당히 마음의 갈등을 겪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