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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다음날
일요일인 오늘도 역시 성준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렸다. 어제 505호 하서윤에게 빌린 노트까지 있었기에 그의 집중력은 활활 불타올랐고, 그동안 못했던 공부까지 한 번에 몰아서 끝낼 수 있었다.
이런 그의 집중력이 사그라지게 된 것은 저녁에 그의 누나가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그녀는 오늘 하루는 집에서 잘 예정이라면서 이것저것 반찬을 싸들고 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누나라면 반갑지 않을 수 없었기에 성준은 하던 공부를 끝내고 누나를 맞이했다.
“으응? 이게 다 뭐야? 준이, 네가 만들었을 리는 절대 없고...반찬가게에서 산거야?”
집에 들어온 그녀는 가장 먼저 들고 온 반찬부터 정리하기 위해 냉장고로 향했다. 그런데 냉장고 안에는 이미 여러 가지 반찬들로 가득한 상태였다. 모두 505호에서 가지고 온 것들이었는데, 이러한 사연을 전혀 몰랐던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성준을 바라보았다.
“아아, 그거...”
“성준...너 여자 생긴 거 아니야? 누나 몰래 우렁 각시라도 들였니?”
“그럴 리가...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럼, 이거 다 어디서 구한 건데? 반찬 가게에서 샀다고 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은데?”
그녀는 냉장고에 있는 반찬 하나하나를 꺼내서 확인했다. 그리고는 성준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보기에 이 정도 양이면, 그의 한 달 용돈으로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당연히 여자 친구와 같은 존재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녀의 의심에 성준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비밀로 하려고 했지만, 오해를 사는 건 딱 질색이었기에 그는 사실대로 반찬에 대해서 누나에게 이야기해줬다. 505호 여자를 구한 것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가끔씩 밥을 얻어먹고 있다는 내용까지 그녀에 대한 비밀을 제외하고는 빠짐없이 말해주었다.
“그래? 흐음...조금 이상한 사람이네. 아무리 고맙다고 해도, 너무 과한 거 아닌가? 혹시라도 그 여자가 이상한 짓 하거나, 이상한 말이라도 하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줘. 안 그래도 소문이 별로 안 좋은데,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성준의 말에 그녀는 505호 여자를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도 이건 정도가 심했다. 더군다나 미성년자인 성준을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초대하는 것도 그녀는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누나도 알겠지만, 그 여자 한 동안 사람들하고 왕래도 없었잖아. 그래서 이번 기회에 이웃들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 우리 집이 10년이나 이곳에 있었으니까, 친해지고 싶은 거겠지.”
성준은 하서윤이 오해받는 것을 원하진 않았기에 다시 한 번 최대한 포장해서 얘기해주었다.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준의 말에 마지못해 이해해주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너무 받아버릇 하면 안 돼. 네 말대로 무슨 목적이 있을 수도 있잖아. 다음부터는 정중히 거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응응, 그렇게 할게. 그나저나 누나는 무슨 음식 가져온 거야? 우와, 엄청 맛있겠다.”
“준이, 너 공부 잘하라고 특별히 가져왔어. 공부에는 역시나 보양식이 최고지.”
“역시 나는 누나밖에 없다니까. 그리고 솔직히 누나가 해준 음식이 제일 맛있어. 누나가 해준 밥 먹다가 다른 집에서 먹으면 맛없어서 못 먹겠다니까.”
“다음 주에도 싸다 줄 테니까, 아끼지 말고.”
여기에 성준은 재빨리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는 그녀가 가지고 온 반찬통을 열어보며, 그녀의 음식솜씨를 칭찬해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은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었다. 역시 여자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건 칭찬밖에 없는 듯 했다.
“요즘 공부는 어때? 잘 되고 있어?”
“뭐, 그럭저럭. 처음에는 학교도 다녀야 돼서 조금 걱정이었는데,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어. 한 한 달 정도만 지내다보면, 이 생활도 적응될 것 같아.”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이 끝나고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하면서 일상 대화를 나누었다. 같이 살았을 때만 하더라도 매번 식사시간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기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너무 무리하진 말고. 급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최대한 멀리보고 공부하는 게 훨씬 도움이 될 거야. 지치지 않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걱정하지 마. 어렵긴 해도 아직까진 공부가 싫진 않으니까. 고시원에서 한 달 정도 생활을 해서 그런지, 하루에 조금이라도 공부를 안 하면, 답답하기까지 하더라고.”
“다행이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친구들하고 만나서 놀기도 하고. 용돈은 부족하지 않지? 혹시라도 부족하면 바로 말해야 된다.”
“그렇게나 많이 줬는데 부족할 리가 없잖아. 이제 누나도 결혼해야 되는데, 너무 우리한테만 신경 쓸 필요 없어. 자기 자신도 챙겨야지.”
대화의 주제는 당연히 성준의 이야기가 주가 되었다. 그녀는 항상 대화를 할 때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나 가족하고는 그게 더욱 심했는데, 늘 자신보다는 가족을 챙기는 버릇 때문인 것 같아 성준은 그게 항상 불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누나는 요즘 어때? 일은 괜찮고?”
“나는...그냥 괜찮지, 뭐.”
“맨날 괜찮다고만 말하고. 회사일이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아. 가끔씩은 가족들한테 얘기해도 괜찮단 말이야. 남자친구하고는 잘 지내고 있어?”
“그냥...똑같아...”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괜찮다고, 그냥, 똑같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정확한 이야기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입을 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직 결혼날짜는 안 잡힌 거야?”
“아직까진...”
“아직도? 서로 결혼이야기도 오고가고, 결혼에 대해서 확신도 있는데 지금쯤이면 상견례는 몰라도 집에 인사라도 와야 되는 거 아니야?”
“결혼이 그렇게 쉽게 결정할 문제는 아니잖아. 그냥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해보는 거지.”
“혹시 이번 일하고 관련 있는 거야?”
그럼에도 성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특히나 저번에 그녀와 신지은이 나누었던 대화가 아직까지도 신경 쓰였었다. 예전부터 아기를 낳고 싶어 했던 그녀였기에 결혼을 미루는 게 이것과 큰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만약 그녀가 이 문제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도 고려해보고자 했다.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알아서 할게. 준이, 너는 이런 것까지 신경 안 써도 괜찮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누나 문제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줘. 우린 가족이잖아.”
“으응, 그래. 지금은 아무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그녀는 끝내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나마 성준이 하나 알 수 있었던 부분은 결혼 이야기에서 그녀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상당히 슬퍼보였다.
“그래, 누나가 굳이 말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정말로 큰 일이 생겼거나, 생길 것 같으면 바로 말해줘. 아, 그나저나 하영이는 어때? 기숙사 생활은 잘 하고 있으려나? 요즘 통 연락이 없네.”
더 이상 그녀의 입을 열 수 없다고 판단한 성준이 다시 한 번 화제를 돌렸다. 동생, ‘성하영’의 이야기를 꺼내자 그녀의 표정은 다시 밝아졌고,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요즘에는 말썽 안 피우고 잘 지내고 있다고 하더라고. 기숙사 보내길 잘한 것 같아.”
“말썽을 안 피우기보다는 아직 안 걸린 걸 수도 있지. 뭐, 기숙사 보낸 건 내가 봐도 잘한 것 같긴 해.”
현재 그의 동생은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 중이었다. 워낙 활발하고 노는 것을 좋아했던 그의 동생은 이 둘과는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 덕에 항상 사고치고 다니기 일쑤였는데, 기숙사에 들어간 이후부터는 그 횟수가 줄어들어서 성준과 그녀는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는 집에 올 수도 있을 거야. 그때마다 준이, 네가 잘 챙겨주고.”
“글쎄, 내가 챙겨줄 게 있을지 모르겠네. 아마도 집에 오자마자 친구 만나러 나갈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잘 챙겨줘. 하영이가 다른 건 몰라도 네 말은 잘 따르는 편이잖아.”
“알았어, 내가 잘 챙길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사고뭉치 성하영은 유독 오빠인 성준을 잘 따랐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성준이 옆에서 이것저것 잘 챙겨줘서 그런지, 오빠에게는 많은 의지를 하곤 했다. 성준 역시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그녀를 챙기려고 노력했지만, 고등학교 들어와서부터는 뜸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그는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설거지랑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준이 너는 쉬고 있어.”
“응, 고마워. 누나가 집에 오면 확실히 편하다니까.”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는 저녁 식사가 함께 마무리될 수 있었다. 오늘 하루 동안 집에 머물게 된 그녀는 혼자서 고생했을 동생을 위해 집안일을 도맡아했다. 그녀의 고집을 알고 있었던 성준은 그녀를 말리기보다는 고맙다고 말하며, 그녀의 말대로 휴식을 취하고자 했다.
위잉
그런데 그때, 성준의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 그에게 문자를 보낸 것이었다. 일요일 밤에 그에게 문자를 보낼 사람은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쓰는 단톡방은 대부분 무음으로 되어 있었고, 스팸은 차단된 상태였다. 그는 궁금함에 재빨리 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폰을 확인한 순간,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준아, 미안한데, 지금 만날 수 있을까?]
그에게 문자를 보낸 사람은 옆집 누나, 신지은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일까. 성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 시간에 갑자기?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하지만 너무 뜬금없잖아.’
한 번의 섹스 이후에 그녀는 당분간 성준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도 그녀는 지금 당장 성준에게 만나자고 말하고 있다. 의문이 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문자를 씹을 수는 없었다. 그는 고민 끝에 우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묻고자 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지금 어딘데?]
[만나서 얘기해줄게. 9시까지 사랑 공원으로 와줄 수 있어?]
하지만 그녀는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말해주겠다고 했다. 정말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성준은 이 상황에서 자신이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할지 갈등이 되었다.
‘하필이면 누나가 있을 때라서...어떡하지...안 된다고 했다가는 지은이 누나가 많이 실망할 텐데...하...돌겠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현재 그의 집에 있는 성하은이었다. 밖에 나가는 것까지는 문제가 없었지만, 누나가 있는 상황에서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지은을 무시할 수도 없었기에 그는 고민이 되었다.
‘모르겠다. 일단 나가고 보자. 만나서 얘기 듣고, 이후에 결정 내려도 충분하니까.’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신지은이었다. 안 그래도 신지은과의 섹스 이후로 걱정이 많았던 그는 오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서 그때의 일에 대해서 묻고 싶기도 했고, 가슴 속에 고여 있던 고민을 풀고 싶기도 했다.
[알았어. 정확히 어디서 만날까?]
[공원 입구에서 만나자. 나도 그쪽으로 갈게.]
신지은에게 만나자고 문자를 보낸 그는 바로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누나에게는 잠시 친구를 보러 다녀오겠다고 말한 뒤, 신지은이 있는 사랑 공원으로 향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신지은에 대한 걱정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