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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하루 종일 이강성에게서 들은 말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져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기 위해서 별의별 노력을 다 해봤지만, 자꾸만 그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자신이 상상했던 가장 끔찍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는데, 어찌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현재까지 아는 사람은...지은이 누나랑 수아뿐인가? 역시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않고 비밀로 했던 게 옳았어.’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비밀을 잘 유지했다는 점이었다. 신지은은 적어도 임신 전까지는 가장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수아 역시도 이런 이야기를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스타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두 사람만 관리를 잘한다면 적어도 히어로에게 붙잡혀서 생체실험을 당할 일은 없었다.
‘문제는 몬스터인데...전에 터미널에서 마주쳤던 괴물이 내 정체를 알아차리고 공격했던 걸까? 그나마 집이 서울이라서 참 다행이다.’
남은 걱정은 이제 몬스터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의 집이 서울이라는 점이었는데, 다른 지역과 달리 서울은 몬스터와 관련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하나였다. 상시 히어로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었고, 많은 수의 헌터부대도 있었기에 이곳을 벗어나지 않는 이상, 몬스터의 위협도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아직까진 별 일 없으니까...몬스터 입장에서도 전 세계 사람들을 살펴야 될 텐데, 굳이 무리해서 히어로들과 헌터부대가 바글바글한 서울을 대놓고 살필 일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최근에 순찰도 증가하고 있으니까 안심해도 될 거야. 안심하자...신경 써봤자, 나만 손해야.’
성준은 애써 긍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비밀을 유지한 채 지내는 것뿐이었다. 굳이 부정적인 생각들을 떠올려봤자,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는 애써 이 복잡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내며 공부에 전념하고자 했다. 이럴수록 머리에 다른 것을 채워 넣어서 신경 쓰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억지로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지우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제대로 공부에 집중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한 두 시간의 시간을 견뎌내자, 어느 정도 효과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은 점점 편안해졌으며, 그의 머리는 두려움보다는 영어단어와 각종 학습 내용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위잉
약 4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조금씩 집중력이 줄어들기 시작할 무렵, 그의 폰으로 문자 한통이 왔다. 원래 공부하면서 폰을 잘 확인하지 않는 그였지만, 잠시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문자 내용을 확인했다.
[준아,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나 특별히 먹고 싶은 음식 있니?]
문자는 505호에 사는 하서윤이 보낸 문자였다.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에 그녀에게 문자를 받은 것이 처음이었던 성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내용을 바라보았다.
‘내일 약속 때문에 인터넷으로 장보고 있는 모양이네. 으음...지금은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데...’
이제 성준은 그녀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만날 때면 편안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비록 그의 친누나 때문에 그녀와 자주 만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지만, 그녀와의 저녁 식사는 포기하기 싫었다. 그녀가 해주는 밥이 맛있기도 했고, 그녀의 전남편이 그가 되고 싶어 하는 헌터부대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그녀로부터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성준은 지금 같은 기분에 그녀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을 보고 있는 그녀에게 저녁을 차려달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례한 요구였고, 차라리 그녀와 밖에서 저녁을 먹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그는 항상 그녀에게서 받기만 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불날 뻔한 상황에서 구해줬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받는 것은 그의 누나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자신도 그녀에게 무언가를 베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집이에요?]
[왜? 혹시 저녁 먹고 싶어서 그래? 그러면 한 시간만 기다려줘. 내가 금방 만들어줄게.]
[오늘은 집이 아니라 밖에서 먹는 건 어때요? 항상 얻어먹다보니까 미안해서요. 제가 살게요.]
[밖에서? 그래, 그러면 내가 준이네 집으로 갈까?]
[제가 갈게요. 10분만 기다려주세요.]
다행히 그녀는 성준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약속이 확정되자, 그는 재빨리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는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바로 집 근처에서 먹을 생각이었기에 그렇게 차려입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그냥 집 앞에서 가볍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옷이 너무...그런가?”
하지만 가벼운 복장의 그와 달리 그녀의 모습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평상시 그녀의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여성의 복장이었지만, 오늘은 많이 달랐다. 마치 어디 좋은 곳으로 데이트라도 가는 듯한, 아니면 번화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20대 여성들의 화려하면서도 상큼한 패션과 유사했다.
“그냥 편하게 입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화장도 안 하셔도 괜찮은데...”
“미, 미안...사실, 밖에서 밥 먹어본지가 조금 오래라서...조금 긴장이 되네...”
그녀가 이렇게까지 유난인 이유는 지난 세월에 있었다. 과거에 그녀도 밖에 돌아다니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집순이에 가까웠는데, 지난 2년 동안은 거의 집밖을 나선 적이 없었던 그녀였다. 당연히 그런 그녀에게 외출은 여러모로 신경이 많이 쓰일 것이다.
‘정작 중요한 걸 몰랐네. 그냥 밥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
성준이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이미 그녀와 여러 번 만나면서 그녀의 성향과 성격 등을 대강 파악하고 있던 그였다. 다만, 오늘은 머리가 복잡한 나머지 깜빡했던 모양이다.
“생각해봤는데 밖에서 밥을 먹기보다는 이렇게 할까요? 외출하기로 했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는 건 좀 그렇고, 으음 같이 앞에 마트에서 장 보는 건 어때요? 솔직히 아파트 근처에는 먹을 만한 집도 많지 않거든요.”
큰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세심한 부분까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성준은 재빨리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굳이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주면서까지 밖에서 밥을 먹을 필요는 없었다.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었기에 오늘은 간단히 앞에서 장을 봐서 집에서 같이 먹는 게 어떨까 싶었다. 장 보는 거야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고, 그녀도 아주 가끔은 분리수거나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집 밖에 나가곤 했으니까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그래도 괜찮을까?”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이 동네는 진짜 그 흔하다는 맛집 하나도 없다니까요.”
“으응, 그렇게 하자. 옷은...갈아입는 게 좋겠지?”
“저는 상관없지만, 편한 복장이 훨씬 좋지 않을까 싶네요.”
“응, 그럼 빨리 갈아입고 나올게.”
그녀는 갑작스럽게 바뀐 성준의 제안에도 찬성을 했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이번에는 상당히 편한 복장을 하고 나왔다. 그녀가 가끔씩 입고 다니는 원피스로, 살짝 짧아서 다리가 시원하게 노출되기는 했지만, 아직 날씨가 더웠기에 적당한 복장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첫 외출이 시작되었다.
매우 오랜만에 다른 사람과 같이 집을 벗어나 다른 장소에 가보는 그녀는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한 모습을 보였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부끄러워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져갔다. 특히나 성준이 계속해서 옆에서 말을 걸어줬던 게 그녀의 마음을 빨리 풀리도록 만들어주었다.
“그동안은 주로 배달로만 생활했던 거예요?”
“으응, 사람 만나는 게 조금 무서워서...그나마 배달은 아주 잠깐이니까 참을 수 있겠더라고. 그리고 요즘에는 배달 안 되는 게 없다보니까 딱히 어려움도 없었고.”
“많이 외로웠겠네요.”
“그렇지도 않았어. 그때는 그냥 혼자 있는 게 좋았거든. 아니, 좋다기보다는 나 같은 사람은 외롭게 쓸쓸하게 혼자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어. 나 같은 게 사람들을 만나면서 행복해져도 되나 싶었거든.”
“그랬군요. 지금은...많이 달라지신 거겠죠?”
“그렇겠지? 물론, 아직까지는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도 있어. 그래도 준이처럼 좋은 사람을 만나다보니까 조금은 욕심이 생기네. 요즘에는 행복해지고 싶다는 생각도 간혹 들어.”
“당연히 행복해져야죠. 누나는 행복해질 자격 충분히 있어요. 행복이라는 게 사실 별 거 아니잖아요. 그냥 이렇게 좋은 사람이랑 같이 산책도 하고, 장보고, 밥 먹고...이러는 게 행복 아니겠어요?”
“그럴수도...그래서 요즘 준이한테 너무 고마워.”
성준은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해주었다. 그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과거에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상처를 한 번 극복해낸 자신이 그녀를 위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거고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진심으로 그녀를 대했다. 다행히 그녀는 성준의 진심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고기는 제가 사올게요. 혼자 있어도 괜찮죠?”
“응, 잠깐이니까 괜찮아. 난 야채코너에서 필요한 거 고르고 있을게.”
마트에 도착한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장을 보기 시작했다. 평일, 월요일이라서 마트에는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집에서 요리를 하는 시간까지 생각한다면 시간이 그리 많은 것은 아니었기에 성준은 최대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그녀와 잠시 떨어져서 물건을 고르고자 했다. 아주 잠깐이었기에 대인기피증이 있는 그녀라도 이 정도면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의 크나큰 착각이었다. 저녁에 먹을 요리를 위해 그녀와 떨어져 정육코너에서 고기를 골라 담고 다시 돌아가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신의 실수를 알아챌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녀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에서 그는 두 아주머니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너머로 굳은 표정으로 불안에 떨고 있는 하서윤을 발견하게 되었다.
“맞지? 그 여자?”
“아직도 우리 아파트에 살았던 거야? 이사 간 줄 알았는데, 아직 지내나봐?”
두 아주머니의 대화 주인공은 그녀로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가 딱히 그녀를 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표정 자체가 조금은 못마땅해 보이긴 했지만, 이 정도면 대부분은 기분이 나빠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니었나보다. 그녀는 자신을 향한 시선과 대화만으로도 큰 상처가 되어 다가왔는지, 심하게 몸을 떨며 야채 코너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저기요? 죄송한데, 이렇게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거기에다가 그녀의 뒤에서 장을 보던 한 사람이 그녀에게 길을 막지 말라며 뭐라고 하자, 그녀의 표정에는 절망이 가득해져갔다. 그 모습을 차마 이대로 지켜볼 수 없었던 성준은 그대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장 다 봤어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요. 이제 가요, 우리.”
“아...”
“얼른요. 누나가 해준 밥 먹고 싶어요.”
그녀에게 다가간 그가 해준 것은 별 거 없었다. 그냥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것, 그거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간단한 행동만으로도 그녀에게는 큰 변화를 일으켰다. 성준의 따뜻한 손을 붙잡은 그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올려 그를 바라봤고, 그의 편안하고 밝은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를 붙잡고 있던, 억누르고 있던 속박이 순식간에 풀리게 되었다.
“같이 가요. 제가 옆에 있잖아요.”
“...으응...”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묶여있던 그녀의 몸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붙잡은 채로 마트를 벗어날 수 있었다.
마트를 벗어날 때까지 성준은 그녀의 손을 꼭 붙잡은 채로 놓아주지 않았다. 성준은 그저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함께 걸었고, 그녀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를 따라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