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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다음날
“여기로!!”
“다리를 노려!!!”
체육시간, 운동장에서 학생들이 남녀 짝을 지어서 피구를 하고 있다. 다양한 종류의 짝피구가 존재하지만, 이들이 하는 짝피구는 남자 여자 한 명씩 짝을 지은 상태로 여자만 공을 던져서 상대방, 그것도 자신과 같은 여성을 아웃시키면 자동적으로 그 짝까지 아웃되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여자들만 공을 던진다고 해서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여자가 여자를 아웃시키고, 남자가 그것을 지켜준다는 점에서 나름의 치열함과 매력이 있는 게 바로 이 게임이다.
하지만 이 치열한 현장 속에서 유일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무기력함을 보여주는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성준이었다. 운동신경이 좋은 편에 속했던 그는 체육시간마다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지만, 오늘따라 신경 쓰이는 부분이 많았는지 게임에 집중을 못했다.
“어제도 그러더니, 요즘 따라 왜 이렇게 힘이 없어?”
그런 성준의 모습에 그의 친한 친구인 민병석이 물었다. 이민정과 짝이 된 그는 아까부터 가장 열정적으로 게임에 임하는 모습이었다.
“그냥...고민할게 좀 있어서.”
“수아가 맞을까봐 엄청 불안해하잖아.”
“아...”
성준의 짝은 그의 짝궁이자, 반에서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짝, 박수아였다. 민병석의 말대로 뒤를 돌아보자, 수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의 옷을 붙잡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미안...너무 불안해하지...!”
“꺄아아악!!”
공에 맞을까봐 불안에 떨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녀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 뒤, 이제부터 경기에 집중하려는 찰나, 갑자기 그녀를 향해 빠르게 공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 공은 그녀의 몸에 제대로 적중하고 말았다. 그렇게 제대로 게임을 해보지도 못한 채 성준과 박수아는 아웃이 되어버렸다.
“괜찮아? 미안...다치진 않았지?”
“아으...넘어지는 바람에 살짝 무릎이 까진 것 같아.”
“이거 빨리 소독해야겠는데...선생님한테 말하고 보건실 다녀오자.”
아웃이 되는 과정에서 수아는 크게 놀라며 바닥에 넘어졌고, 그 바람에 무릎을 다친 모양이었다. 여자 중에서도 운동신경이 안 좋은 편에 속했던 수아는 가벼운 충격에도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나곤 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녀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성준은 자신 때문에 그녀가 다쳤다는 죄책감에 직접 그녀를 데리고 보건실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이 아프지? 원래 무릎 다쳤을 때가 제일 짜증나는데...미안해. 내가 요즘 정신이 없다.”
체육 선생님에게 허락을 받은 두 사람은 보건실로 향했다. 보건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기에 성준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무릎이 심하게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피가 살짝 흐르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괜찮아...그럴 수도 있지. 내가 운동신경이 안 좋은 탓도 있잖아.”
사실, 이 정도 상처로 부축까지 받을 일은 아니었다. 박수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굳이 그에게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부축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에게 기댄 채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는 이러면 안 되는데...참...”
“...나한테? 왜...?”
“아...그거야 너는 내 특별한 친구니까. 그러고 보니까 성준 이용권은 왜 아직 사용하지 않는 거야?”
그렇지만 성준에 대한 그녀의 마음과 달리 성준은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은 해도 전혀 이성적인 감정은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그녀는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짝궁이자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존재일 뿐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특별하긴 했지만, 그녀가 느끼는 감정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아아...그건...나중에 사용할게.”
“언제든지 편하게 이용해줘. 너무 부담가질 필요 없어. 고마워서 그러는 거니까.”
“...으응...”
그녀도 성준의 그런 마음을 어느 정도는 눈치 채고 있었다. 다만, 아직 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와 알고 지낸지 고작 며칠뿐이었기에 벌써부터 실망하지는 않았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면서 굳이 그런 비밀이 없더라도 조금씩 가까운 사이로 발전해나가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저긴가? 학교 다니면서 보건실에 가는 건 처음이네. 듣기로는 이번에 선생님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두 사람이 보건실이 있는 신관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들어와서 단 한 번도 보건실을 이용해본 적이 없었던 성준은 신기한 눈빛으로 보건실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보건선생님이 없으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아하니, 안에 계시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친구가 체육하다가 무릎이 까져서 그런데, 소독 좀...으응?”
보건실 안까지 박수아를 부축하면서 안으로 들어간 성준은 컴퓨터로 업무를 보고 있는 보건선생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수아를 의자 앉히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며 상태를 설명하던 그는 곧 선생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선생님?”
“어머, 성준? 정말 준이, 너야?”
놀랍게도 보건선생님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갈색 계열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에 뚜렷한 이목구비, 감탄이 절로 나오는 놀라운 몸매를 소유한 굉장히 섹시한 외모를 지니고 있는 그녀. ‘유은정’ 이라는 명찰을 가슴에 달고 있는 그녀는 과거 성준의 누나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성준이 중학교 때 잠시 과외를 해줬던 사람이었다.
“선생님이 여기 어떻게...아아...그러고 보니까 간호사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되어 버렸네? 간호사는 나랑 잘 안 맞더라고. 조금은 편하게 일하고 싶었어. 물론, 여기도 생각보다 조금 바쁘긴 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성준의 머릿속에 또렷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가 워낙 유별난 성격을 지닌 것도 한 몫을 했지만, 그녀의 외모만큼은 잊을 수가 없었다. 가족을 제외한 예쁜 여자만 보면 작아지는 성격이었던 성준이었기에 당연히 그녀 역시도 기억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아직까지도 기억해줘서 엄청 고마운데?”
“고작 3년 밖에 안 지났는데, 당연히 기억해야죠.”
“생각해보니까 기억할 수밖에 없겠네. 내가 전에...”
“자, 잠시만요! 오랜만에 만나서 엄청 반갑지만, 지금은 다른 볼일이 있어서...”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녀가 그리 반갑지 않았던 그였다. 그녀는 예전부터 성준을 놀리기 좋아했고, 그러한 그녀의 성격은 성준에게는 그리 좋았던 추억은 아니었다. 굉장히 잊지 못할 기억을 선물해준 그녀였지만, 옆에 박수아가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은 조금 그랬기에 그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고 박수아에 상태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어머, 너무 반가워서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는 줄도 몰랐네. 무릎이 까져서 왔구나. 많이 아팠겠네. 준이, 네가 그런 거야?”
“어느 정도 제 책임은 있죠. 그래서 같이 온 거구요.”
성준의 말에 그녀는 그제야 그의 옆에 앉아있는 박수아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보건선생님인 만큼 그녀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치료할 준비를 했다.
“혹시...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는 아니지?”
“그렇고 그런 사이는 도대체 뭔데요? 그냥 짝궁이에요.”
“그럼 여자 친구는 따로 있고?”
“그런 거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좀 수아한테 집중하면 안 되는 거예요?”
“치이, 반가워서 그렇지. 그리고 선생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그, 그건...죄송해요.”
“후훗, 귀여워.”
“...네?”
“아니야, 너 말고. 이름이 수아라고 했지? 흐응...수아가 너 좋아하는 것 같은데?”
“네? 무슨 말도 안 되는...자꾸 이럴 거예요? 누나...아니, 선생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으시네요.”
“자, 끝났어. 상처가 깊지 않아서 2,3일 정도면 괜찮아질 것 같아. 밴드 몇 개 더 줄 테니까, 집에서 약 바르고 붙이렴.”
박수아의 까진 무릎을 치료하는 와중에 그녀는 계속해서 성준에게 짓궂은 장난을 쳤다. 아무리 중학생에서 고등학생으로 성장을 했더라도 성준이 그녀를 말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렇게 그녀의 장난은 치료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끝난 거예요?”
“응, 크게 다치진 않아서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그래도 약간 통증은 있을 수 있으니까 오늘 하루는 옆에서 잘 챙겨주고.”
“네, 그래야죠.”
“잠깐, 이대로 가면 섭섭하지. 번호는 주고 가야되지 않겠어?”
“제 번호 지우셨어요?”
“최근에 번호가 다 날아가 버려서...요즘 너네 누나하고도 연락한지 오래됐거든. 너 만난 김에 하은 언니하고도 오랜만에 연락해봐야겠다. 언니는 잘 지내고 있지?”
“네, 뭐...누나 번호도 적을게요.”
치료가 끝나고 성준은 다시 박수아와 함께 운동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런데 유은정은 오랜만에 만난 성준가 헤어지는 게 아쉬웠는지 계속 그를 붙잡았다. 오랜만에 이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다는 사실에 그녀는 상당히 즐거워 보였다.
“그래, 앞으로 종종 연락하자. 아, 혹시 아직도 그 집에서 그대로 살고 있는 거야?”
“그렇죠. 그 집 그대로에요.”
“어머, 설마 했는데 이거 완전 대박인데?”
“네? 또 왜요?”
“후훗, 아니야. 나중에 말해줄게. 아직 결정된 건 아니라서. 그럼, 다음에 또 보자. 가끔씩 쉬는 시간에 여기 놀러와도 괜찮아. 내가 예전처럼 재밌게 놀아줄게.”
“하하...누가 쉬는 시간에 보건실에 놀러와요. 아무튼 다음에 또 봐요.”
그렇게 그녀에게 붙잡혀 잠깐의 대화를 나눈 뒤에야 성준은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박수아가 옆에 있어서 애써 그녀에게서 빨리 벗어나려고 겉으로 티를 내긴 했지만, 성준 역시도 마음속으로는 그녀가 많이 반가웠다. 적어도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그녀는 장난이 심해서 그렇지 꽤나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보건쌤이랑 아는 사이였어?”
성준에게 부축을 받으며 운동장으로 이동하던 중에 그녀가 성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보건선생님하고 그런 모습을 보였으니, 그녀의 입장에서는 궁금한 게 당연했다.
“그러게...이번에 새로 바뀌었다고는 들었는데, 설마 예전 과외쌤이었을 줄이야. 미안...나 때문에 다치기도 하고, 보건쌤한테 이상한 말까지 듣고...”
“아니야...근데 보건쌤 엄청 예쁘시다.”
“응? 아아...원래 전부터 외모는 좋으셨지. 워낙 장난을 많이 쳐서 문제지만. 전에 과외할 때도 그랬거든.”
“그랬구나. 너는 주변에 예쁜 여자가 참 많은 것 같네.”
특히나 그녀는 은근슬쩍 보건쌤을 질투하기까지 했다. 물론, 눈치 없는 성준은 전혀 그런 것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표정은 보건실을 향할 때와 달리 지금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으응? 에이, 말도 안 되는...”
“민정이도 그렇고 보건쌤도 그렇고...다 예쁘잖아.”
“민정이하고는 친한 사이도 아니고, 보건쌤은 한동안 연락 없다고 이제 처음 만났는걸. 그리고 나는 매번 이런 식이야. 여자애들하고 친하게는 지내는데, 결국 이어지는 건 하나도 없거든. 뭐, 지금은 굳이 연애할 시기도 아니고, 연애할 마음이 없기도 하고.”
“그렇구나...아무튼 이젠 됐어. 부축 안 해줘도 괜찮아. 애들이 보면 또 놀릴 수도 있잖아.”
“아...그래. 정말 괜찮은 거지? 많이 아프면 바로 말해줘.”
“응응, 그럴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두 사람이 다시 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여전히 짝피구가 진행 중이었다. 성준에게서 벗어난 그녀는 절뚝거리면서 운동장을 향해 걸어갔고, 성준도 그녀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성준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해져있는지 그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