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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아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어서와. 커피 한 잔 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그래, 옷 갈아입고 천천히 나와. 오늘은 저녁까지는 조금 여유가 있을 것 같다.”
모든 학교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저마다 목적지를 향해 학교를 벗어났다. 그 중에는 학원을 향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고, 성준처럼 곧장 집으로 가는 유형의 학생들도 있을 테고, 아니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PC방이나 노래방 등을 향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박수아가 향한 곳은 한 음식점 안이었다. 너무 배고파서 그런 것일까. 아니, 그녀는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중이었다.
“후우, 오늘은 조금 피곤하네.”
그녀가 가게에서 나눠준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왔다. 방금 막 학교를 마친 뒤라 엄청난 피로감이 느껴졌다. 거기에다가 무릎까지 다쳤기에 가만히 서있기만해도 피로감이 쌓여갔다. 하지만 알바생에게 피곤함 따위가 무슨 상관이겠는가. 돈을 벌기 위해서는, 그리고 사장님에게 꾸중을 듣지 않으려면 아무리 힘들어도 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도 이 시간에는 사람이 별로 없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저녁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는 점이었다. 저녁이 되면 사람이 엄청나게 몰려오면서 또 다시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겠지만, 적어도 그때까지는 중간중간 여유를 즐길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때까지 조금은 쉬엄쉬엄 일을 하면서 피로를 회복할 생각이었다.
“다리는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아...체육시간에 살짝 넘어져서...괜찮아요. 일하는 데는 전혀 문제없어요.”
“정말 괜찮은 거지? 다른 날이면 몰라도 오늘은 갑자기 아파서 빠져버리면 곤란하다.”
“네, 정말 괜찮아요. 걱정마세요.”
“그래그래, 저녁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진 말고.”
그녀가 이곳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지는 오늘로 2개월째다. 원래는 다른 곳에서 알바를 하던 그녀는 최근에 전학을 가면서 학교 근처에 위치한 이곳으로 알바를 구했고, 지금까지 성실히 일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 고등학생이라서 그런지 어설픈 점도 많고, 실수도 많은 편이었지만, 이 가게에서 누구보다 성실한 것으로 유명했다. 2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을 하거나 빠진 적도 없었고, 매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사장님도 그녀를 상당히 좋게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몸이 안 좋긴 한데...괜찮겠지? 이럴 때는 하루 정도 쉬었으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한 소리 들을 거야. 그냥 참자. 생리만 지나가면 괜찮아질 거야.’
그렇지만 오늘은 그녀의 몸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어찌 사람이 매일 정상적인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무릎부상에다가 생리까지 겹치면서 몸이 많이 무거운 그녀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꾹 참으며 밝은 모습으로 성실히 일을 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는 데는 그녀 나름의 사정이 있었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야 해. 힘들게 구한 알반데, 포기할 수는 없어.’
그녀의 사정은 당연히 돈과 연관이 되어있다.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의 삶에 돈이란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누구나 돈 때문에 여러 일들을 겪게 되고, 행복과 절망을 맛보게 된다. 그녀 역시도 이 지긋지긋한 돈 때문에 고등학생 때부터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초등학생 때 아버지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는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살아왔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그녀와 그녀의 쌍둥이 동생을 챙기고자 열심히 공장과 식당을 다니면서 일했지만, 빚과 이자를 갚기에도 턱 없이 부족했다. 결국 미성년자인 그녀까지도 생계 전선에 뛰어들게 된 것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까지 일을 하게 되면서 확실히 전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괜찮아졌지만, 그것이 그녀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학교생활보다는 일에 치어 살면서 그녀의 삶은 더욱 절망으로 치닫고 말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학업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안 그래도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받으면서 공부하는 다른 학생들을 따라가는 것조차도 힘들었는데 여기에 알바까지 추가되니, 어떻겠는가. 성적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은 당연했으면, 매일매일 수업시간마다 피곤함에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 덕에 자연스럽게 그녀는 학교생활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고, 친구들하고의 관계도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들하고 소원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친구 사귀기도 어려워졌으며, 그녀 자신도 교우관계가 자신에게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대로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고 빨리 취업하는 것만이 그녀의 꿈이자 목표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가끔씩은 다른 아이들의 삶이 부럽기도 하고, 아버지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자신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삶을 그만두고 싶다는, 죽고 싶다는 생각은 단 한 순간도 하지 않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 그녀의 삶에 크나큰 위기가 찾아오고 말았다. 이대로 아무 일 없이 지내길 바랐던 그녀의 삶이 크게 흔들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하나뿐인 쌍둥이 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박수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녀의 동생도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되었다. 다만, 그녀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철이 든 반면에, 그녀는 계속해서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방황은 그녀를 나쁜 길로 인도해버렸다.
그녀의 동생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틀을 완전히 벗어난 채로 생활을 했다. 가족과 학교는 물론이고, 이 나라의 법도 그녀를 구속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안 좋은 친구들과 함께 다니며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심지어는 힘들게 일한 어머니의 돈을 훔칠 정도로 타락해버리고 말았다. 어머니와 쌍둥이 언니, 박수아의 마음이 타들어가도 그녀의 질주는 멈출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큰 사고를 치고 말았다. 의도한 사고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언니에게 씻을 수 없는 큰 피해를 입히고 말았다. 그 상처는 아직까지도 박수아의 가슴에 남아 끊임없이 그녀를 옥죄게 되었다. 그녀가 굳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된 것도 바로 그 이유였다.
그녀의 동생이 한 것은 어찌보면 그녀가 늘 하던 일이었다. 약한 학생들로부터 금품을 갈취하고 욕망 채우기,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도전해오는 사람들을 처단하는 것이 박수진이 매일같이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은 그 타겟이 하필이면 박수아가 다니는 학교 학생들이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의 동생에게 당한 친구들과 선배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동생에게 직접 복수를 할 수 없으니, 그녀라도 괴롭히자는 심보로 그녀를 무자비하게 공격했고, 그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집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한 동생 때문에 그녀의 삶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그때 그녀가 받았던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원래 소심하고 내성적인데다가 학업과 교우관계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따를 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좋을 수는 없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대놓고 무시를 당하고, 욕을 먹고, 심지어 폭행까지 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자살을 떠올릴 정도로 힘들어했다.
“수고했다. 내일도 나오는 거지? 너무 열심히 해서 탈나지 않을까 걱정이네. 하루 정도는 미리 말하고 쉬어도 괜찮아.”
“너무 힘들면 말하고 쉴게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그래, 내일보자.”
“내일 뵐게요. 안녕히 계세요.”
하지만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다시 일어섰다.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아서 자신을 괴롭혔지만, 그녀에게는 그런 것 따위에 휘둘릴 여유도 없었다. 절망조차도 그녀를 편히 쉬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늘처럼 몸이 아파도 끝까지 일을 하면서 돈을 모으는 것만이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었으니 말이다.
‘에구, 다리야...집에 가자마자 바로 뻗어야겠다.’
힘겹게 알바를 끝낸 그녀가 터벅터벅 집까지 걸어갔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였지만 오늘따라 더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때는 복잡하게 고민하는 것보다는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청하는 게 최고였지만, 오늘따라 자꾸만 한 가지 생각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 생각을 떨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이런 적이 처음인지라 짜증이 나기도했다.
‘하...자꾸만 신경 쓰여...짜증나...’
피곤한 그녀의 머릿속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성준에 대한 생각이었다. 누군가에게,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해본 적이 없었던 그녀는 지금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정이 상당히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애써 떨쳐내려고 해도 그 감정은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어느새 그녀를 지배하는 수준에 이르고 말았다.
‘이민정에 이어서 보건쌤까지...생각보다 주변에 여자가 많았구나. 여자들하고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인가? 그러면 나도 단순히 친구로만 여기는 거겠지? 아마도 그 비밀 때문에...하긴...그게 아니라면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녀가 성준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녀에게는 연애란 사치일 뿐이었다.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을 가질 시간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무엇보다 알바를 시작하면서부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와 멀어지지 않았던가. 알바를 할 때는 간혹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일하는데 정신 팔려서 그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성준은 특별한 존재였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고, 심지어는 친근하게 대해주었다. 지금은 그와 친한 친구가 된 것은 물론이고, 그 덕분에 다른 애들하고도 친해질 수 있었다. 삭막하기만 했던 학교생활이 성준으로 인해서 한순간에 바뀌어 버린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녀가 성준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성준이 못생긴 것도 아니었고, 성격에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모태솔로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가 좋아하는 여자들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기 때문이지, 그의 남자로서의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점점 그에게 빠져 들어갔다.
‘어제는 분명 나한테 서로에 대해서 알아 가자고도 했고, 알바하는 데 놀러온다고도 했고, 같이 영화도 보자고 했는데...그게 데이트 신청 아닌가? 그냥...친구라서 그런 건가? 하...모르겠다...나말고 다른 여친이라도 생기면...안 되는데...’
그렇지만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처음이었던 그녀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그를 절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방법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그녀가 그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그걸 이용하자. 그에게는 미안하지만...그래도 내가 엄청 큰 비밀을 지켜주고 있으니까...충분히 이용해도 괜찮을 거야.’
고민 끝에 그녀는 그것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대로 상황을 지켜보기에는 그녀에게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다. 당장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중요했기에 그녀는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카드를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이 나중에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라도 지금은 일단 과감히 지르고자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