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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하서윤
“천천히 먹어. 많이 있으니까.”
“오늘따라 누나가 해주는 음식이 더 맛있는 것 같아요. 배달음식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니까요.”
학교 끝나고 저녁에 딱히 약속이 없었던 성준은 저녁까지 공부를 마치고 하서윤이 살고 있는 505호로 향했다. 미리부터 잡혀있었던 저녁 약속이었기에 기쁘고 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단순히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녀의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하지만 맛있게 밥을 먹는 성준과 달리 그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겉으로는 성준과 크게 다를 것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현재 그녀의 속은 너무나도 복잡해 이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하...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거지...이러면 안 되는데...안 되는데 정말...’
그녀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는 생각은 전부 성준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가 바로 앞에 있어서가 아니었다. 어제 그녀는 하루 종일 성준을 떠올리면서 고민에 빠져있었다.
‘옆집에 사는 18살 고등학생한테...그것도 나를 구해준 사람한테 이런 생각을 품으면 안 되는데...서른 넘은 아줌마가 참 주책이다 정말...’
그녀가 이렇게 고민하다가 자책하기를 반복하는 이유는 2일 전에 있었던 그 일 때문이었다. 그 일 이후로 그녀는 이상하게도 성준만 떠올리면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곤 했다. 심지어는 시도 때도 없이 머릿속에 성준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와 같은 감정을 과거에도 경험해 본적이 있었던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는 왜...다시 일어서려고 하는 나를 찾아온 걸까?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내 앞에 나타난 거지? 그냥 우연일 텐데...분명히 우연인데...’
서른 두 살이었던 그녀는 이런 감정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이 감정들을 어떻게 조절하고 통제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이 자신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것 역시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그녀는 이 감정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감정에 기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거기서 나를 붙잡아서...왜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해가지고...’
물론, 그녀 역시도 자신의 생각들이 헛된 바람일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흔들렸다. 아직 심각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지금이라도 마음을 접어야만 했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나 2일 전의 일을 떠올리면 자꾸만 그에 대해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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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전, 아파트 근처 공원
“저기...손 좀...너무 아파...”
계산을 마치고 급하게 마트를 빠져나간 성준은 그녀를 데리고 빠르게 아파트를 향해 걸어갔다. 원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는 게 그만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강하게 붙잡았던 모양이다. 그녀의 말에 그는 그제야 멈춰 서서 그녀를 확인했다..
“아...죄송해요...”
성준의 뒤에서 강제로 따라오고 있던 그녀는 상당히 힘들어하고 있었다. 마트에서 받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으며, 갑작스럽게 성준에게 붙잡혀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서 그런지 숨을 헐떡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요...”
“...아니야...잠깐만...쉬었다가 가자...”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멈춰서 호흡과 생각을 정리했다. 성준은 자신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을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그녀는 벤치에 앉은 채로 불안과 긴장으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천천히 달랬다. 그리고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가 고개를 들고 성준에게 말했다.
“마트에서는...고마웠어...내가 사람들 때문에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모르는 척 했던 거지?”
그녀가 차분한 말투로 성준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녀는 마트에서의 성준의 행동이 자신을 위해 의도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진심으로 성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냥...제 잘못 같아서요...마트에 오자고 했던 것도 저고, 누나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갔던 것도 저잖아요. 그래서 미안했어요. 괜히 밖에서 밥을 먹자고 말해서...”
“그게 어째서 준이 탓이야.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불안해한 건 난데. 내가 부족하고 못난 탓이지. 하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일에 다른 사람까지 포함시키고 싶지 않아. 내 일은 내가 해결해야지. 어디까지나 내가 만들어낸, 내가 감당해야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그녀는 성준을 경계했다. 폐인처럼 지내다가,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이제야 세상 밖으로 나온 그녀였다. 그런 그녀에게 성준과 같은 사람은 너무나도 고마운 존재였지만,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대인기피증이 생길 정도로 사람들에게 치어봤던 그녀는 성준의 호의에 반사적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게 왜 누나가 혼자 감당해야 될 일이에요?”
그녀의 말에 성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가 과거의 경험과 트라우마로 인해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과거에 성준도 그랬던 적이 있었기에 그녀를 혼자 놔두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원해서, 누나가 선택해서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왜 그 모든 걸 누나가 혼자 감당해야 되는 거예요? 누나는 혼자가 아니에요. 세상에는 누나를 시기하고 안 좋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처럼 누나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에게라도 도움을 받거나 기댈 자격 있다고 생각해요.”
성준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고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이후의 선택들 역시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것들이었기에 결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준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고 있어. 그치만...그럴 수 없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도 싫고,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게 옳은지도 모르겠어. 크게 마음먹고 새 출발을 해보려고 했지만...역시 안 될 것 같아...너무 무서워...”
그렇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상처의 크기는 매우 컸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에 대해서 신뢰감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크게 원망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사람들로부터 멀어졌으며, 자신을 캄캄한 마음의 감옥 속에 가둬두었던 것이었다.
“이해해요.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이제 처음 시작한 거잖아요. 오히려 첫 시작치고는 나쁘지 않았어요. 누나를 알아보는 사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멀쩡했잖아요. 분명히 조금만 더 노력하면 지금보다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저보다 훨씬 더 좋은 사람들하고 친구가 될 수도 있고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해줄 필요 없어, 준아. 준이는 나에 대해서 잘 모르잖아.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하는데? 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신경 써주고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준이, 너는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이제 겨우 며칠 봐놓고선...”
“맞아요. 저는 누나에 대해서 잘 몰라요. 아무리 최근에 누나하고 친해졌다고 하더라도 누나가 겪었던 아픔을 100% 이해하진 못하겠죠. 그래도 누나가 어떤 종류의 아픔을 겪고 있는지는 알고 있어요. 저도 예전에 그랬던 적이 있으니까요.”
성준이 그런 그녀에게 위로를 해주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녀로부터 신뢰를 얻어야만 했다. 이제 그녀에게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때가 된 것이었다.
“어렸을 적에...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아직도 제 기억 속엔 다정하게 웃어주시던 모습이 생생한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죠. 한동안은 정말 많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공부가 손에 안 잡히는 것은 당연했고, 몇 년 동안 제대로 크게 웃어본 적도 없었죠.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거든요.”
“아...”
성준의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그녀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황하면서 최대한 그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그 모든 걸 혼자 감당해내려고 했어요.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잘해주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면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고작 학생이었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요. 혼자서 해내려고 할수록 더욱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죠.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매다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어요. 내게는 남아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 사람들을 전부 나를 위해서 노력하는데, 그동안 저는 어떻게든 혼자서 짐을 짊어지겠다면서 버텼던 거죠. 내 일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하지만 폐 좀 끼치면 어때요. 그러라고 있는 게 가족이고 친구잖아요. 지금 받은 고마움은 나중에 갚으면 될 일이고요.”
“하지만...나는...가족도...친구도 없는 걸...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줄 사람이...”
“제가 있잖아요. 제가 누나를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준이 너는...이제 고작 나를 며칠 봤을 뿐인데...”
“오래 사귄 친구라고 해서 다 좋은 친구는 아니잖아요. 솔직히 처음에는 저도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문 때문에 누나를 이상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이에요. 편견을 가지고 바라봤었죠. 하지만 계속 누나를 만나고, 누나에 대해서 알아가다 보니까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누나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고작 며칠 만에 알 수 있었어요. 지금은 누나를 만나는 게 너무나도 편하고 좋아요.”
“아...”
성준의 진심어린 말에 그녀는 차마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속마음은 물론이고, 과거의 상처까지 말해준 그에게 어떻게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왜...나한테 이러는지...잘 모르겠어...”
“저하고 비슷한 아픔을 겪은 누나한테서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고, 무엇보다 누나가 좋은 사람이라서요.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봐왔지만 누나처럼 몇 번 만나지도 않았음에도 이렇게까지 편안함을 느낀 적은 처음이에요. 뭐, 누나가 해주는 밥이 엄청 맛있는 것도 하나의 이유고요.”
성준이 혹시라도 그녀가 부담스러움을 느낄까봐 약간은 장난스럽게 그녀에 대한 고마움을 표했다. 성준의 말에 그녀는 아주 살짝 미소를 짓더니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치만...나 같은 사람이랑 다니면...준이 너까지 욕먹을 수도 있잖아.”
“그게 어때서요. 욕먹는 대신에 누나랑 함께할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해요. 그리고 막상 욕하는 사람도 없을 걸요. 아까 그 사람들도 누나를 욕했던 게 아니라 단지 알아봤던 것뿐이거든요. 처음에는 누나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게 될 거예요. 그때까지만 같이 힘내요, 우리.”
“나 같은...아줌마랑 같이 다니면...부끄럽지 않아?”
“에이, 그러 말도 안 되는...설마 누나, 그동안 제가 부끄러웠던 거예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리고 누나가 왜 아줌마에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제 친구인줄 알 걸요. 그런 걱정은 전혀 안 하셔도 돼요.”
“...으응...알았어...”
성준의 말들은 하나같이 진심이었다. 그는 그녀에게서 좋은 감정을 느꼈고, 지금도 앞으로도 그녀와 잘 지내고 싶었다. 비록 나이 차이는 조금 있지만, 충분히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집에 가볼까요?”
“아...응, 그래. 집에 가자.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그렇게 심란했던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풀릴 수 있었다. 성준의 노력은 다행히도 그녀에게 어느 정도 먹혀들었고, 그녀는 다시 미소를 되찾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찮아요? 아직도 조금은 불안하죠?”
물론, 그녀가 가지고 있는 불안함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여전히 주변을 바쁘게 살피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젠 괜찮아. 그리고 집 앞인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집까지 손잡고 가요.”
“아앗, 그, 그치만...사람들이 보면...”
“뭐, 어때요. 지금까지 계속 손잡고 왔는데.”
그런 그녀를 위해서 성준은 자신의 손을 내어주었다. 아니, 그녀의 손을 강제로 붙잡았다. 그녀는 성준의 행동에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거부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실제로 성준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집까지 무사히 이동할 수 있었다. 불안했던 그녀의 마음은 집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고, 둘은 기쁜 마음으로 저녁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