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34화 (34/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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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후(현재), 505호

‘그냥...고마워서겠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혼자였잖아. 그러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니까 당연히 감정이 복잡해질 수밖에. 아마도 이게 맞을 거야. 누군가하고 대화하고 누군가하고 같이 밥을 먹고, 장을 보고...이 모든 게 다 오랜만이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너무 신나서 내 주제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품었던 것 같아.’

2일 전 일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했다. 성준에게 고마움과 함께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그 마음들을 억눌렀다. 아직 둘 사이에 무슨 일이 발생한 것도 아니었고, 이 감정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것인지 확실하지도 않았다.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것에 굳이 휘둘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잘 먹었다. 역시 누나가 해준 밥이 최고라니까요. 마음 같아서는 매일 오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게 한이네요.”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녀와 달리 성준은 전혀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평소처럼 밥을 맛있게 먹었다. 밥을 다 먹은 그는 굉장히 기분 좋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똑같이 미소로 답을 해주었다.

“매일 와도 괜찮은데...”

“에이, 그럴 수는 없죠. 매일 오는 건 너무 민폐잖아요. 요리하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재료값도 보통이 아닐 텐데 어떻게 매일 와요. 그리고 사실, 가끔씩 저희 누나가 집에 찾아오기도 해서 매번 올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아쉽네...그래도 이렇게 가끔씩은 꼭 찾아와줘.”

“당연하죠. 이제 누나랑 저는 친구니까요.”

성준이 그녀에게 친구라고 말했다. 친구라는 단어에 그녀는 또 다시 묘한 감정을 느꼈다. 세상에 14살 차이 나는 친구가 있었던가. 친구라는 단어에 그녀는 기분이 좋으면서도 민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밥도 다 먹었는데, 소화도 시킬 겸 산책이나 갈까요?”

밥을 다 먹은 뒤, 설거지는 성준의 담당이었다. 그는 설거지를 하면서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산책? 이 시간에?”

“9월이지만 아직 날씨는 여름에 가깝잖아요. 오히려 덥지도 않고 선선해서 산책하기 딱 좋은 시간인 것 같은데요? 지금 시간이면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성준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녀는 살짝 당황했다. 그러면서 저번에 마트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그 일 이후로 이틀 동안 한 번도 밖을 나가지 않았던 그녀였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으응...”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꾹 참고 알았다고 말했다. 성준과 오랜 시간을 같이 있고 싶었고, 그와 함께라면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설거지가 모두 끝나고 두 사람은 산책을 위해 밖을 나섰다. 산책이라고 해봤자 아파트 근처에 위치한 공원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성준에게도 그녀에게도 이 시간은 나름 뜻 깊은 시간이었다.

“역시 밖에 나오니까 좋네요. 예전에는 밤에 자주 나와서 운동도 했었는데, 최근에는 공부가 우선이라 그러지 못했던 것 같아요.”

성준은 이 시간에 공원에 나와서 산책을 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이었다. 가끔씩 볼일 때문에 밖에 나온 적은 있어도 산책을 목적으로 나온 것은 꽤 되었기에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혼자도 아니고 옆에 좋은 사람과 함께 걷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은 두 배가 되었다.

“나도...이렇게 공원을 걸어본 적이 언젠지...”

그녀 역시도 매우 좋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녀의 곁을 지나갈 때는 가끔씩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성준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며 참아냈고, 지금은 너무나도 편하게 산책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씩은 이렇게 나와서 산책해요, 우리.”

“아...응, 그래.”

“저는 원래 산책하는 걸 엄청 좋아하거든요. 바람 쐬면서 주변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산책을 하다보면 뭐랄까, 혼자 걸으면 이것저것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 주어지는 것 같아서 기분 좋고, 둘이나 여럿이서 걸으면 그만큼 그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정말? 나도 전에는 걷는 거 엄청 좋아했었어. 그래서 예전에는 꽃구경도 자주 다니고, 여행도 항상 배낭여행으로 다녔거든. 지금은 뭐...여행은커녕 이렇게 근처 공원 나오기도 힘들어졌지만...”

과거에 그녀는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집순이인 것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야외 활동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피로감을 느낄 뿐, 혼자서 돌아다니거나 마음에 맞는 사람과 여행을 떠나는 것은 누구보다 좋아했다. 특히나 성준처럼 누군가와 같이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무척 좋아했던 그녀였다.

“그럼, 우리 이렇게 할까요? 지금은 누나도 그렇고, 저도 학교랑 공부 때문에 힘들겠지만 나중에 시간 내서 꼭 같이 여행가요.”

“아...괘, 괜찮을까?”

“조금...힘들까요? 굳이 서울을 벗어나지 않아도 근처에 좋은 곳이라도...”

“그러니까...나랑...같이 다녀도 괜찮은 거야?”

성준의 제안에 그녀가 이번에도 살짝 망설였다. 여행을 가는 것 자체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많이 힘들었지만, 무엇보다 그와 같이 간다는 점에서 살짝 부담감을 느꼈다.

“누나가 어때서요? 어딜 놀러가는 것 자체도 좋지만, 가장 좋은 건 마음에 맞는 사람하고 같이 다니는 거 아니겠어요?”

“아...그렇지.”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꼭 가요, 우리. 누나랑 같이 가면 분명히 재미있을 거예요.”

하지만 성준은 꽤나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녀는 여기서 또 한 번 의문이 들었다. 그는 도대체 왜 이토록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일까. 그녀는 또 다시 그 부분에서 고민에 잠기게 되었다.

“그런데 말이야...준이는...왜 나한테 잘 해주는 거야?”

언제까지 이것을 고민으로만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물었다. 산책을 하면서 마음을 편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 그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었다.

“그냥요. 꼭 이유가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냥...누나가 좋아서요.”

“아...왜...내가 좋은 건데?”

“좋은 사람이잖아요.”

“...내가?”

“네, 누나만큼 좋은 사람이 어디있다고요. 착하고, 성격도 좋고, 배려심도 좋고, 요리도 잘하고, 거기에다가 예쁘기까지...누나 생각보다 누나는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아...준이도...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저야 뭐...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죠.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으응, 나도 좋게 봐줘서 고마워.”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했다. 그것을 묻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칭찬을 들었다는 사실에 기분은 좋아질 수 있었다.

“준이는...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어느 정도 산책을 한 두 사람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벤치에 앉아서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용기를 낸 김에 그에게 궁금했던 여러 가지 사항들을 물어봤다. 성준은 오늘따라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에게 질문폭탄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최대한 솔직하고 차분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글쎄요...좋아하는 사람이라...지금까지 여자를 사귀어 본적은 한 번도 없어요.”

“정말? 하지만...준이 정도면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다들 말은 그렇게 하는데 정작 저를 이성적으로 좋아해주는 여자는 없었던 것 같네요.”

“좋아했던 여자들한테는 고백 안 한 거야?”

“안타깝게도 한 번도 고백해본 적이 없어요. 저도 사람이다 보니까 당연히 좋아했던 애들은 있었는데, 그때는 자신감도 없었고, 여러 가지 안 좋은 일들도 있다 보니까...제대로 타이밍을 잡지 못했죠.”

“아아...그랬구나. 지금은...공부 때문에 누군가를 만날 마음은 없겠네...?”

여러 질문들 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궁금했던 부분은 이것이었다. 현재 그의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공간이 있는지, 직접적인 질문은 아니더라도 대략적으로 현재 그의 마음상태가 어떤지, 그녀는 그것이 궁금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겠죠? 마음이 아예 닫혀있지는 않겠지만...지금은 솔직히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서요. 그리고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니면 경험이 없어서인지, 누군가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어요.”

“보통은...누군가를 어떻게 좋아하게 되는데?”

“제 또래 남자애들이 다 그렇듯, 처음에는 외모를 보고 좋아하죠. 그러다가 그 아이와 친해지거나 무슨 특별한 계기가 발생하게 되면 조금씩 빠져드는 거 아니겠어요? 근데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게 정말 좋아서 그런 건지...그냥 아이돌 가수 좋아하는 것하고 다를 게 없는 건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하지만 성준의 대답은 상당히 아리송했다. 현재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을 아예 닫고 있는 것인지 분명한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현재 그가 좋아하는 대상이 그녀 자신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럴 수 있지. 아직 준이는 어리니까.”

애초에 성준이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둘은 알게 된지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고, 성준에게는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생기는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 같은 사람한테 그런 감정을 느낄 수가 없지. 더군다나 32살 아줌마한테...’

굳이 성준에게 물어보지 않았아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준과 자신이 이어지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에게 물어봤던 것은 이렇게라도 그에게서 직접 들어야 하루라도 빨리 마음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빨리 마음을 접어야 그에게도,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면서 산책이 종료되었다. 둘은 매우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특히나 그녀의 복잡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었다. 약간은 쓰라린 슬픔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녀는 어제에 비해서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잠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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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다음날

“아흐...아항...!!”

성준의 방 안, 도저히 10대 남자의 목소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상당히 높은 톤의 신음소리가 방 안 가득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살과 살이 부딪히는 요란한 마찰음과 함께 한 남성의 거친 호흡도 들을 수 있었다.

“더...더...아흐흑!!” “허헉...허헉...누나...!”

이 소리는 컴퓨터 스피커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생생한 소리, 바로 성준과 신지은이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소리였다. 두 사람은 현재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서로의 몸을 만지고, 더듬고, 빨면서 방을 후끈후끈 달아오르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녀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약 한 시간 전이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남편에게 약속이 있다고 말을 한 뒤, 집을 나온 신지은은 그대로 성준의 집으로 향했다. 성준과는 당연히 약속이 되어있었기에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그의 집으로 들어갔고, 두 사람은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뜨거운 정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두 사람을 말릴 수 없을 만큼 뜨거운 분위기가 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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