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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성준
오늘은 505호에 사는 하서윤과 저녁 약속이 있는 날이었다. 매번 그랬듯이 오늘도 그녀의 요리는 너무나도 맛있었고, 두 사람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오늘은 이전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대화 주제가 상당히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알아보신 거예요?”
“으응, 알아보고는 있는데, 정보가 너무 제한적이라서...이거 때문에 돈을 얼마나 날렸는지 모르겠어.”
그들이 나눈 대화의 주제는 바로 임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녀가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일어선 것은 오로지 임신 때문이었다. 성준을 통해서 정신적인 위로를 받는 것도 큰 도움이 되었지만, 그녀에게는 지금 임신만큼 중요한 것이 없었다. 때문에 성준과 만나는 시간과 집안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녀는 오로지 임신을 위해서 시간을 투자했다.
“돈이요? 인터넷으로 알아보신 거 아니에요?”
“나 혼자서 검색하기에는 시간도 능력도 부족하다고 생각해서...그래서 여기저기 의뢰를 해봤지. 물론, 그 과정에 사기를 당하기도 했지만, 돈 쓴 만큼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된 것 같아.”
경제적인 부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임신을 위해서라면 돈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그녀는 여러 의뢰사이트를 통해서 현재 상황과 임신을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냈다. 이는 남편의 사망으로 받은 높은 액수의 보상금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자은행을 통해서 임신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는 저도 들은 적 있어요. 하지만 돈이 꽤 많이 필요하다고...”
“응, 맞아. 그래서 요즘 냉동 정자 구하기가 하늘에 별 따기지. 특히나 10년 이상 지나면 정자 운동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있어서 다들 난리도 아닌가봐. 우리 같은 서민들은 대기표 구하는 것도 쉽지 않겠더라고.”
“그럼, 누나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어떻게든 냉동 정자를 구하는 게 가장 좋겠지. 돈은 이 집이랑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을 투자하면 구할 수는 있을 것 같아. 문제는 나한테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점이야.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도 없고, 그렇다고 상류층인 것도 아니니까 우선순위에서 많이 밀려날 거야.”
하지만 정보를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오히려 절망만 더욱 가득해져갔다. 기이한 현상은 임신을 계획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그들은 앞 다투어 냉동정자를 구입했고, 이제 남아있는 냉동정자는 얼마 없었다. 냉동정자를 구입할 수 있는 조건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그녀에게는 사실상 희망이 없었다.
“아...그렇군요. 많이 힘든 상황이네요.”
“조금은 그렇지. 처음에는...이 현상 때문에 많이 실망도 하고 좌절도 했었어. 하지만 지금은 괜찮아.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니라 생각해. 설마 이 현상이 평생 지속되겠어? 10년, 아니 최대로 잡아도 20년 안에만 임신이 가능하다면 괜찮아. 그때까지 열심히 몸 관리를 하는 게 중요하겠지. 그래서 요즘 운동도 매일 하고 있어.”
그래도 그녀는 쉽게 절망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어렵게 다시 일어선 만큼 아직까지 그녀는 자신에게 희망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성준은 그런 점이 참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냉동정자 말고는 다른 방법은 아예 없는 거예요?”
“이건...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이런 소문이 있긴 했어. 전에 커뮤니티에서 만난 사람이 추천해준 사이트에서 무려 100만 원이나 주고 얻어낸 정보가 있거든.”
“100만원이나요? 단순 정보에 100만원이면 너무 큰 돈인 것 같은데요?”
성준은 냉동정자가 아닌 다른 방법은 없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임신과 관련된 부분은 꼭 그녀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 역시도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쓴 금액은 어마어마했다.
“임신과 관련된 정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져서...그래도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얻은 거 있지?”
“도대체 100만 원 짜리 정보가 어떤 건데요?”
“그렇다고 완전한 정보도 아니야. 아직까진 제대로 된 정보가 없는 상태라서. 추가로 정보를 얻고 싶으면 다음주에 100만원을 더 보내라고 해서 고민 중이야.”
“완전한 정보도 아닌데, 100만 원씩이나 한다라...저는 상상도 못할 일이네요. 그래서 그 정보가 뭐예요?”
도대체 100만원이나 투자해서 그녀가 얻은 정보는 무엇일까. 그는 그녀의 말에 최대한 집중했다.
“조금 어이없는 이야기이긴 한데, 그 정보에 의하면 세상에 아직 임신이 가능한 남자가 존재한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이 조금씩 발견되고 있다는 게 정보의 주 내용이었어. 조작된 건진 모르겠지만, 나름 근거도 있더라고. 최근에는 영국 쪽에서 그런 사람이 발견됐는데, 몬스터한테 죽었다던가.”
그녀의 이야기는 잠시 성준의 마음을 들었다가 놓았다. 임신이 가능한 남자라는 말에 움찔했던 성준은 곧 차분하게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차피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녀가 받은 정보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용들은 사실이었다. 이미 이강성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던 성준은 이런 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여기저기 팔리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웠다. 그리고 100만 원이나 하는 정보를 친구를 잘 둔덕에 공짜로 얻었다는 점이 뭔가 뿌듯하기도 했다.
“사실...일까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내용만 보면 완전 사실 같더라. 사실이 아니면 어때. 사실이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그렇겠네요.”
“그래도...으음...나를 한심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그래도 모르니까...다음주에 100만원을 더 써볼까 생각 중이야.”
그녀가 얻은 정보들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던 성준과 달리 그녀는 그 정보를 100% 신뢰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다음 주에 추가로 올라오는 정보를 구입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엄청 절실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전혀 한심하지 않아요. 저도 누나와 같은 입장이었더라면 100만 원이 아니라 천만 원이었어도 투자했을 거예요.”
“그래?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마워. 나는 내가 엄청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거든.”
“다른 것도 아니고 임신을 위해선데, 바보 같은 게 어디 있어요.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부모의 모습에 절대 바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성준은 그런 그녀를 응원해주었다. 그녀가 쓰는 돈이 조금은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 사실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가 얻은 정보들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음 주에 얻게 된다는 정보들 역시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그 정보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짝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다음 주에 알게 되면, 준이한테도 말해줄게. 아니면, 차라리 같이 볼까?”
“그것도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해요.”
“응, 꼭 같이 보자. 뭔가 임신과 관련된 확실한 정보였으면 좋겠다.”
“저도 꼭 그랬으면 좋겠네요. 누나한테 임신은 정말 중요한 문제니까요.”
“맞아. 이번에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야.”
성준의 진심어린 응원에 그녀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 유산을 해본 경험이 있었던 그녀는 이번만큼은 반드시 임신을 성공해서 자신만의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다.
“처음은 애초에 내 잘못이었어. 아무리 힘들어도 아기를 생각했어야만 했는데...내가 힘들다고 나 대신 아이를 보내버린 거야.”
“그때는...정상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누나 잘못만은 아니에요.”
“남편한테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그렇게 좋아했었는데...이젠 남편도 아기도 둘 다 없네.”
“......”
옛날 생각들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표정이 상당히 시무룩해졌다. 성준은 차마 그녀에게 해줄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지금은 그녀 스스로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미안, 내가 너무 내 얘기를 해버렸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떠올라서. 이젠 다 잊었는데, 가끔씩 이렇게 떠올라. 내가 많이 늙었나봐.”
다행히 그녀는 빠르게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마음이 진정된 그녀는 성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며 농담을 했다.
“앞으로도 충분히 예전처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누나는 그럴 자격 있어요.”
“고마워, 준아. 진짜 아기만 가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을 것 같아.”
그리고 한 편으로 성준의 마음은 조금 복잡해져 갔다.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능력은 다름 아닌 자신에게 있었다.
‘그렇지만 누나는 지은이 누나랑은 전혀 다른 상황이라...’
하지만 이제 와서 그녀에게 자신의 능력을 밝힐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를 기만하는 모양새가 될 수도 있었으며, 또한 신지은에 이어서 그녀까지 임신을 시키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어보였다. 더군다나 너무나도 순수한 모습의 그녀와 어떻게 섹스를 한단 말인가. 성준은 고민이 되면서도 차마 자신의 능력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만약에...만약에 말이에요. 누나가 얻은 정보처럼 정말로 임신이 가능한 남자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대신에 그는 간접적으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때마침 그녀가 그런 정보를 자신에게 말해준 터라 매우 자연스럽게 물을 수 있었다.
“흐응...당연히 그 사람이 원하는 조건을 맞출 수만 있다면 바로 임신을 시도하겠지? 대신, 조금은 조심스러울 것 같아. 어쩌면 사기꾼일 수도 있으니까.”
“만약 사기꾼이 아니라면 무조건 임신을 시도한다는 뜻이에요?”
“당연하지. 임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그녀의 대답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임신을 간절히 원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굳이 굴러 들어온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임신이라는 건...그러니까...그...관계를 가져야 되는 거잖아요. 그것도 낯선 남자랑.”
“아...그치만 꼭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을까? 정자만 얻어서 시험관으로도 할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병원을 통하는 건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임신을 하면 결국에 병원에 가게 될 텐데...?”
“그렇긴 하지만 임신한 과정을 굳이 병원에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직접 관계를 가져서 임신하는 쪽이 그 사람 입장에서는 훨씬 안전하겠죠.”
“하긴...그렇겠다. 그래도..,크게 상관은 없다고 생각해. 임신을 위한 건데, 관계 정도는 괜찮아. 몇 번만 참으면 되는 걸.”
심지어 그녀는 낯선 남자하고 관계를 가지는 것도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성준의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그런데 굳이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뭐야? 설마 혹시...”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성준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설마, 눈치를 챈 것일까. 성준은 떨리는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18살 아니랄까봐, 준이도 이런 거에 관심이 많구나.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는 이런 거에 관심 가지면 안 돼. 더군다나 준이는 요즘 공부하느라 바쁘잖아.”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단순히 성준이 18살 청소년답게 성적인 것에 관심을 보인 것이라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녀와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