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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이 상태로 내 마음을 전달한다면, 어쩌면 그도 받아들일 수도...’
성준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걱정과 불안으로 고민이 가득했었다. 혹시라도 성준이 자신의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을까 초조하고 긴장이 되었지만, 생각보다 그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편하고 좋았다. 그는 시종일관 그녀에게 잘해줬고, 진심으로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잠시나마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비밀을 이용해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그런 것이 없어도 그를 옆에 둘 자신감이 있었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두고 떠나는 게 두려워...특히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런다고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거든. 그래서 차라리 좋아하기 전에 거리를 두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전학 와서도 새롭게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는 조용히 지낼 생각이었지. 그런데 네가 자꾸 나한테 말을 걸어주더라고. 처음에는 거부감도 들었지만,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주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서...기분은 정말 좋더라고.”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고자 했다. 성준은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남들에게 절대 해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서 마음을 전달하고자 했다. 그것이 그녀가 그에게 할 수 있는 부담스럽지도 직접적이지도 않은 고백이었다.
“그랬구나. 나는 짝궁이고 전학생이다 보니까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한 행동이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
“알고 있어. 그래서 그렇게 너랑 친해질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좀 조심하지 그랬어.”
“그때는...하하...아직도 민망하네...그럼, 그 일 때문에 나랑 멀어지게 될까봐 그때 나를 피했던 거였어?”
“으응, 그랬지.”
“그랬었구나. 미리 알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지금은 괜찮은 거야?”
“응, 지금은 너를 믿을 수 있으니까.”
성준은 갑작스러운 그녀의 이야기에 당황스러우면서도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그만큼 그를 믿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고자 했다.
“으음...혹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전학...하고 관련된 걸까?”
“...맞아...과거에 나를 좋아해줬던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내 주변에 남아있지 않거든.”
그는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녀는 왜 그가 다니는 학교로 전학을 온 것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을 멀리하게 된 것일지, 그녀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졌다.
“어머, 너네가 여기 웬일이야?”
하지만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막 시작될 무렵, 둘 사이에 훼방꾼이 등장했다. 훼방꾼은 두 사람에게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고, 안타깝게도 그녀의 입은 그대로 닫힐 수밖에 없었다.
“아...너는 어떻게...”
“나는 여기 근처에서 가족들이랑 외식했어. 너네는 데이트 중이야?”
“응? 아...그냥...”
“어머, 혹시 너네...사귀는...”
“아니...그런 건 아니고. 그냥 할 얘기가 있어서 잠깐 만났어.”
“아아, 그렇구나. 항상 학교에서 붙어 다니길래 나는 사귀는 줄 알았지. 그러고 보니까 수아는 엄청 예쁘게 꾸미고 나왔네? 처음에 멀리서 봤을 때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
“아...으응...”
“아무튼 재미있게 놀아. 나는 가족들 때문에. 월요일에 학교에서 보자. 오해할 수 있으니까 애들한테는 아무 말 안 할게. 재미있게 놀아.”
훼방꾼은 다름 아닌 성준이 짝사랑하고 있는 이민정이었다. 밝은 표정으로 성준과 수아에게 인사를 한 그녀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버린 뒤,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갔다. 성준과 박수아는 그대로 벙찐 표정을 지으며 가족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필이면 왜 이 카페로 왔을까...지금까지 주말에 밖에 돌아다니면서 학교 애들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러게...나도 알바하면서 한 번도 반 애들 마주친 적은 없었는데...”
이민정의 등장에 성준과 박수아 사이에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특히나 성준에게 자신의 과거 이야기와 함께 진심을 전달하려고 했던 그녀에게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그...아무튼...하던 얘기 계속...할까?”
“...아니야...그 얘기는 나중에 하자. 이 분위기에서는 못할 것 같아. 다음에 해줄게.”
“그래...다음에 만나서 하자.”
당연히 진지한 분위기는 망가져버리고 말았다. 이민정이 있는 곳과 그들이 위치한 곳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다. 대화 내용이 들리지는 않더라도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남들에게 못했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겠는가. 성준 역시 그녀의 선택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만남은 조금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이대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 없었던 그들은 이민정에게 인사를 하고는 카페에서 나왔다. 아쉬운 마음이 강했지만 다음 만남을 기약하고자 했다.
“그나저나 너랑 민정이하고는 어떤 사이야?”
이곳에서 집에 가기 위해서는 성준은 지하철을 이용해야했고, 그녀는 버스를 타야만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여자를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성준은 버스정류장까지 그녀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녀가 성준에게 질문을 했다.
“민정이하고? 아...그냥...아무 사이도 아니지, 뭐. 너랑 똑같은 같은 반 친구야.”
“그래? 근데 저번부터 느낀 건데, 민정이랑 대화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 보여서...”
그녀는 성준처럼 눈치가 없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친구관계 때문에 시련을 겪은 적이 있었던 그녀는 늘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를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기에 성준이 이민정하고 대화할 때마다 상당히 기분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부분이 그녀는 매번 신경이 쓰이곤 했다.
“혹시 민정이 좋아하는 거야? 조금 전에도 엄청 당황하던데...그리고 나랑 사귀냐고 물어봤을 때도 바로 놀라면서 아니라고 말하고.”
특히나 그녀는 조금 전의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성준에게 말할 기회를 잃었다는 점도 싫었고, 이민정의 얄미운 말들도 짜증났지만, 무엇보다 성준의 태도가 더욱 신경 쓰였다. 그는 마치 좋아하는 사람에게 오해를 받은 것처럼 굴었었다.
“그건...너무 당황해서...”
“그렇다기에는 민정이하고 대화할 때랑 나랑 대화할 때랑 목소리 톤 자체가 달라지던데? 눈빛도 그렇고. 질투 날 정도야.”
“아...그게...그러니까...좋아하긴 했었지. 근데 그건 예전이고, 뭐랄까...그냥 민정이가 약간 내가 좋아하는 이상형에 가까워서 잠깐 좋아했었어. 그냥 여자 아이돌 좋아하는 거랑 비슷한 수준이야.”
그녀의 계속되는 추궁에 성준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녀에게 사실을 말해도 크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그 이야기를 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지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단순히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넘어서 속에서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준이 너는 민정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거구나.”
심지어 그녀는 말투까지도 묘하게 변화를 주었다. 그렇지만 너무나도 둔한 성준은 그것마저도 파악하지 못한 채 그녀의 물음에 답하기 바빴다.
“뭐...이상형이야 매번 달라지는 거니까. 굳이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아보여서 끌렸던 게 있긴 해. 근데 지금은 예전만큼 좋아하는 것도 아니야. 요즘엔 누구를 좋아하기 보다는 내 문제에 신경 쓰기도 바빠서...”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그러니까 좋아하긴 한다는 뜻이잖아.”
“어...응, 그렇지? 근데 그건 왜?”
“아니...그냥...”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제야 성준은 그녀의 표정이 안 좋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걱정이 되었던 그는 직접적으로 묻기보다는 유쾌한 이야기를 통해서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노력했지만, 그녀의 말투에는 여전히 한기가 느껴졌다.
“버스 왔네. 먼저 가볼게. 오늘 재미있었어.”
“아...으응, 다음에 또 시간 되면 보자. 그때는 꼭 네 이야기 듣고 싶어.”
“...내 이야기가 정말 듣고 싶긴 한 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우린 친구니까.”
“친구? 그래...친구니까...그럼, 다음에 이야기 해주는 대신에 하나만 부탁할게.”
그녀가 타고 갈 버스가 곧 도착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성준은 끝까지 그녀를 웃으면서 대해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마지막에 성준에게 한 가지 부탁할 것이 있다고 말했다.
“어떤 건데? 수아 네 부탁이라면 다 들어줄게.”
“네가 가지고 있는 그 능력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어. 다른 남자들을 잃어버린 그 능력 말이야.”
“...능력?”
“응, 능력.”
“무슨...?”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그럼, 갈게. 다음에 봐.”
“으응, 잘 가...”
그 이야기를 끝으로 그녀는 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성준은 그녀가 말한 부탁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버스는 출발해버린 상태였다. 도대체 그녀가 말한 부탁은 무슨 뜻일까.
‘뭔가 마무리가 찝찝하네.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히 저녁을 먹고 카페에서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참 좋았다. 드디어 그녀와 깊게 친해지면서 걱정을 덜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민정이 끼어 든 순간부터 분위기가 완전히 반전되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성준은 그저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택시 타고 싶지만, 너무 사치겠지? 지하철 타고 가자.’
복잡한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그는 지하철 역 안으로 들어갔다. 갑자기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잠시 택시를 타고 집에 갈까 고민도 해봤지만,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개찰구를 통과했다. 토요일 저녁인 이 시간에는 지하철 안이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많아서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내일이 일요일인 만큼 약간의 불편함은 감수하고자 했다.
‘으으...사람 진짜 많네. 조금만 참자.’
지하철은 역시나 사람이 많았다. 사람이 많은 곳은 딱 질색이었던 그는 그나마 사람이 별로 없는 가장 끝부분으로 이동해서 지하철을 기다렸다.
그나마 지하철에 사람이 많음으로 인해서 그에게 이득이었던 부분은 그로 인해서 박수아에 대한 걱정을 조금 덜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빨리 집에 도착해서 시원한 물에 샤워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집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까 최대한 반대쪽 문으로 이동하자.’
안내방송과 함께 지하철이 도착했다. 일찍부터 대기하고 있던 성준 가장 먼저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 반대쪽 문을 향해 이동했다. 지하철 안에도 사람이 많았지만, 열심히 몸을 파고들어 반대쪽 문 앞으로 이동하자, 한 명의 여학생이 보였다.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어폰을 착용한 채로 문 앞에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중이었다.
성준은 그녀의 뒤에 서서 문 옆에 있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앞에 사람이 있는 것이 조금 신경은 쓰였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붙잡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무사히 집이 있는 역에 도착만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오늘 그의 고난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다음 역에 도착한 지하철은 더 많은 사람들을 태우게 되었고, 점점 지하철 안의 공간은 좁아지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접촉을 허용한 채로 대기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의 앞에 위치한 사람이 여자라는 점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그녀와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지만,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