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49화 (4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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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다음날, 박수아

성준과의 데이트 이후로 박수아의 근심은 더욱 깊어져갔다.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민정의 훼방으로 완전히 실패해버렸고, 성준이 이민정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애초에 그가 자신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짜증이 나고, 한숨이 나왔다.

‘짜증나...왜 하필이면 그 애일까...’

우연히 성준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만큼은 그와 항상 붙어 다닐 정도로 친해졌으며, 단둘이 데이트까지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그녀는 이제 그와 가까워질 만큼 가까워졌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착각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신보다 훨씬 예쁘고, 몸매도 좋고, 공부도 잘하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성격도 좋다고 인정받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당연히 좋아할 수밖에...나하고는 비교도 안 되니까...’

그녀에 비해서 이민정은 많은 부분에서 뛰어났다. 그렇기에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민정에게 질투심을 느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민정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정도로 그녀는 어느새 성준에게 심각하게 빠져 있었다.

그녀의 성준에 대한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져갔다. 특히나 그를 쉽게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자극했다.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준 그였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점점 더 멀어졌다. 그 점이 그녀에게는 소유욕을 일으켰고, 이제는 반드시 그를 붙잡겠다고 다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민정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인걸...이민정이 옆에 있는 이상, 이런 나를 봐줄 리가 없잖아.’

문제는 지금 당장 그를 붙잡을 방법이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성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태도였다.

짝사랑에 실패해본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짝사랑도 사랑이기에 그만큼 많은 상처를 받게 되지만, 그래도 그 과정을 통해서 전보다 한 단계 성숙해지는 것이 일반적이라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녀의 경우는 매우 달랐다. 그녀의 사랑은 집착에 가까웠다. 아직까지 성준에게 고백을 하지도 않았고, 마음을 전달하지도 않은 상태이긴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어두운 욕망이 꿈틀거렸다. 지금까지는 애써 이러면 안 된다고 마음을 먹으며 부정해봤지만,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점점 유혹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내게 다가와준 사람을 놓칠 수는 없어. 어떻게든 붙잡아야 되는데...역시 그 방법뿐인가...’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가 성준에게 호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법은 무수히 많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고, 성준에 대한 욕심이 워낙 크다보니까 일반적인 사고를 거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역시나 성준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쥐고 있는 카드 중 가장 강력한 카드이다. 더군다나 그녀보다 모든 것이 뛰어난 이민정마저도 이 카드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가는...그가 안 좋게 볼 수도 있잖아. 그렇지만 다른 방법은 없고...하...’

물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 카드를 사용할 경우에는 자칫했다간 그에게 영영 증오와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럼에도 딱히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천천히 그의 마음을 열기에는 자꾸만 이민정이 신경 쓰였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마음은 오늘도 복잡하고 무거웠다. 성준의 앞에서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지냈지만, 계속해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중간에 성준이 이민정을 힐끔 바라보거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차갑게 대하고는 했다.

‘이럴수록 더 살갑게 대해야 되는데...자꾸 왜 이러지...’

그녀는 이런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성준을 보면, 자꾸만 이민정이 떠올랐으며, 성준의 미세한 표정변화나 행동 하나하나, 말투 하나까지도 전부 신경이 쓰였다.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고, 그의 마음을 알 수 없자 자꾸만 화가 났다. 그리고 그 화를 이상하게도 자신이 좋아하는 그에게 풀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자신이 바보 같았지만 머리로 마음을 누를 수 없었다.

“점심시간에 점심 먹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일까. 성준이 먼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오늘 아침부터 자신에게 내내 이상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자신의 약점을 쥐고 있는 그녀에게 잘 보여야 되는 입장이었던 그는 결코 그녀를 방치할 수 없었다.

“무, 무슨 얘기하려고...?”

그녀는 드디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성준이 고마우면서 한 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혹시라도 자신이 너무 지나치게 차갑게 대한 것은 아닐지, 그거 때문에 성준이 자신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그와 단둘이 대화하는 것은 좋았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으음, 점심 먹고 얘기하자. 사람들 없는 곳에서 말하고 싶어.”

“...으응, 그래.”

그가 그녀에게 할 얘기는 무엇일까. 시간이 흘러, 점심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아무도 없는 장소에 도착했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성준은 매우 진지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내가 이런 편으로는 눈치도 없고, 많이 둔해서 그런데...혹시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말해줄 수 있어?”

잠시 진지한 모습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성준은 이내 상당히 미안한 말투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는 그녀와 만났던 날 이후로 차갑게 변한 그녀의 태도가 상당히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그의 태도에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더니, 이내 차가운 말투로 대답했다.

“아니, 없는데.”

사실, 그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은 그녀가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많이 좋아했고, 어떻게든 그와 가까워져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럼에도 지금 그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은 자꾸만 이민정에 대한 질투심과 함께 그에 대한 집착 욕구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아...그렇구나...그럼, 왜 이러는지 알 수 있을까?”

“내가 뭐?”

“예전하고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아서. 아무래도 토요일에 만난 이후부터 같은데...그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던 성준은 답답하기만 할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변한 그녀의 태도가 이해도 되지 않았고, 심지어 짜증도 났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 막 친해진 자신의 친구였고, 무엇보다 엄청난 약점을 쥐고 있었다. 아무리 답답해도 그녀와의 갈등을 빨리 해결해야만 했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으응, 솔직하게 말하면 고칠 수 있도록 노력할게.”

그렇게 약 10분 정도를 대치한 끝에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10분 동안 머릿속으로 여러 고민을 하던 그녀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자신이 쥐고 있는 카드를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냥...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떤 생각?”

“아무리 짝궁이라도 네가 왜 굳이 전학생인 나한테 계속해서 잘해주는지 생각을 해봤거든. 처음에는 나를 정말 친구로 생각하는 줄 알았어. 그래서 정말 고마웠고, 나도 진심으로 너를 대해줬어. 그런데 자꾸만 의문이 들 더라고. 너는 주변에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도 많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왜 굳이 나하고 친하게 지낼까, 이런 생각이 들었어.”

“혹시 내가 비밀 때문에 너랑 억지로 친하게 지낸다고 생각한 거야? 그래서 어차피 비밀이 없어지면 멀어질 사이니까, 미리 이렇게 차갑게 대했던 거고?”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비밀 때문에 나랑 마지못해 친하게 지내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서...”

그 카드를 이용하기 전, 그녀는 지금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그럴듯한 설명을 먼저 이어갔다. 성준은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과거에 상처가 있었던 그녀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그녀의 상처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듣지 못했지만, 그거 때문에 전학까지 왔다면, 크고 깊은 상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랬었구나. 이해해. 충분히 그런 생각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절대 아니야. 비밀이 없어도, 기이한 현상이 사라져도 나는 너랑 끝까지 친구로 지낼 거야.”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성준은 그녀를 따뜻하게 달래주었다. 그녀가 지닌 자신의 비밀도 비밀이었지만, 고작 이런 이유로 친구를 잃는 것은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다. 아직까지 그녀의 상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 최대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고 달래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당연하지. 우리가 이 비밀 때문에 더 가까워진 건 사실이지만, 이제는 이 비밀이 없어도 충분히 가까운 사이 아니었나?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너는 아니었구나?”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비밀이 있는 건 오히려 더 좋은 거 아니야? 우리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거잖아.”

성준의 말은 그녀에게 어느 정도 통했다. 그녀는 적어도 성준이 이런 자신을 답답해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물론,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그가 그녀를 아직까진 친구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자신만의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그렇지. 우리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비밀이 있다는 건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말인데...조금 더 알고 싶어.”

“...으응? 뭐...를?”

조금 더 알고 싶다는 그녀의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성준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살짝 당황했다.

“네 말대로 비밀이 없더라도 우리 사이가 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잘 알겠어.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 그래서 이 비밀에 대해서 조금 더 알고 싶어. 친구가 가진 비밀이니까...이 비밀을 통해서 너랑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하지만 저번에도 그래서 말해줬었잖아. 그리고 아직 나도 이거에 대해선 잘 모르고...”

“저번에 알았던 건 네가 가진 능력에 대해서 뿐이었잖아. 내가 너한테 내 비밀들, 과거 상처에 대해서 말해주려고 했던 것처럼, 너도 이 비밀로 인해서 겪은 고통들이나 고민들을 나한테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도 전에 못했던 내 과거에 대해서 말해줄게.”

그녀는 성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성준이 가지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조금도 깊이 공유를 하자는 것이었다.

“네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은 딱 두 명밖에 없다면서. 너도 분명히 그거 때문에 고민이 많을 텐데, 옆에서 같이 고민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훨씬 좋잖아. 그것도 매일 볼 수 있는 친구라면 더 좋지 않을까? 내가 그거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위로는 해줄 수 있으니까...”

그녀의 제안은 다소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럴듯했다. 친구 사이에 비밀을 공유하는 일은 청소년기에는 매우 흔한 일이었다. 물론, 그 비밀의 수준이 어마어마하긴 했지만, 그녀의 말대로 성준이 그거 때문에 매일매일 고통을 받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성준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자신의 일이었다. 굳이 이 일에 그녀를 휘말리게 하는 것이 옳은가 싶었다. 특히나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자신과 이 비밀에 집착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잘 알겠어. 근데 왜 하필이면 많고 많은 비밀 중에 이거를...차라리 다른 걸 공유하면 안 될까. 나도 과거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특별한 이유라기보다는 그거 때문에 우리 사이가 가까워졌으니까. 그리고 지금 너를 가장 괴롭히는 일이 그거 아니야?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네가 나한테 먼저 손을 내밀어준 만큼 나도 네 비밀과 고충에 대해서 들어주면서 위로해주고 싶어.”

“뭐...꼭 안 될 건 없지만...이게 참...민감한 일이고, 대놓고 말하기가 그래서...”

그녀의 제안에 성준은 고민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제안을 받아들이자니, 앞으로의 일이 짐작되지 않았고, 제안을 거절하자니, 그녀가 걱정되었다.

“싫다는 뜻이야?”

“아니...알았어, 그렇게 하자. 대신, 나한테도 시간을 조금 줬으면 좋겠어. 너도 알다시피 비밀이나 고민이라는 걸 털어놓기 위해서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잖아. 분위기도 굉장히 중요하고.”

하지만 역시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상대 앞에서는 철저한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제안을 거절했다가는 기분이 상한 그녀가 무슨 짓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지못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정도는 이해하지. 아무튼 고마워, 정말. 이제 조금 마음이 풀린다.”

성준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녀의 차가운 표정이 풀렸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성적이고 소심한 친구라 생각했던 그녀였지만, 이 정도로 자신을 괴롭힐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지? 다음부터는 혼자서 막 망상하고 그러면 안 된다. 친구 사이에 믿음도 정말 중요한 거란 말이야.”

“미안해. 나도 모르게 자꾸만 걱정이 돼서...이제부터는 비밀도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절대 그런 생각 안할게.”

“에휴, 그래. 이제 종치겠다. 교실로 돌아가자.”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성준의 약점을 쥐고 있는 상태이다. 그는 그녀의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주기로 약속까지 한 마당에 이런 제안을 들어주는 게 꼭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그녀가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면 모든 것이 나아지리라 기대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생각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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