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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박수아
박수아는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알바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었고,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힘든 것에는 익숙해지기가 어려웠다. 고작 고등학교 2학년인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벅차보였다.
한 눈에 봐도 피로를 잔뜩 어깨에 짊어지고 집에 들어온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뻗어버렸다. 학교에 알바까지...이대로 기절하듯이 잠을 자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 그녀에게는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오늘도 늦나보네.’
그녀의 어머니는 매일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다. 빚을 갚는 게 최우선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그 때문에 집안일은 대부분 그녀의 차지였다.
잠시 눈을 감은 채로 휴식을 취하던 그녀는 채 5분도 지나지 않아서 지친 몸을 강제로 일으켰다. 고작 5분도 안 되는 휴식으로 몸 곳곳에 쌓여있는 피로를 떨쳐낼 수는 없었지만, 이대로 계속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푼 그녀는 지금까지 빠짐없이 늘 해왔던 자신의 일을 시작했다.
‘빨래는 내일 한 번에 돌려야겠다. 청소는 간단히 하면 될 것 같고...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에 먹을 반찬만 몇 개 만들어놓으면 끝나겠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녀의 집이 단칸방이라는 점과 가족이 다 합쳐서 고작 3명이라는 점일까. 그녀는 피곤한 몸을 열심히 움직여가면서 집안일을 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에 책임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족이 무너지는 것을 그녀는 절대 바라지 않았으니 말이다.
‘후우, 이 정도면 되겠다. 그러면 간단히 씻고, 잘 준비 해야지. 오늘따라 엄청 피곤하네.’
그렇게 오늘 할 일을 모두 마친 그녀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시원한 물로 지친 몸을 달랬다. 오늘따라 더욱 피곤함을 느껴서인지 빨리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무언가가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그것은 그녀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할뿐만 아니라 자꾸만 쿡쿡 찌르기도 했다.
‘하...괜찮겠지? 내가 너무 오바했나?’
그녀를 괴롭히는 그것은 역시나 성준이었다. 오늘 성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던 그녀는 알바 하는 내내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집중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지금도 혹시라도 성준이 안 좋은 마음을 품게 될까봐 걱정이 되었는지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 하루하루 정신없이 살다보니까 외모 가꿀 시간도 없는 걸...내가 이민정을 이기려면 그걸 이용하는 수밖에...’
화장실 거울에 비치는 그녀의 모습은 평범한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객관적인 기준에서 본다면, 그녀의 외모는 절대 나쁜 편에 속하지 않았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귀여운 여고생이었지만, 안경을 벗고 화장을 한다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예쁜 외모로 변신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몸매였다.
‘알바 끝나고 운동이라도 좀 해야 되나? 그치만 이건 운동으로도 안 될 텐데...이런 몸을 보다가 이민정 같은 애를 보면 확실히 다르겠지?’
그녀의 몸매가 보잘것없을 정도로 엉망인 것은 아니었다. 먹는 것이 많지 않았고, 매일 같이 알바를 했기에 뚱뚱한 몸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당히 마른 편에 속해있고, 키도 그리 작지는 않았다.
하지만 몸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가슴과 골반이 빈약하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그녀도 자신의 단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거울을 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가슴만 조금 더 컸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다. 그래도 나한테는 비장의 카드가 있으니까...이제 그걸 이용해서 그의 마음을 얻으면 되는 거야.’
샤워를 하면서 최대한 가슴을 마사지해보고, 가슴이 커지는 운동을 잠깐 시도해보기도 했지만, 이런 걸로 가슴이 커질 리는 없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샤워를 마쳤다. 그녀는 이런 외적인 것보다는 자신만이 이용할 수 있는 그 방법을 사용하는 게 훨씬 좋다고 합리화하며 수건으로 몸을 닦으며 밖으로 나왔다.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그녀는 간단히 머리를 말린 뒤,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서 폰에 있는 사진들을 살폈다. 그녀가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진들은 전부 성준과 함께 찍은 것들이었는데, 대부분 학교에서와, 지난 번 데이트 때 찍었던 사진들이었다. 매일 같이 자기 전에 성준의 사진을 바라보는 것이 그녀의 삶의 크나큰 낙이었다.
“뭐하냐? 너 요즘 따라 엄청 수상하다. 맨날 폰 보면서 실실 쪼개고.”
그녀가 한창 성준의 사진을 보면서 이것저것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중에 집으로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녀의 쌍둥이 동생, 박수진이었다.
“아...왔어?”
“떡볶이 사왔는데, 먹을래? 아직 엄마는 안 왔지?”
“으응, 아직 안 오셨어.”
박수진. 박수아의 동생인 그녀는 박수아하고 비교하자면 외모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었다. 성격은 물론이고, 패션 스타일과 화장 방법, 그리고 가족에 대한 마음과 기본적인 도덕성까지 많은 부분에서 극과극의 모습을 보였다. 생김새만 일란성 쌍둥이일 뿐, 아버지가 돌아가면서부터 두 사람이 선택한 길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기 계란말이는 네가 한 거지? 내가 먹어도 되냐?”
“엄마꺼 조금만 남겨놔.”
“딱 3개만 먹을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다르다고 해서 박수아가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록 그녀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경험했고, 절망까지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하나뿐인 동생이었고, 가족이었다. 그녀가 왜 자신과 다른 길을 선택했는지도 잘 알고 있었고, 이해가 가능했기에 차마 그녀를 나무랄 수는 없었다.
“술 냄새랑 담배 냄새 엄청 심해. 샤워부터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귀찮아. 어차피 엄마 늦게 오잖아. 먹고 씻을게.”
이해는 되었지만, 박수아의 입장에서도 그녀는 참 신기했다.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자신과 똑같았던 그녀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자. 18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면 안 되는 온갖 일탈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굳이 술과 담배가 아니더라도 화장과 옷차림부터 범상치 않았다. 과거에 자신처럼 내성적이고 소심했던 아이가 어떻게 저렇게 180도 달라질 수 있는지 박수아는 그녀가 신기하면서도 놀랍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디 다녀온 거야?”
두 사람은 식탁을 펼치고 자리에 앉아서 떡볶이를 먹었다. 박수진은 떡볶이와 함께 사온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박수아는 그런 그녀를 얌전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는지, 불쑥 질문을 하나 던졌다.
“내가 어딜 다녀오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아니...그냥...”
“친구들도 만나고, 알바도 하고 왔지.”
“아...그랬구나.”
박수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완전히 엇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교에서 흔히 일진이라 불리는 불량 청소년들과 어울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학교까지 자퇴하고 비행 청소년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름 알바도 하면서 본인의 용돈만큼은 스스로 벌고 있긴 하지만, 가끔씩 어머니에게서 거의 강탈하다시피 돈을 받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과거에는 동생이 잘못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지적을 해서 고쳐주던 박수아였지만, 이제 그녀에게 동생은 대화조차 함부로 나누기 어려울 정도로 까다로운 존재였다.
“용돈이라도 주려고 물어본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그러니까...나중에...나중에 말이야...네 옷 좀...빌릴 수 있을까 해서...”
그럼에도 그녀가 동생에게 질문을 던졌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박수진은 어디서 돈을 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나 씀씀이가 컸다. 입고 다니는 옷들 대부분이 나름 가격이 나가는 브랜드 제품이었고, 가방은 수백만 원의 명품백을 들고 다녔다. 박수아는 그녀에게서 옷을 빌려 입고 싶어 했다.
“뭐? 미쳤어?”
“아...미안...그냥...요즘에 안 입는 옷들도 있는 것 같아서...”
“하...돌겠네. 너 혹시 남자친구라도 생겼냐?”
“아니...그건 아니고...”
“너 맨날 핸드폰 보면서 실실 거리던 게 그거 때문이었지? 주제에 또 남자는 만나고 다니는 모양이네?”
언니의 말에 박수진은 마치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바로 알아차렸다. 처음에는 상당히 비꼬듯이 짜증을 내던 그녀는 이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언니를 바라보았다.
“어떤 놈인데?”
“...으응?”
“씨발, 어떤 놈하고 만나냐고. 너 주말에 몰래 내 화장품 쓰더니, 그 새끼 만나러 간 거였어?”
“......”
“아, 답답해. 옷 빌려줄 테니까, 사진 보여줘 봐.”
박수진은 언니가 연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흥미를 느꼈다. 그동안 그녀가 아는 박수아는 연애는커녕 사람을 만나는 데에도 전혀 관심이 없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남자가 생겼다니, 흥미가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아직 사귀는 건 아닌데...”
“일단 보여줘 봐.”
“...여기...”
박수아가 동생에게 폰을 건네주었다. 굳이 동생에게 성준을 보여줘야 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는 혹시라도 동생이 무언가 조언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궁금했다. 적어도 자신보다는 동생이 남자를 만났어도 훨씬 많이 만났고, 남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말이다.
“너무 병신 같이 생긴 거 아니야? 아닌가? 이 사진 보면 또 나름 괜찮기도 하고. 그래도 네가 나랑 쌍둥인데, 고작 이런 남자 만나기에는 조금 아깝지 않냐?”
“아직 사귀는 건 아니라니까...”
“그럼, 뭔데? 주말에 얘 만나러 간 거 아니었어?”
“맞긴 한데...사귀는 건 아니야...지금은 그냥 친구...”
“그러면 썸이라는 거야?”
“잘 모르겠어...”
“뭐야, 찌질하게 너 혼자 좋아하는 거네?”
“...으응...”
그래서 박수아는 그녀에게 성준에 대한 마음을 사실대로 고백했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조금 두렵기도 했지만, 그래도 조언을 얻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도 네가 이제 좀 찐따에서 벗어나려고 노력은 하나보다.”
“혹시...좋은 방법 같은 거...없을까? 너는 나보단 남자에 대해서 잘 알잖아.”
“하...이제는 나한테 조언도 구하는 거야? 그래, 까짓것 말해줄게. 그래도 예전에는 언니랍시고 네가 나 챙겨준 적도 있었으니까 그거에 대한 보답인 줄 알아.”
다행히 박수진은 조언을 해줄 마음이 있어보였다. 그녀는 계속해서 성준의 사진을 바라보더니, 이내 맥주를 벌컥 벌컥 들이키며 말했다.
“솔직히 남자들은 별 거 없어. 무조건 예쁘면 끝이거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조언은 간단했다. 그녀는 옷장에서 자신의 옷 몇 벌을 꺼내 보여주면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오로지 여자의 외모라고 말했다. 자신과 쌍둥이인 박수아의 기본 베이스는 나쁘지 않기에 이 상태에서 화장 잘하고, 옷만 예쁘게 입는다면, 웬만한 남자들은 꼬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말...그럴까?”
“네가 찐따처럼만 굴지 않으면 대부분은 넘어올 거야. 솔직히 이 병신 같은 현상만 없었으면, 남자 꼬시기 존나 쉽지.”
“...왜?”
“여자가 대준다는 데 마다할 남자는 없거든.”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는 한 가지 얘기를 더 꺼냈다. 마치 자신의 과거 경험을 말하듯 그녀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여자를 만나는 이유가 ‘섹스’라고 말했다. 아무리 자신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섹스를 거부하는 남자는 없을 것이라고 마치 확신에 차듯 박수아에게 설명했다.
사실, 일반적인 사람이 들으면 그녀의 말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말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모든 남자들이 성욕 해소를 위해서 여자를 만나는 것만은 아니다. 순수한 사랑도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박수아에게는 그녀의 조언이 어느 정도 먹혔다. 그녀는 당장 성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더군다나 성준은 기이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적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그게 정말이야?”
“당연하지. 물론, 그렇게 꼬시다가는 진짜 쓰레기 같은 애들 만나서 좆될 수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넘어오기 마련이야. 물론, 지금은 기이한 현상 때문에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졌지만. 씨발, 그것만 생각하면 존나 열 받는다니까.”
“그럼 그건 거의 최후의 수단이겠다.”
“최후고 지랄이고 지금은 전혀 쓸모없잖아. 그것만 아니었어도 돈을 조금 더 땡길 수 있었는데. 아무튼 이 옷들 입고, 화장도 잘 해서 만나봐. 어느 정도 효과 있을 거야. 대신, 앞으로 내 옷이랑 화장품 쓰려면 삼만 원씩 주고.”
“사, 삼만 원이나?”
“삼 만원은 조금 너무한가? 그럼 이 만원만 줘. 아으, 나는 좀 씻어야겠다.”
“아...으응...”
그렇게 박수진은 연애에 대한 조언을 마치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방에 혼자 남게 된 박수아는 떡볶이와 맥주캔을 정리하고는 동생에게 빌린 옷과 화장품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정말 이거면 나를 좋아해줄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박수진이 말해준 것은 사실 조언이라 부르기도 애매했다. 하지만 박수아는 그것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자꾸만 꿈틀거렸다. 일단은 이 옷과 화장품을 바탕으로 성준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우선이겠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다른 쪽으로 마음이 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