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55화 (5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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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다음날

다음날 아침, 아무것도 모르는 성준은 누나가 깨어나기 전에 미리 집을 나섰다. 누나가 모를 거라고 확신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누나랑 마주치면 뭔가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에 아침도 거르고 바로 학교로 출발했다. 신지은에게도, 누나에게도 간단히 문자를 보냈으니 큰 문제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학교에 도착한 성준은 오늘만큼은 마음 편하게 지내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그의 그런 마음과 달리 오늘 하루도 그리 평탄해보이지만은 않았다.

일단, 학교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나 박수아였다. 어제 진지하게 얘기를 나눈 만큼 더 이상 차가운 모습을 보이진 않던 그녀였지만, 오늘따라 필요이상으로 과한 친근함을 보이고 있었다. 어제와는 180도 다른 그녀의 모습에 상당히 당혹스러웠지만, 차마 그녀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하...첫날에 인사를 건네지 말았어야 했나. 도대체 이 애의 마음을 알 수가 없네.’

그런 박수아가 성준은 이제 상당히 짜증이 났다. 그녀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 거슬렸다. 비밀을 유지해주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다주는 것은 좋았지만, 지나친 간섭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물론, 그럼에도 겉으로는 절대 이런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박수아는 심지어 쉬는 시간마다 성준을 관찰하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녀와 다니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기에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조금 지나칠 정도였다. 특히나 자꾸만 뭔가를 말하려다가 마는 듯한 그녀의 모습이 너무너무 답답했던 성준은 오후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잠시 교무실을 다녀온다고 말한 뒤, 그녀 몰래 매점이 있는 휴게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혼자서 쉬는 시간을 보내니, 그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최대한 조용히 생활하고 싶었는데...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옆에 누가 있다는 게 나쁘진 않지만, 너무 꼬였어...에휴...시원한 거라도 마시자.’

휴게실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던 성준의 머릿속에 자꾸만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애써 모든 생각을 잠시 내려놓으려고 노력해봤지만, 그 생각들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결국, 이곳에서도 완전한 안락함을 느낄 수 없었던 그는 답답한 마음에 매점 옆 자판기에서 탄산음료를 뽑아마셨다.

‘잠깐...설마...아니겠지? 에이...말도 안 돼. 세상이 좁다고 하더라도 이건 너무 하잖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택은 그를 더욱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음료자판기가 위치한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굉장히 낯이 익은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그 사람의 이름과 성도 몰랐지만, 분명히 성준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에이, 아닐 거야. 그치만...한 번 확인해볼까? 얼굴만 보고 오자.’

성준의 시야에 들어온 사람은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을 정면으로 확인하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착각을 한 것이라 생각하며 정확한 확인을 위해 그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때는 교복이 아니라 사복이었는데...그때도 얼굴은 제대로 확인 못했지. 그런데 어째서 보자마자 그 사람이 떠오르는 걸까...하...워낙 기억에 남는 경험이라 찰나의 순간에 모든 걸 기억한 건가...차라리 기억을 안했으면 좋았을 것을...’

성준이 몰래 미행하고 있는 사람은 교복치마를 입은 여자였다. 그것도 성준의 학년이 아니라 한 학년 후배인, 1학년 학생. 그가 과거에 그녀를 만났던 장소는 학교가 아닌 지하철 안에서였다.

‘나를 기억하려나? 만약 기억했다가는...정말 큰일인데...박수아도 모자라서 저 애까지 신경 써야 된다면...진짜 최악이야...’

성준과 그녀는 지하철 안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었다. 그녀에게는 정말 최악의 경험이었고, 성준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들킬지도 모르는 아찔한 경험이었다. 두 번 다시는 서로를 마주치기 싫었지만, 어째서 이런 우연이 있는 것일까. 성준은 연신 한숨을 내쉬면서 계속해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녀가 아닐 거라고, 자신이 잘못 봤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따라 이동했다. 그녀가 이동한 곳은 음악실이었다. 아마도 다음 교시 수업이 음악이었던 모양이다. 친구들하고 대화를 나누며 음악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멀리서 관찰하던 성준은 잠시 멈춰 서서 고민을 했다.

‘아직까진 확실하지 않단 말이야. 그렇다고 음악실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고...어쩌지...다음 쉬는 시간에 다시 한 번 확인해볼까?’

마음 같아서는 그녀를 붙잡고 물어보거나, 음악실 안으로 들어가서 얼굴만 확인하고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그녀를 붙잡았다가는 혹시라도 그녀가 성준을 알아보고선 그때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있는 일이었고, 1학년이 수업 받는 교실에 2학년이 들어갔다가는 모든 학생들의 집중을 받을 수도 있었다. 아쉽지만 그녀에 대한 미행은 잠시 중단해야만 했다.

잠시 미행을 중단을 해야 되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궁금증을 오늘 안에 풀지 못하면 또 다시 답답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그럴 수는 없었던 성준은 오늘 안에 끝장을 보기로 결심했다.

“저기, 혹시 너네 몇 반이야?”

“네? 아...1반이요.”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의 반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음악실로 들어가는 남학생 한 명을 붙잡아서 반을 알아낸 그는 이런 식으로 그녀의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수집하기로 했다. 뭔가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지만, 그에게는 너무나도 중요한 일이었다.

‘좋아, 한 번 해보자. 어려울 거 없잖아.’

그렇게 오늘 하루 그는 그녀의 스토커가 되기로 결심했다. 적어도 그녀가 자신이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한 여성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녀가 그 사람이 맞다면 굉장히 복잡해지겠지만, 적어도 미리 계획을 세울 수는 있으니 말이다.

결심을 내린 그는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빠르게 움직였다. 박수아가 신경 쓰였지만, 그녀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한 뒤,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지금은 박수아보다 이게 더 우선이었다.

‘음악실보다는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지?’

굳이 음악실 앞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1학년 1반 교실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곧 여러 명의 학생들이 교실 근처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 중에서 그는 한 명의 여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아. 머리 스타일도 그렇고, 키도 비슷하고, 전체적인 체형이나 느낌도 그때 그 여자가 맞아.’

성준은 전화를 하는 척하며 복도 창문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폈다. 얼굴은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었지만, 그 외에 다른 부분은 모두 그녀가 맞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촉까지도 그녀임을 말해주고 있었으니, 적어도 90%이상은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하필이면 같은 학교일 줄이야... 저 여자는 나를 알아볼까?’

그녀가 그때 그 사람이 맞다는 생각이 들자, 그의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제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될 것인가. 혹시라도 그녀가 성준을 알아볼 경우에는 더욱 골치 아플 것이다. 박수아도 모자라서 그녀까지 케어하기엔 몸과 머리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직까지 별 일 없는 거 보면, 신고를 안 했다는 뜻인데...너무 당황스러운 일이라서 섣불리 신고를 못하는 건가? 아니면 잠시 망설이는 걸까?’

그녀가 성준을 지나쳐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그녀는 성준이 있는 곳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자리에 앉았다. 성준은 교실 창문을 통해서 다음 수업을 준비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성격은 조용해보이네. 쉬는 시간에도 다음 수업을 준비하는 걸 보면, 공부도 잘 하는 것 같고.’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멀리서나마 그녀를 관찰하며 견제하는 것이었다. 아직 그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았던 그는 조금씩 그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했다. 적어도 그녀를 알아야만 계획을 세우는데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설마 내가 이런 짓을 하게 될 줄이야. 다른 사람이 보면, 엄청 이상하게 보이겠지? 어쩌면 벌써 여기 반에 내 소문이 퍼졌을 지도...딱 오늘까지만 철판 깔자.’

그렇게 성준은 학교 수업이 모두 끝나는 시간까지도 1학년 복도를 어슬렁거리며 그녀를 관찰했다. 그래도 그러한 노력을 통해서 그는 그녀에 대해서 나름 알 수 있게 된 부분이 있었다.

우선, 그녀의 이름이 ‘최한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매우 조용하고 공부에 열의가 많은 학생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그녀의 반 시간표를 통해서 자신의 반과 체육 수업 시간이 겹치지 않다는 점과, 그녀의 이동수업 시간 역시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를 통해서 그는 최대한 그녀와 마주치지 않는 전략을 세울 생각이었다.

‘일단은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다행히 수업은 겹치는 게 없으니까 안심이네. 성격상 쉬는 시간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거나, 점심시간에 운동장으로 나올 타입도 아니니까 마주칠 일은 거의 없을 거야. 집도 우리 집이랑은 반대쪽이라 다행이다. 앞으로 매점 이용만 조심하면 되겠어.’

다행스럽게도 많은 부분에서 성준이 그녀와 학교에서 마주칠 확률이 없어보였다. 그녀가 앞으로 신고를 할지, 그냥 넘어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학교에서 마주쳐서 낭패를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다행이다...정말 다행이야...앞으로는 진짜 조심해야겠어. 빌어먹을, 요즘 따라 발기가 지나치게 잘 된다니까...’

그녀와 마주칠 확률이 거의 없다는 결론이 나오자, 그제야 성준은 안심을 할 수 있었다. 오후 수업 내내 그의 마음과 머리를 괴롭히던 것들이 어느 정소 해소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가 앞으로는 정말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무슨 일 있는 거야?”

그렇게 모든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 박수아가 성준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녀는 오전 동안은 성준과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지만, 오후부터는 갑자기 달라진 그의 모습과 행동에 걱정이 많이 되었던 모양이다.

“아니야, 조금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는데, 이제 다 해결됐어.”

“정말? 다행이네.”

“응, 걱정해줘서 고마워.”

성준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물론, 속마음은 전혀 달랐지만, 겉으로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래...그럼, 다음에 보자.”

“응, 내일 봐.”

하지만 웬일인지, 그녀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후 동안 쉬는 시간마다 핑계를 대면서 떨어져 있어서 그런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표정이 살짝 신경 쓰였지만, 성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그녀야 매일 보는 상대이기에 내일 기분을 풀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지고 성준은 곧장 집을 향해 걸어갔다. 혹시라도 최한결이 근처에 있지 않을까 상당히 날카로운 신경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걸었지만, 역시나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집에 무사히 들어가면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무사히 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기 직전, 그는 뜬금없는 사람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바로 그의 학교, 보건 선생님이었다.

“쌤? 여긴 왜...?”

“왜긴, 내가 내 집 가는데, 무슨 문제 있어?”

“아...설마...진짜로 여기로 이사 온 거예요?”

“그럼, 내가 너한테 거짓말했다고 생각한 거야? 너무하네.”

성준의 보건 선생님, 유은정은 오늘 성준의 윗집으로 이사를 왔다고 말했다. 이제 정말 그녀와 이웃으로 지내야 될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었다.

“하...학교는 왜 이렇게 일찍 끝났어요? 벌써 퇴근해도 되는 거예요?”

“오늘 이사라고 조금 일찍 왔지. 그런데 지금 너무 못마땅한 표정 짓고 있는 거 알아?”

“아니...아무튼...이웃이네요, 이젠.”

“후훗, 그런 의미로 오늘 우리 집에 초대할게.”

“...네? 저는 괜찮은데...”

“감히 내 초대를 거절하는 거야? 절대 안 돼.”

성준과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녀가 그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고 말했다. 성준의 집이 있는 5층에서 문이 열렸지만, 그녀는 다짜고짜 성준에게 팔짱을 끼고는 내리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대로 엘리베이터는 6층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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