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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과외선생과 제자 관계를 야하다고 표현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아무튼 쌤의 장난이 아니라 단순 해프닝이라 다행이다.’
오해가 풀리면서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자신의 짐을 챙긴 이소영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하던 일을 계속 했고, 성준 역시 그녀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크게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성준은 남은 짐들을 마저 정리했고, 그렇게 그가 맡은 일을 무사히 끝낼 수 있었다.
성준이 이삿짐을 정리하는 사이, 유은정은 여전히 주방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그녀가 심혈을 기울인 작품은 성준이 일을 마치자마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완성이 되었다. 그녀가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빵과 쿠키였다.
“수고했어. 준이 덕분에 금방 끝나겠다. 얼른 와서 먹어.”
“갑자기 무슨 쿠키에요?”
“이사 왔으니까 이웃들한테 선물 돌려야지.”
“요즘에 그런 게 어딨어요. 굳이 안 하셔도 되는데...”
“준이,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아직까지도 은근히 이런 게 먹힌다고.”
그녀가 빵과 쿠키를 만든 이유는 이사 온 기념으로 사람들에게 선물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예쁜 상자와 포장지, 리본까지 준비한 것으로 봐서는 나름 정성이 느껴졌다. 특히나 쿠키는 꽤 맛이 있는 편이었다.
“맛은 어때? 내가 원래 이런 건 영 소질이 없어서.”
“나쁘지 않은데요? 이 정도면 괜찮겠어요.”
“정말? 다행이다. 소영아, 너도 먹어봐.”
쿠키와 빵이 완성되면서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유은정은 계속해서 중간 중간 오븐에서 구워지는 쿠키와 빵을 살폈고, 그 덕에 성준과 이소영은 굉장히 어색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게 되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지만...엄청 민망하네...차라리 부끄러워하지 않았더라면 자연스럽게 대할 수 있을 텐데, 우리 쌤하고는 조금 다른 스타일인가보다.’
이소영은 생각 이상으로 굉장히 민망해하는 눈치를 보였다. 처음 봤을 때 느껴지던 그녀의 첫인상하고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
사실,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 자신의 은밀한 물건들을 모두 확인했고,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던 자신의 직업, 특히나 야설작가라는 것이 대놓고 공개되었으며, 더군다나 앨범에 있는 누드 사진까지 봤다는 사실에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상대는 고작 18살의 고등학생이었지만, 창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너는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냐. 처음 만났을 때는 다짜고짜 과외 선생이랑 제자 관계가 야하다느니, 이상한 소리나 해댔으면서.”
“아니...그거랑은 다르니까...뭔가 내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 기분이야.”
“프라이버시는 무슨...내가 얘 비밀 하나 가르쳐줄까? 섹스 칼럼니스트에다가 야설 작가라니까 뭔가 대단해 보이지? 그런데 속은 그냥 텅텅 비어있어. 이론만 빠삭하고 경험은 하나도 없거든.”
하지만 그녀가 그럴수록 유은정은 더욱 그녀를 괴롭혔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를 참을 수 없었던 유은정은 장난을 치면서 그녀에 대해서 더한 이야기를 오픈했다. 그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소영을 더욱 자극시키고 있다는 점은 확실했다.
“야!! 그런 이야기를 하면 어떡해!! 그리고 내가 경험이 왜 없어! 나, 나도...경험...이, 있어!”
“네가 경험이 있다고? 에이, 말도 안 돼!”
“정말이라고!! 나도 경험 있어!”
“얘가 고등학생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네.”
“무, 무슨 소리야! 네가 먼저 해놓고선!!”
이소영이 유은정에 말에 더욱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바락바락 큰 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유은정은 매우 태연한 표정으로 오히려 그녀를 나무랐다. 한 눈에 봐도 둘은 상당히 가깝고 친한 사이로 보였다.
‘쌤은 여전하시구나. 아직도 어린애 같은 면이 있으시네...’
성준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바라볼 뿐이었다. 처음에는 자꾸만 이소영을 놀리는 유은정을 말려볼까도 싶었지만, 바로 생각을 접었다. 애초에 두 사람에 대해서 그는 관심조차 없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저...이제 할 일도 다 했으니까 저는 이만 가도 되겠죠?”
두 사람의 티격태격 대화가 끝나갈 때쯤 적절한 타이밍에 성준이 말했다. 그는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었다.
“벌써? 온 김에 저녁 먹고 가. 먹고 싶은 거 말하면 우리가 사줄게.”
“아니에요. 밥은 집에서 먹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어쩌면 누나가 집에 있을 지도 몰라서.”
“하은이 언니?”
“아마도요? 제발 저희 집에 간다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으으, 당장이라도 가서 인사드리고 싶은데, 보다시피 할 일이 아직 남아서...어차피 주말쯤에 만나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야겠다.”
유은정은 자신의 은인인 성하은에게 인사를 하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아직 남아있는 쿠키와 빵이 많았으며, 이삿짐도 다 정리하지 못했다. 아쉽지만 이대로 성준을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으응, 다음에 봐. 아, 이거 가져가고!”
“고마워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렇게 성준은 그녀에게 받은 쿠키와 빵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대략 2시간이라는 시간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뭔가 기운은 단숨에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아직 성준에게 유은정은 어려운 존재였다.
“어? 누나?”
“준이 왔구나. 오늘은 조금 늦었네.”
집에 돌아간 성준은 문을 열자마자 누군가 집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굳이 직접 확인하기도 전에 신발장 앞에 놓인 구두와 함께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서 그는 누나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도 집에서 자고 갈 거야?”
“왜? 누나가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되는 거야?”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밥 먹었어?”
“아직 안 먹었어.”
“그럼, 같이 먹자. 씻고 와.”
“...으응...”
주방으로 이동하자 역시나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분주히 요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직접 요리하는 모습이 오랜만이었던 성준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표정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오늘도 남자친구랑 싸운 건가? 안 그래도 힘들 텐데, 나까지 신경 쓰게 만들지 말자.’
그녀는 상당히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 이유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었던 성준은 최대한 그녀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곧장 샤워실로 향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만큼은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았던 그였다.
“다 씻었으면 얼른 앉아.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로만 차려봤어.”
“아...으응, 고마워. 맛있게 먹을게.”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식탁 위에 차려진 수많은 반찬들이 눈에 들어왔다. 성준이 지금까지 그녀와 밥을 먹으면서 이 정도로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먹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혹시 오늘이 무슨 날인 걸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무슨 날이야?”
“아니, 왜?”
“그냥...우리 둘만 먹는데 너무 반찬이 많아서.”
“우리는 이렇게 먹으면 안 되는 거야?”
“아니...그런 건 아니지만...맛있게 먹을게...”
더군다나 그녀의 말투는 여전히 차가움 그 자체였다. 성준이 최대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했지만,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어색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성준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밥을 먹었고, 성준은 힐끔 힐끔 그녀의 눈치를 보면서 젓가락질을 했다. 맛있는 음식들이 식탁 가득 놓여있었지만, 정작 그는 목구멍으로 음식들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저...누나?”
계속 이런 식으로 저녁 식사를 할 수는 없었다. 성준은 용기내서 그녀를 불렀다.
“왜?”
“혹시...무슨 일 있는 거야?”
“너는 누나가 무슨 일이 있었으면 좋겠어?”
“아니...그게 아니라...평상시 누나랑은 좀 달라보여서...”
“별 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용기를 냈지만 역시나 돌아오는 건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춘다면 애초에 용기를 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준은 계속해서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원래 여자란 본인이 원하는 질문이 나오기까지 계속해서 마음을 두드려야만 한다.
“혹시 내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 게 있다면 솔직하게 말해줘.”
“그런 거 아니라니까. 제발 조용히 밥이나 먹어줄래?”
“누나가 이러는데 내가 어떻게 밥을 먹을 수가 있어. 누나 제발...무슨 일 있는 거지?”
“하...진짜...”
성준이 끊임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차가운 말투로 성준의 말을 싹 잘라내던 그녀는 중간부터는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성준이 계속해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말을 하자,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눈을 감고 잠시 고민을 했다. 성준의 계획이 어느 정도 먹혀 들어간 듯 보였다.
“그냥...요즘 여러모로 고민이 많아서 그런 거야...결혼도 그렇고, 하영이 일도 그렇고, 아빠나 너도 걱정되고...”
그 상태로 약 5분 정도를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눈을 뜨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까진 그녀가 이러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고 있기는 했다.
“누나 혼자서 너무 많은 짐을 짊어지고 있었구나. 미안해...이럴수록 내가 도움이 되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하...누구 탓을 하는 게 아니야...그냥...요즘 많이 힘드네...”
그녀의 입에서 힘들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언제였던가. 성준은 처음 보는 그녀의 모습에 속으로 크게 놀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가족들 앞에서는 내색을 하지 않던 그녀가 아니었던가. 얼마나 힘들었으면 이런 이야기를 직접 꺼내는 것일지, 그는 너무나도 마음이 쓰려왔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작은 거라도 누나를 돕고 싶은데...”
“있잖아, 준아.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나보다는 너 자신을 더 챙겼으면 좋겠어. 그게 준이, 네가 나를 도와주는 유일한 방법이야.”
“...으응...그렇지...”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 내가 하는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어디까지나 준이를 위한 질문이니까,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줘.”
하지만 그녀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을 떠올리기도 전에 그녀가 갑자기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지금부터가 그녀가 할 진짜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어떤...질문인데...?”
성준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질문에서 두려움을 느꼈다. 고작 질문일 뿐이었고, 아직 그녀의 질문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이 떨려왔다.
“어젯밤에 지은이랑 무슨 얘기 했어?”
그리고 그녀의 질문을 듣는 순간, 성준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본능이 옳았음을 말이다. 그녀의 질문은 상당히 날카롭게 날아왔고, 그대로 성준의 가슴에 박히고 말았다.
‘왜 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설마...어제 정말로 소리를 전부 들었던 건가...’
어젯밤에 성준은 누나 앞에서 신지은과 따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분명히 그녀가 잠든 사이에 신지은과 성준이 나눈 뜨거운 대화를 들었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어제는 왜 아무 말도 없었지? 그 소리를 들었더라면, 누나 성격에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무엇보다 무슨 얘기를 했냐고 묻는 것도 뭔가 이상해. 아직 자신의 생각에 확신이 없다는 뜻인가?’
성준은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면서 어제의 일들을 떠올렸다. 이 상황에서 자칫 잘못 대답했다가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는 최대한 그녀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