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능력자 -->
집에서 나온 성준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앞으로 자신이 지낼만한 곳을 고민해보았다. 현재 누나의 상태를 보아하니, 적어도 며칠 동안은 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한 당분간은 누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인생 참...18살 되어서 처음으로 가출을 해보...아니, 가출이 아니지. 내 발로 나온 게 아니니까. 아무튼 당분간 어디서 지내야 되나...‘
시원한 레몬에이드를 벌컥벌컥 들이키면서 그는 여러 가지 장소들을 고민했다. 이런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원망스러웠지만, 이미 벌어진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것도 자기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상황이었기에 그는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흐음...아무리 집을 나왔어도 학교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데...’
고민하던 성준의 눈에 의자 위에 올려있는 교복이 눈에 들어왔다. 집에서 쫓겨나면서도 지갑과 함께 교복이랑 가방을 챙겨 나온 그였다. 나중에 헌터부대를 위해서는 적어도 학교만큼은 꾸준히 다녀야만 했기에 밖에서 지내더라도 최대한 학교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아야만 했다.
그렇다면 어디가 가장 적합한 곳일까. 고민을 하던 그는 이내 누군가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가 전화를 건 사람은 그의 친한 친구인 ‘이강성’이었다.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때마침 그의 부모님과 형이 기이한 현상으로 부산에 내려간 상황이었기에 단기간동안 머물기 가장 적합한 곳이 아닐까 싶었다.
[미안한데, 조금 힘들 것 같아. 내일 학교 끝나자마자 부모님 만나러 부산 내려갈 것 같거든.]
“아, 그래? 으음...오늘은 괜찮은 거야?”
[사실, 오늘도 조금 그러네. 내일 부산 내려가는 것 때문에 이따가 고모가 잠깐 집에 오시기로 하셔서...]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이강성네 집은 불가능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주말까지 그의 집을 이용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리스트에서 그의 집을 제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설마 가출했냐?]
“가출은 무슨...그냥 어쩌다보니까 잠시 다른 곳에서 지내야만 해서...”
[그게 가출이지. 아무튼 이번 주는 안 될 것 같고, 혹시나 다음 주에도 가출 상태이면, 말해줘. 다음 주부터는 얼마든지 있어도 괜찮으니까. 나야, 집에 부려먹을 친구놈 하나 있으면 편하고 좋지.]
“그래, 알았다. 필요하면 또 연락할게.”
가장 좋은 찬스였던 이강성 찬스를 날려버리자, 성준은 아쉬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입 안 가득 들어오는 레몬에이드에서 갑자기 쓴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젠장, 여기만큼은 무조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하...갑자기 엄청 꼬이는구나...적어도 주말까지는 다른 곳에서 버텨야 된다는 건데...어디가 좋을까...’
전화를 끊은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지갑을 살폈다. 현재 남아있는 현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나에게 받은 체크카드가 있었지만, 내역이 전부 누나의 폰으로 전송이 되었기에 이걸 사용할 수는 없었다. 자존심도 자존심이었지만, 잘못을 저질러서 집에서 쫓겨난 마당에 누나 카드를 이용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찜질방은 로비에 사람이 있어서 이용불가고...무인텔은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가격이 너무 부담스러워서 문제고...역시 친구 찬스를 이용해야 되는 건가? 하지만 누구를...하아...’
남아있는 돈이 얼마 없었기에 그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주말이라면 모를까, 목요일인 오늘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친구네 집에서 잠을 자는 것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싫어하는 성격이었던 성준이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힘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가 처음에 작성했던 리스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 이름 위에 X표시게 늘어났다. 그리고 이제 남은 사람은 총 3명의 사람이었다.
‘박수아는...힘들겠지...?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내가 좀 꺼림칙해서...’
남은 3명의 사람 중 박수아는 가장 최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성준을 좋아하고 있는 박수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도와주겠지만, 성준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녀에게 한 가지 약속을 더 잡히는 꼴이 될 것이다. 그것만큼은 성준은 차마 용납을 할 수 없었기에 그녀의 이름 위에도 X표시를 했다.
‘그리고 보건쌤은...으음...여기는 정말 마지막에 선택해야 될 곳이지. 그렇다면 남은 곳은 여기뿐인가...’
이제 남은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그 중 하나는 보건쌤이었다. 성준의 집 바로 위층에 사는 그녀는 같이 사는 룸메이트가 있었지만, 성준의 부탁이라면 들어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 중 하나였다. 다만, 문제는 그녀의 장난끼 넘치는 성격이랑 성준의 누나랑 친하다는 점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자 성준은 절로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건쌤의 이름 위에 세모 표시를 한 성준은 마지막 남은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이름을 바라보며 크게 한숨을 내쉰 그는 마지막 남은 레몬에이드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여기밖에 없는 건가. 어쩔 수 없지...’
카페에서 나온 그는 마지막 이름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이동했다. 이제 그가 기댈 곳은 여기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믿고 있었다. 이 사람이면 무조건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기에 전화도 없이 불쑥 찾아간 것이었다.
‘많이 놀라겠지? 그래도 이해해줄거야, 분명히...’
그 사람의 집 앞에 도착한 그가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구세요, 라는 말과 함께 철컥 문이 열렸다.
“어머, 준아?”
“...죄송해요, 누나...”
문이 열리고 등장한 사람은 성준의 아파트 505호에 사는 하서윤이었다. 그녀는 굉장히 놀란 표정으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특히나 성준의 손에 들려있는 교복과 가방을 보자마자, 그녀는 대략적으로 그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눈치 챌 수 있었다.
“설마...내가 생각하는 그건 아니지?”
“...아무래도...맞는 것 같은데요...?”
“일단 안으로 들어와.”
성준이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굉장히 민망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아무리 가족만큼 편하게 대할 수 있는 그녀라고 해도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자리에 앉은 성준에게 그녀가 차를 한 잔 건네주면서 물었다. 성준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사실을 얘기해주었다. 물론, 그의 능력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말할 수 없었기에 대략적인 내용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게 되었다는 큰 틀만을 말해주었다.
“누나하고 싸웠다고? 도대체 얼마나 크게 싸우면 집까지 쫓겨날 수가 있는 건데?”
“그 부분은...죄송해요...정확한 이야기는 말씀드릴 수가 없어서...”
“집안...문제인 거야?”
“뭐...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아무튼 제가 잘못한 일이긴 해요. 고작 18살인 미성년자 주제에 문제를 혼자서 해결해보겠다고 덤볐으니...다 제 탓이죠...”
“그 문제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가족들에게 말하지 않은 부분은 준이가 잘못한 것 같아. 하지만 어디까지나 준이도 해결해보기 위해서 그런 거니까...모든 게 준이 탓이라고 생각하진 않아. 의도와는 다르게 일이 꼬여버렸다는 점이 문제겠지.”
그녀는 매우 진지하게 성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성준의 이야기에 핵심 내용이 쏙쏙 빠져있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최선을 다해서 성준을 위로해주었다. 그 점이 성준에게는 정말 마음깊이 와 닿을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어떻게든 빨리 일이 해결되어야 할 텐데...걱정이네요...”
“가족이고, 누나니까 시간이 지나면 준이 마음을 이해해줄거야. 물론, 시간은 조금 걸릴 수 있겠지. 누나 입장에서는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일 테니까.”
“역시 시간이 문제겠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누나가 저를 더 이상 못 믿으면 어떡하죠?”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 그렇잖아. 한 사람의 믿음을 얻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한 번의 실수만으로도 그동안 쌓았던 신뢰를 단숨에 잃기도 해. 앞으로 누나에게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해야 될 거야. 시간이 흐른다고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길 기대하기 보다는 앞으로 하나씩 노력을 해야겠지.”
“그렇군요. 역시 누나를 찾아오길 잘 한 것 같아요.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워요.”
지금까지는 대부분 성준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위로를 해주었더라면, 지금은 서로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이를 통해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도움은 무슨. 그냥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그러면 당분간은 집에 못 들어가는 거야?”
“가출이 아니라 쫓겨났으니까...아마도 그러겠죠? 지금 당장은 저도 누나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마주보면서 지낼 상황이 아니니까요.”
“그래도 최대한 빨리 집에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너무 오래 나와 있는 것도 두 사람한테 좋지 않을 것 같은데...”
집을 나온 이유와 그에 대한 위로가 끝나고 두 사람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딱히 성준에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그는 누나가 조금이라도 감정이 풀릴 때까지 밖에서 지내다가 다시 들어갈 생각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다음 주 정도에는 다시 들어갈 생각이에요.”
“다음주? 다음주면 조금 길지 않을까?”
“중간에 주말이 껴있어서 적어도 주말 이후에는 집에 들어가야 되지 않을까 싶어요. 더군다나 내일은 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동생이 오는 날이라서요.”
그는 적어도 주말 이후에나 다시 집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내일이면 중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그의 동생, 성하영이 집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워낙 활발하고 막나가는 성격의 그녀가 집으로 오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난감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적어도 누나와 자신의 감정이 어느 정도 풀린 뒤에 집에 들어가는 것은 선택했다.
“흐음, 그래. 준이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가 준이한테 집에 들어가라고 강요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니까.”
“미안해요. 갑자기 이렇게 찾아와서...처음에는 친구 집에서 머물 생각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친구가 주말에 부산을 내려가는 바람에 일이 꼬여버렸거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누나한테 왔어요. 죄송해요...딱 주말까지만 부탁드릴게요. 그 이후부터는 친구네서 지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밖에서 오래 지내는 만큼, 그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는 민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성준은 자신을 받아준 하서윤에게 너무나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편하다고 하더라도 이런 부탁은 쉽게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부탁을 들어준 그녀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괜찮아. 조금 많이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준이니까 괜찮아. 들키지만 않는다면 나야 아무 상관없지. 오히려 준이랑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어서 더 좋은걸?”
다행히 그녀는 성준의 부탁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를 들이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성준은 미성년자였다. 더군다나 기이한 현상까지 있었기에 그녀는 성준을 집에 머물게 하는 것이 그리 이상한 판단은 아니라 생각했다.
“고마워요, 정말. 누나가 없었으면 아직까지도 밖에서 헤매고 있었을 거예요.”
“하긴, 요즘에는 청소년이 하룻밤 머물 곳이 없긴 하지.”
“딱 주말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집보다는 조금 불편하겠지만, 최대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그러고 보니까 어느 방에서 지내면 좋을까...”
성준을 집에 받아주기로 결심한 그녀는 본격적으로 그와 어떻게 지낼지 고민을 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집은 성준이 사는 집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총 방이 3개가 있었으며, 그녀가 잠을 자고 직접 사용하는 방은 제일 큰 방이었다. 나머지 2개 중 하나는 그녀의 남편이 사용했던 물건들과 아기 용품들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었고, 나머지 방에는 옷들과 함께 온갖 잡동사니들이 가득 차있었다.
“저는 거실에서 자도 상관없어요.”
“아니야, 그럴 수는 없지. 거실은 뚫려 있어서 준이가 괜히 부담 느낄 수도 있잖아. 방에 혼자서 지내는 편이 훨씬 좋을 거야. 잠시만 기다려봐.”
성준은 그녀에게 신세를 지는 입장이기에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그가 집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최대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했다.
방 2개를 열심히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열심히 돌아다니면서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는 남편의 물건들과 아기용품을 옆방으로 치워서 성준이 지낼 곳을 마련했다. 남편의 물건과 아기용품을 치울 정도로 그녀는 성준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래도 되는 거예요? 굳이 저 때문에 이럴 필요는 없는데...저것들 전부 소중한 물건이잖아요.”
“에이, 버린 것도 아니고, 단지 옆방으로 치웠을 뿐이잖아. 나중에 다시 옮기면 돼. 그리고 생각해봤는데, 준이가 지금 집을 나오긴 했어도 엄연히 학생 신분이잖아. 그것도 헌터부대를 준비하고 있고. 조금 옛날 거긴 하지만, 남편이 공부한 책들로 공부도 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성준에게 내준 방은 과거에 그녀의 남편이 공부를 할 때 주로 사용했던 방이었다. 서재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그 방에는 책상과 함께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는데, 대부분이 헌터부대와 관련된 책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성준이 편하게 지내면서도 공부를 놓지 않길 바랐다.
“아...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그냥 방을 하나 내줬을 뿐인데, 뭐. 자, 그럼 주말까지 여기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줘.”
“네, 정말 고마워요.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정말 너무너무 감사해서 더 바랄 게 없네요.”
“아, 씻을 때는 미리 말해줬으면 좋겠어. 그거 말고는 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어.”
“네, 알았어요. 집 나오면 고생이라는데, 너무 편안하게 지내다가 들어갈 것 같네요.”
“후훗, 그래. 혹시 배고프진 않고?”
“아...지금은 괜찮은데...배고프면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그럴 수는 없지. 이따가 내가 간단하게 해줄게. 흐음...그러면 지금은 나 먼저 씻어도 괜찮겠지?”
“당연하죠.”
“그럼, 이따 봐.”
그녀는 성준에게 방을 내주고는 원래 자신의 할 일을 위해서 방을 빠져나왔다. 방에 혼자 남게 된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오늘 하루 동안 정말 많은 것을 경험한 그였다. 신지은의 임신에, 누나에게 엄청난 사실을 들키게 되었고, 결국 집까지 나와서 이곳에 이르게 되었다. 하루가 이토록 길었던 적이 있었을까. 그의 입에서는 자꾸만 한숨과 함께 헛웃음이 새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