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능력자 -->
“누나가 너무 감정적이라서 다른 얘기를 할 수가 없었어.”
“그럴 만도 하지.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두년놈 머리 끄댕이를 붙잡았을 텐데, 오히려 하은이는 침착한 거야.”
“하하...아무튼 어떻게 해야 될까?”
“지금 하은이 분위기는 어때?”
“글쎄...”
“글쎄...라니? 너 설마...집 나온 거야?”
“나왔다기보다는...쫓겨났다고 보는 게 맞겠지?”
성준은 이어서 신지은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신지은은 집에서 쫓겨났다는 성준에 말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다.
“정말로? 하은이가 자기 친동생을 집에서 쫓아냈다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으니까...눈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다고 바로 집을 나온 거야? 진짜 준이, 너도 참...하은이가 정말로 집을 나가라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을 텐데...”
그녀와 성하은은 10년 넘게 친구 사이로 지내고 있었기에 서로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하은은 함부로 그런 판단을 내리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때는...잘 모르겠어...누나 앞에서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될지 모르겠더라고.”
“혹시 역으로 하은이한테 맞받아친 건 아니지?”
“내가 그럴 리가...차라리 감정적으로 나왔으면 누나 입장에서는 나를 상대하기 더 편했겠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담담해지더라고. 그래서 무조건 누나 의견에 따르겠다고 말했어.”
“예상했던 반응이 안 나오니까 하은이가 많이 당황했구나.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던 거고.”
신지은은 성준의 간략한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준은 새삼스럽게 역시 어른의 내공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나저나 집 나왔으면, 지금은 어디서 지내고 있는데? 지낼 곳은 있는 거야?”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성준에게 물었다.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순간, 고민했다. 같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그녀였지만, 하서윤이라는 존재를 밝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라인에 사는 그녀 역시도 하서윤의 안 좋은 소문에 대해서 알고 있을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그...친구네서...친한 친구네 부모님이 헌터부대 소속 연구원이라서 두 분 다 부산에 내려가 계시거든.”
“그래도 지낼 곳은 있어서 다행이네. 그나저나 큰일이다. 하은이 상태를 알 수가 없으니...”
“일단, 우리가 같이 누나를 만나봐야 되지 않을까? 누나 화가 조금 풀렸을 때쯤에 찾아가서 최대한 용서를 구하고 설득을 시도해보는 게 가장 괜찮을 것 같은데...”
그녀에게 거짓말로 지내는 곳을 둘러댄 성준은 바로 한 가지 제안을 내놓았다. 그는 도저히 혼자서 누나를 상대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지은과 함께라면 충분히 누나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고, 누나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할 자신도 있었다.
“그건 당연히 그래야지. 어쨌든 우리가 잘못을 했고, 지금 하은이가 엄청나게 오해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혹시 내가 임신했다는 것도 말했어?”
“아니, 그건 아직 말 안했어. 어제는 누나가 너무 감정적인 상태라 설득 시도 자체를 안 했어. 조금은 진정된 다음에 같이 만나서 얘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래도 준이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제법 대처를 잘 했구나.”
“뭐...그 덕에 쫓겨나긴 했지만...”
“하은이도 임신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나중에 둘이 찾아가서 말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야. 물론, 그래도 우리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서는 사과를 해야겠지만...어쩌면 나는 몰라도 준이, 너만큼은 용서해주지 않을까?”
그녀는 성준의 제안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성준이 아직 자신의 임신 사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더욱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임신 사실은 두 사람의 섹스가 단순히 성욕 때문만이 아니라는 주장을 조금이나마 뒷받침 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만 용서받을 수는 없지. 어디까지나 내가 먼저 제안해서 발생한 일인데...”
“너는 제안만 했을 뿐이잖아. 그 제안을 승낙한 건 나야. 그리고 그 결과로 이렇게 내가 간절히 바라던 임신을 하게 되었고.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를 잃을 위기지만, 그래도 괜찮아. 임신한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하니까.”
“그래도...나 때문에 둘이 싸우는 건 싫은데...”
“모든 건 다 하은이 판단에 맡겨야지. 내가 아는 하은이라면, 결국에 우리를 용서해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우리가 얼마만큼 진심으로 사과를 하느냐에 달려있겠지.”
그녀는 최대한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 보였다. 뱃속에 있는 아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면서 좋은 방향으로 이끌었다.
“누나 말이 맞아. 결국, 우리가 만들어낸 문제니까 우리 손으로 해결해야겠지.”
“그래, 우리 관계를 최대한 비밀로 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이렇게 걸린 이상, 우리 손으로 해결해보자.”
“그래야지...”
“그럼, 언제가 좋을까?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괜찮아.”
“아...지금 당장은 힘들지 않을까? 어제 집을 나왔는데, 갑자기 오늘 찾아가면...누나 입장에서는 어쩌면 우리의 진심을 장난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성하은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하는 방법을 선택한 두 사람은 더욱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시기였는데, 바로 준비가 되어있는 신지은과 달리 성준은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더군다나 바로 어제 집을 나왔기에 오늘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나오지 말았어야지. 그거만큼은 완전한 준이 실수야.”
“미안...나도 그건 내 실수라고 생각해...”
“그러면 언제가 좋겠어? 하은이 상태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일단, 이번주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설마 다음주까지 미룰 생각이야?”
“다음주 월요일이나 화요일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주말은 너무 이른 것 같아서...”
“흐응...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데 그 전에 하은이가 나한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물론, 걔 성격에 먼저 말하기보다는 기다리는 쪽을 선택할 확률이 높겠지만.”
“그러길 바라야지. 아무튼 다음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
“그 전에 변동되는 사항 있으면 미리 말해주고. 나도 만약에 하은이한테 연락 오면 바로 알려줄게.”
“응, 알았어.”
성준은 이번주보다는 다음주에 결판을 짓고 싶어 했다. 성하은 뿐만 아니라 성준은 자신역시도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신지은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는 끝이 났다. 그녀는 성준과의 만남이 반갑고 즐거웠는지, 더 있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성준은 빠르게 하서윤네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마음의 휴식을 취하길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준의 씨로 임신을 한 신지은의 앞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하서윤의 옆이 훨씬 더 좋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렇게 신지은과 인사를 하고 먼저 카페에서 나온 성준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신지은가 동선이 겹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최대한 빠른 길로 아파트에 들어선 그는 단숨에 계단을 이용해서 5층을 올라갔다. 그리고는 잠시, 자신의 집이 있는 라인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서 하서윤네 집으로 들어갔다.
“준이 왔구나. 생각보단 조금 늦었네?”
“친구 좀 만나고 오느라고요.”
“학교에서는 별 일 없었고?”
“네, 그냥 평소랑 똑같았죠.”
“배는 안 고파? 내가 간단히 간식이라도 만들어줄까?”
“아니요, 괜찮아요.”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는 마치 학교간 아들을 맞이하는 부모처럼 성준을 대했다. 그녀의 그런 말들은 매일 듣는다면 다소 귀찮을 수 있겠지만, 오랜만에 들어보는 성준의 입장에서는 새삼스럽게 기분이 좋아질 수 있었다. 확실히 그에게 하서윤은 때로는 어머니 같은 존재가 되어주곤 했다.
“누나도 별 일 없었죠?”
“응, 나야 매번 똑같지.”
“다행이네요. 그럼, 저는...공부하러...”
“아, 그래.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고.”
“네, 이따 봐요.”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편하다고 하더라도 그녀는 남이었고, 심지어 현재 성준은 그녀에게 페를 끼치고 있는 입장이었다. 허락을 받았어도 타인의 집에서 생활하는 것이 썩 달갑지는 않았다. 특히나 자꾸만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하는 그녀였기에 성준은 최대한 부담을 주지 않고자 낮에는 방에 들어가 공부에만 전념하고자 했다.
그렇게 성준은 집에 오자마자 방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 오늘도 역시나 제대로 집중이 될 리는 없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에 몰입하고자 노력했다.
‘후우, 담배 하나 태우고 오면 딱 좋을 텐데, 그게 아쉽네. 남의 집에 머물면서 담배 냄새를 가지고 들어올 수는 없으니...’
공부를 시작한지 약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성준의 인내심은 슬슬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특히나 청소년임에도 흡연자였던 그는 오랜 시간 담배를 멀리하는 바람에 정신이 아찔해지기도 했다. 간혹 이렇게 집중이 안 될 때면 담배를 하나 태우면서 집중력을 끌어올리고는 했기에 오늘따라 담배가 더욱 그리운 그였다.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야겠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고심 끝에 그는 잠시 밖에 산책을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그녀의 저녁 식사까지는 1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에 10분 정도 바람을 쐬고 와서 마저 공부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결심을 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을 포착할 수 있었다.
‘벌써 저녁 준비를 하시는구나. 내가 도와줄 일은 없으려나?’
음식을 준비하는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혹시라도 자신이 도와줄 것이 없는지 살피기 위해 그녀에게 접근했다. 그는 바람을 쐬는 것도 좋았지만, 그녀를 도와서 같이 저녁을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필요한 거라도 있어?”
그녀가 주방으로 다가오는 성준의 모습에 방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매번 느끼는 것이었지만, 성준은 그녀의 다른 모습보다도 이렇게 요리를 하는 모습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뇨, 그냥...집중력이 좀 흐트러져서...”
“그래? 배고파서 그런가? 조금만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은데...과일이라도 먹을래?”
“잠깐 휴식 취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그나저나 벌써부터 저녁 준비하시는 거예요?”
“으응, 오늘은 조금 간단하게 차릴 생각이야. 그러니까 혹시라도 도와줄 생각이면 절대 그럴 필요 없어.”
“아...네...”
아쉽게도 그녀는 성준의 생각을 읽고 있었다. 성준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요리하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고, 이내 다시 생각을 고쳐 잠시 산책을 다녀오고자 했다.
“저...그럼, 잠깐 바람 좀 쐬고 와도 될까요? 간단히 산책이라도 하려고요.”
“산책? 집중력이 많이 떨어진 모양이구나.”
“제가 원래 공부하고 그리 친한 편이 아니라서 중간 중간 자주 쉬어야 되거든요...”
“그럴 수 있지. 더군다나 익숙지 않은 곳이라서 제대로 공부하기 어려울 거야. 흐응...그러면 차라리 이렇게 할까? 지금 공부는 여기까지 하고, 나랑 같이 산책 가자.”
“누나랑요?”
“나랑은 산책가기 싫은 거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그럴리가요. 당연히 누나랑 가면, 저야 좋죠.”
그녀에게 산책을 다녀와도 되냐고 물었던 성준은 반대로 그녀에게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당연히 예스를 외쳤다.
“헤, 좋다. 준이랑 오랜만에 산책 가는 것 같네?”
“그런데 저녁 먹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러면 이건 어때? 도시락을 싸는 거야.”
하지만 그녀의 산책 스케일은 성준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다. 그녀는 매우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도시락을 싸서 산책을 떠나자고 말했다. 단순히 바람을 쐬기 위해서 산책을 계획했던 게 순식간에 가족 나들이로 바뀌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