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능력자 -->
“독립영화가 블록버스터로 바뀐 기분인데요?”
“그냥...갑자기 준이랑 산책하고 싶어졌어.”
“뭐...저야 좋죠. 우리 같이 산책 가요.”
갑작스럽게 사이즈가 커져버린 산책에 성준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괜히 자신 때문에 밖에 나가길 싫어하는 그녀가 고생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으며 찬장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제가 도와드릴 건 없어요?”
“괜히 옆에서 방해하지 말고 비켜주세요.”
“원래 여행의 시작은 준비할 때부터잖아요. 여행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나랑 처음으로 하는 제법 큰 사이즈의 산책인데, 저도 시작부터 즐길 거리 좀 주시면 안 돼요?”
산책이 결정되고 성준은 공부를 머릿속에서 지운 뒤, 그녀의 옆을 서성거렸다. 그녀는 그런 성준이 걸리적거렸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소파에 가서 앉아있으라고 말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준이가 은근히 고집이 강한 편이구나.”
“그냥, 누나랑 같이 즐기고 싶은 거예요.”
“나는 짜잔하면서 공개하는 낙으로 요리하는 건데...”
“가끔씩 보면, 은근히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니까요.”
“치이, 아무튼 좋아, 그러면 이것만 도와줘. 딱 이것만이야.”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요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성준의 모습에 마지못해 한 가지 일을 시켰다. 성준은 그녀의 설명에 따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그녀를 도와줬고, 그렇게 두 사람의 도시락 준비는 금방 끝날 수 있었다.
도시락까지 완벽하게 싼 두 사람은 곧바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다. 가지고 온 옷이 딱 교복 한 벌뿐인 성준은 딱히 준비할 것은 없었지만, 그녀는 오늘따라 평소에 산책 가던 것과는 달리 많은 준비과정을 거쳤다. 평소에는 가벼운 옷차림 상태로 산책을 나섰지만, 오늘은 옷도 그렇고, 화장까지 할 정도로 예쁘게 꾸미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스케일이 갑자기 커졌다니까요. 화장까지 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온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했다. 매번 편안한 모습으로 성준을 맞이하던 그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정말로 예쁜 ‘여자’의 모습으로 성준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을 정도였다.
“화장하면 뭔가 좋은 곳에 놀러가는 기분이잖아. 그리고 여자한테 화장은 자신감이라고.”
“누나는 피부가 워낙 좋아서 굳이 안 해도 예쁘시잖아요. 그래도 화장하니까 조금 달라 보이긴 하네요. 예뻐요.”
“헤, 말이라도 고마워. 그럼, 이제 나가볼까?”
성준의 간단한 칭찬에 그녀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누가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아줌마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수 있겠는가. 지금 그녀는 누가 봐도 아름답고 순수한 소녀였다.
“버스나 지하철 타고 갈까요? 거리가 좀 될 것 같은데.”
“아니, 날씨도 좋으니까 그냥 걸어가자. 나는 그런 건 별로라...”
집을 나선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집근처에 위치한 공원이 아니었다. 그녀는 기왕 커진 스케일을 더욱 크게 만들고 싶었는지, 제대로 작정을 하고는 최근에 가장 유명하다고 소문이 난 공원을 가보자고 말했다. 거기까지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날씨도 상당히 좋았고, 성준 역시도 걷는 것을 좋아했기에 둘은 천천히 공원을 향해 걸어갔다.
“밤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멀리까지 걸어가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
“아직까진 사람들 많은 곳에 다니는 건 조금 두렵죠?”
“...조금은...그래도 이제 점점 괜찮아지고 있어. 더군다나 지금은 준이가 옆에 있으니까...”
공원을 향해 걸어가던 중에 그녀가 얘기했다. 그녀의 말에 성준은 그제야 그녀가 대인기피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평소에 워낙 편안하게 지냈던 사이였기에 가끔씩은 그 사실을 잊고는 했던 그였다.
“...손잡을래요?”
그런 그녀에게 성준이 조심스럽게 손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생각지도 못했던 성준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밝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손을 붙잡았다.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 같은 아줌마랑 손잡아도 괜찮겠어?”
“매번 그 소리...누나 손이 얼마나 부드러운데요.”
“...정말? 매일 집안일해서 엄청 거칠 텐데...”
“전혀요. 그리고 지금 누나가 어딜 봐서 아줌마에요.”
“그렇지만...혹시라도 친구들이 보면 이상하게 볼 수도 있잖아...”
“이상하게 보기보다는 부러워하지 않을까요? 저는 제 친구가 누나처럼 예쁜 여자랑 손잡고 가면 엄청 부러울 것 같은데...”
“아...”
“그러니까 그런 말은 이젠 하지마세요. 누나야말로 제가 부끄러운 건 아니죠?”
“에이...그럴 리가...나야 당연히 좋지...”
그녀만큼이나 성준 역시도 진심이었다. 그녀에게 손을 건넨 의도자체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대인기피증을 그나마 완화시키기 위함이었지만, 그녀와 손을 잡는 것 자체에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나 예쁜 여자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을 마다할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녀의 손은 매일 집안일을 하는 것치고는 정말 부드러웠고, 그녀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성준 역시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그러고 보니까 저 땀 냄새 나지 않아요?”
“으응? 전혀! 아무 냄새 안 나는데?”
손을 잡고 공원까지 걸어가던 두 사람은 이것저것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성준은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집에서 나오면서 입고 있었던 지금 옷이 상당히 오래 되었음을 말이다.
“집에서 나올 때 옷을 하나 더 챙겨올 걸 그랬어요. 딸랑 교복만 들고 오다니...”
“아...그러고 보니까 계속 이 옷만 입고 있었구나.”
“아직까진 날씨가 덥다보니까 이 옷만으로 버티기는 어려울 것 같네요. 내일은 친구한테 옷이라도 빌려야겠어요.”
다행히 아직까진 옷에서 냄새가 나진 않았지만, 성준은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집에서 적어도 주말까지는 보내게 될 텐데, 옷 하나로는 버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서 교복을 입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친구네 가서라도 옷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집에 있는 남편 옷이라도 줄까?”
“...네? 누나 남편...옷이요?”
“으응, 아직 많이 남아있으니까. 준이랑 체격도 비슷하고, 키도 그리 많이 차이나는 것은 아니니까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녀는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자신이 직접 옷을 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녀의 집에는 아직까지도 남편의 물건들이 많이 남아있었는데, 그 중에는 당연히 옷들도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 중에서 괜찮은 옷이 있으면 얼마든지 빌려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생전 성준과 비슷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기에 사이즈는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입어도...되는 거예요?”
“아무래도 죽은 사람 옷이라 조금...그런가...?”
“아...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라...남편 옷이면 누나한테 소중한...거잖아요.”
하지만 성준은 그녀의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은 사람의 옷을 입는 것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걸 믿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얼마든지 입을 수 있었다. 다만, 그녀의 남편이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소중한 물건이면 뭐해...어차피 더 이상 입을 사람도 없는데...”
“그런 소중한 물건을 제가 함부로 입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괜찮아. 그리고 사실, 이제 소중한 물건도 아니야. 그냥 버리기는 좀 그래서 보관해두고 있는 것뿐이니까. 사복보다는 군복을 입는 훨씬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보니까, 사복만큼은 될 수 있으면 값비싼 명품으로 입고 다녔었거든. 원하는 거 있으면 가져가도 괜찮아.”
“으음...집에 가면 한 번 생각해볼게요.”
“그래,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내가 빨아줄 테니까, 걱정 말고.”
현재 그녀에게 남편은 어떤 존재일까. 성준은 그녀가 가끔씩 남편 얘기를 할 때마다 그 부분이 가장 신경 쓰였다. 그녀는 아직도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도 잊지 못해서 그리워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마음이 답답해지는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우와, 저기 좀 봐! 이제 도착했나보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걸었을까, 두 사람은 드디어 원하던 공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공원은 작년에 조성된 공원으로 서울에서는 이제 꽤나 유명한 명소로 꼽히는 곳이었다. 특히나 야경이 예술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밤인데도 제법 사람이 많은 편이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사람이 제법 많네요.”
“그래도 멀리서만 봐도 너무 예쁘다.”
“그러게요. 전에 낮에 지나가면서 볼 때는 너무 인공적이라 좀 그랬는데, 밤에 보니까 확실히 다르네요.”
“이런 거 너무 오랜만이라서 은근히 떨리네. 밤에 쇼도 한다고 했는데, 어디에 자리에 잡는 게 좋을까?”
공원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인공트리들이 화려함과 웅장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에 넋을 잃고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성준은 그런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고는 사람들을 피해서 가장 좋은 자리로 그녀를 이끌었다.
“여기가 좋을 것 같은데요? 쇼도 잘 보일 것 같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그리 많지 않고.”
“그럴까? 걸어와서 그런지, 배도 고프다. 준이도 배고프지? 얼른 도시락부터 먹자.”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은 가지고 온 도시락을 펼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야외에서 먹는 밥은 오랜만이었던 성준은 눈으로도 입으로도 너무나도 큰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기분 좋다. 이런 기분 진짜 오랜만이야.”
그녀 역시도 지금 이 순간, 상당히 큰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 중이었다. 특히나 그녀에게는 이런 순간이 너무나도 오랜만이었다. 매번 집에서만 지내던 그녀에게 오늘은 상당히 특별한 날이었다.
“저도 이렇게 도시락 싸서 공원 오는 건 진짜 오랜만인 것 같아요. 그동안 이런 건 귀찮다고만 생각했는데, 막상 오니까 좋네요.”
“헤, 다행이다. 도시락은 어때?”
“완전 최고죠. 너무 맛있어요.”
오랜 시간을 걸어온 탓인지, 두 사람은 허겁지겁 도시락을 흡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도시락을 거의 다 먹었을 때쯤, 드디어 쇼가 시작되었다. 공원에 있는 조명이 전부 다 꺼지면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화려한 쇼가 시작되었고, 그 쇼는 두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런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성준까지도 입을 벌린 채로 감탄을 할 정도로 쇼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환상적이었다.
“이제 내 인생에서 이런 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쇼 중간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그리고 성준은 그녀의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말에 성준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넋을 잃은 채로 쇼를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행복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행복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만족스러웠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
그리고 순간적으로 성준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감정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들을 정리하기에는 그는 너무나도 어렸다. 단지 지금의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에게 심적으로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것과, 그녀와 함께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쇼가 끝나고 다시 공원이 밝아졌다. 사람들은 마치 영화관에서 엄청난 영화를 보고나오는 것처럼 미소를 짓고 있었고, 그녀도 성준도 상당히 밝은 표정을 한 채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때? 오길 잘 했지?”
“네, 진짜 좋았어요.”
“준이도 좋았다니까 다행이다. 솔직히 조금 걱정했었거든. 남자애들은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잖아.”
“저도 좋아해요. 그리고 어쩌면 누나랑 함께라서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요.”
“정말? 나도 준이랑 함께라서 더 좋았던 것 같아.”
그녀 다시 한 번 활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녀의 웃는 모습은 정말로 예쁘고 아름다웠다. 조금 전의 쇼만큼이나 감탄을 자아냈다. 성준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며, 새삼스럽게 그녀가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이 그녀를 좋아하게 된다면 과연 어떤 느낌일지 떠올려보았다.
========== 작품 후기 ==========
누나 이야기가 아직 제대로 수습되지 않아서 전개도 느리고 내용도 지루해진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ㅠㅠㅠㅠ 계획대로라면 소설 속 시간인 24일부터는 조금씩 빠르게 전개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만, 그 전까지는 조금 답답하고 지루할 수도 있겠네요..ㅠㅠ
그리고 신지은과의 첫관계에 비해서 주인공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지나치게 늘어지고 있는데, 앞으로는 지금보다는 빠르게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