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능력자 -->
‘말도 안 되는 일이겠지? 아무리 누나가 예쁘고, 착하고, 나하고 잘 맞는다고 하더라도 32살에다가 결혼까지 했으니까...나 같은 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거야.’
그렇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들을 접어버렸다. 그녀는 성준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이성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었다. 이성적으로 그녀를 바라보기에는 성준에게 그녀는 너무나도 먼 존재였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른 채, 그녀 같은 사람이 자신을 좋아해줄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슬슬 가야될 것 같아요. 더 있다가는 늦겠어요. 아무리 여기가 좋아도 집에 안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아쉽다...더 있고 싶지만 집에 가야겠지...?”
성준과 하서윤은 도시락을 먹은 뒤에도 계속해서 공원을 돌아다니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행복한 시간들은 늘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게 흘러가곤 했다. 두 사람이 이곳에 온지도 벌써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다음에 또 와요, 우리. 아니, 다음에는 여기 말고 다른 곳도 가요.”
“정말? 정말 그래도 괜찮아?”
“당연하죠. 누나가 괜찮다면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멀리는 힘들겠지만, 가까운 곳이라면 문제없을 거예요.”
“나 혼자서는 절대 못 왔을 텐데, 준이 덕분에 이런 곳도 와보고, 정말 좋아.”
“저도 누나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곳이 있었다는 걸 꿈에도 몰랐을 거예요.”
“오늘 너무너무 좋았어.”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만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성준은 그녀에게 다음에도 다시 놀러오자고 약속을 하며 애써 아쉬움을 눌렀고, 그렇게 두 사람은 행복한 여운을 만끽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
*
*
-성하은
성준과 하서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이, 성준의 누나 성하은은 그들과 정반대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성준이 없는 집안, 퇴근을 하고 돌아온 그녀는 쓸쓸함과 함께 절망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식탁 앞에 앉아 저녁을 먹었다.
‘하아...나가라고 했다고, 진짜 나갈 줄이야...나쁜 새끼...내가 그동안 자기한테 해준 게 얼만데...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현재 그녀의 머릿속은 성준의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다. 성준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었지만, 나가라고 했다고 바로 집을 나가버린 그에 대한 원망이 더욱 많았다.
‘차라리 미안하다고 애원이라도 했으면...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나쁜 놈...’
애초에 그녀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성준과 신지은이 무릎 꿇고 사과를 하고, 자신은 화를 내면서 그들에게 확실하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식시켜주는 것이 그녀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성준의 담담한 태도에 완전히 꼬여버렸고, 결론은 이렇게 텅 빈 집안에 쓸쓸하게 혼자만 남게 되었다.
‘지은이라도 찾아갈까...하지만 준이한테 들어서 이미 상황을 알고 있겠지? 아마 지은이도 내가 찾아올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괜히 연락했다가...또 나 혼자 바보가 될 수도 있잖아...하아...나 왜 이렇게 한심하지...’
혼자 남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자기 자신과 자신에게 벌어진 상황을 원망하는 것뿐이었다. 최근에 그녀가 여러 상황으로 받은 스트레스는 어마어마했고, 그것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를 갉아먹었다. 남들 앞에서 웬만해서는 힘들어하는 모습을 안 보이던 그녀가 최근 들어서 눈물이 많아진 것도 다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위잉 위잉 위잉
‘이 시간에 누구지? 혹시...준이인가?’
넘어가지 않는 밥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집어넣고 있던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댔다. 숟가락을 내려놓은 그녀는 두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는 소파에 올려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의 남자친구였다.
그녀의 남자친구가 이 시간에 왜 전화를 했을까. 최근 들어서 사이가 멀어진 두 사람은 퇴근을 해서도 연락을 자주하는 편은 아니었다. 하루에 두 번 정도 서로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었고, 그건 이미 오늘 끝낸 뒤였다.
그럼에도 지금 연락을 하는 것은 분명히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을 잘 알았던 그녀는 매우 긴장되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그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척하며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만해도 성준 때문에 울먹이던 그녀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는 적어도 남자친구 앞에서는 자신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으응, 집이지?]
“조금 전에 톡으로 집이라고 했잖아요.”
[아아, 그랬었지. 그게...으음...밥은 먹었고?]
“지금 먹고 있어요.”
[그렇구나. 별 일은 없고?]
침착하고 차분하게 전화를 받는 그녀와 달리 오히려 그녀의 남자친구는 뭔가 이상했다. 여자친구한테 하는 전화라고 하기에는 무언가가 굉장히 어색했다. 평상시 남자친구의 성격은 결코 이렇지 않았기에 그녀는 이를 통해서 그가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저한테 할 말 있어서 전화한 거 아니에요?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주세요. 지금 밥 먹어야 되니까요.”
[으응, 알았어. 그게...혹시 주말에 시간 될까?]
“주말에요? 주말 언제요?”
[내일이면 좋을 것 같은데...]
“내일...좋아요.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그녀의 말에 그는 바로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그가 그녀에게 전화를 한 이유는 다름아닌 내일 만나자는 것이었다. 연인 사이에 만나는 것이야 아무리 사이가 안 좋아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이토록 조심스러운 것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실은...그 사람이 좀 보자고 해서...]
“그, 그 사람이...저를요?”
여기서 두 사람이 말하는 그 사람은 전와이프를 말한다. 그렇다면 즉, 내일 성하은이 만나게 될 사람은 단순히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전와이프라는 셈이었다.
[아무래도...힘들겠지...?]
“아, 아니...그게...왜...그 사람이 저를 만나겠다는 건데요? 오빠가 만나보라고 한 거예요?”
[아니, 내가 그런 건 아니고...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하은이, 너를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아무래도 할 얘기가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저보고 그 사람이랑 직접 만나라고요?”
[꼭 그럴 필요는 없지. 미안...역시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구나.]
“하...안 그래도 힘들어죽겠는데...진짜 다들 너무하네요...”
성하은은 전와이프와 한 번 만나는게 어떻겠냐는 그의 말에 크게 속상했다. 아무리 전와이프가 두 사람의 결혼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더라도 이건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난 뒤에 만나도 자존심이 심하게 구겨질게 뻔한데, 당장 내일이라니...성하은의 입장에서는 자꾸만 한숨이 새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못들은 걸로 하자. 하은이가 거절했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 내가 알아서 잘 말 할 테니까, 그냥 없던 일로 하자.]
“됐어요. 이제 오빠 말도 안 믿을 거예요. 맨날 알아서 잘 해본다고 했으면서, 결국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잖아요.”
[미안해, 하은아...내가 또 실수를 했네...]
“하...미치겠네...좋아요, 한 번 만나볼게요. 더 이상 남아있는 자존심도 없으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 보죠. 내일 몇 시까지 가면 되는 건데요?”
굳이 당장 내일 만날 필요는 없었지만, 성하은은 걸어오는 싸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준비는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에게 남아있는 자존심은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남자친구와 성준으로부터 망가질 때로 망가진 그녀는 자신이 어디까지 떨어질지 두고 볼 생각이었다.
[마, 만난다고? 그래도 괜찮겠어?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는데...]
“그 여자가 만나자고 했다면서요? 굳이 피할 필요 없잖아요.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될 상대라면 지금 만날게요.”
[그래...알았어...그럼, 시간은 우리가 맞출게.]
“우리...요? 하...좋아요. 내일 점심시간에 봐요.”
[그래...저녁밥 맛있고 먹고...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주고...]
그것으로 그녀와 남자친구의 전화가 끝났다. 화가 단단히 난 성하은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의 눈에서는 또 다시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왜 자꾸 꼬여만 갈까...’
더 이상 저녁밥을 먹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없던 입맛이 뚝 떨어진 그녀는 그대로 눈물을 흘린 채, 한숨을 계속해서 내쉬면서 식탁을 정리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따뜻한 위로였지만,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모든 정리를 끝낸 그녀는 샤워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보았다. 어쩌다가 그녀의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일까. 이제는 한숨조차 내쉴 힘이 남아있지 않았던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이 악몽 같은 현실에서 깨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녀의 몸을 지배했다.
‘그동안 정말 힘들게 달려왔는데...오직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왜 나한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지...’
그녀의 삶은 고되다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힘겹고 고난의 연속이었다. 어릴 적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동생들의 어머니 역할을 대신해서 해주었고, 아버지가 사업에 망하면서 빚에 시달리자, 대학생 시절부터 알바를 하면서 가장 노릇도 담당하게 되었다. 당연히 그런 삶 속에서 그녀는 욕심을 부릴 수도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그녀에게는 능력이 많았다. 공부 머리가 좋아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좋은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체력도 뛰어나서 대학에서 공부와 알바를 병행해도 잔병치레조차 하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정서적으로 성숙하기까지 해서 지금까지 많은 탐욕도 없이, 우울증도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 덕인지 그녀는 주어진 환경에서 제법 많은 것을 이루게 되었다. 좋은 기업에 취업해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만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마음이 잘 맞는 좋은 남자친구를 만나게 되었으며, 가족들의 상황도 점점 더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 그녀의 삶은 탄탄대로를 걷는 일만 남은 셈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 상황들이 이상하게만치 다시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제적인 사정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주변 사람과 환경들이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혔다. 기이한 현상부터, 동생들의 일, 남자친구와 친한 친구 문제까지, 마치 그녀를 시험이라도 하듯 한꺼번에 몰아닥쳐 그녀를 나락에 빠트렸다. 과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안타깝게도 젊었을 적에 그녀와 달리 지금의 그녀는 상당히 지쳐있다는 점이었다.
‘이젠 너무 지쳤어...더 이상은...달릴 수가 없어...나도 쉬고 싶단 말이야...’
그녀는 여전히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나 그녀의 마음은 이미 망가질 때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 마음을 가지고 그녀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제는 그녀도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한 순간에 내 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을 다 잃었으니...내가 의지할 곳은 아무데도 없구나...’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의지할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삶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것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그녀의 삶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그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는 자꾸만 속 안에 쌓아두고 있던 감정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삑 삑 삑 띠리리 철컥
그때였다. 갑자기 도어락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누구일까. 이 시간에 집에 찾아오기로 예정된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그녀의 가족뿐이었다. 혹시 성준이 돌아온 것일까.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긴장된 표정으로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