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76화 (76/193)

<-- 임신 능력자 -->

“아씨, 짜증나. 엄청 무겁네. 오빠!!!!”

문이 열리고 그와 동시에 하이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들어온 사람은 성준이 아니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또 다른 동생, 성하영이었다. 그녀는 연신 툴툴거리면서 집에 오자마자 성준을 찾았다.

‘아...오늘 하영이 오는 날이었지...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었네...’

동생의 목소리에 성하은은 그제야 아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친구 일부터 성준의 일까지 너무 정신이 없었던 그녀는 오늘 기숙사 생활을 마치고 동생이 집에 돌아온다는 사실을 깜빡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영이 왔구나.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정신을 차린 성하은은 바로 현관문 앞으로 나가서 동생을 마중했다. 성하영은 엄청나게 많은 짐들을 끙끙거리면서 집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작은 키에 그녀가 이 많은 짐들을 어떻게 들고 왔을지 대단할 정도였다.

“뭐야, 왜 언니가 나와? 오빠는 어디 있어?”

힘겹게 집에 돌아온 성하영은 바로 오빠부터 찾았다. 성하은은 오랜만에 만나는 자신에게는 관심조차 없는 동생이 조금은 야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애초에 동생이 성준만을 따르고, 상당히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큰 실망 없이 그녀를 받아주었다.

“밥은 먹었어? 안 먹었으면 차려줄게. 아니면 배달이라도 시킬까?”

“밥은 당연히 먹고 왔지. 지금 너무 피곤해. 아무것도 하기 싫으니까 건들지 마.”

짐을 내려놓은 성하영은 짐을 풀거나 정리할 생각은 전혀 없이 바로 소파로 달려가 누웠다. 소파에 누운 상태로 오직 핸드폰만을 만지작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중학생 소녀의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언니는 왜 여기 있어? 설마 요즘 여기서 지내?”

그렇게 한참동안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성하은에게 물었다. 그녀가 가지고 온 짐들을 한쪽으로 놓아두고 있던 성하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대답없이 어색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딱 보니까 둘 중 하나겠네.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나 싸웠거나. 그렇게 서로 죽고 못 살 때는 언제고, 왜 그러실까?”

성하영은 성하은의 대답이나 어색한 표정을 보지도 않은 채 그녀의 상황을 때려 맞추었다. 동생의 말에 뜨끔한 성하은은 그저 아무 말 없이 다시 짐을 정리할 뿐이었다. 그녀가 오해를 하더라도 지금은 굳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거나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을 기분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 이후로 별다른 대화 없이 서로의 일을 했다. 동생의 짐을 대충 한곳으로 몰아 넣은 성하은은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했고, 성하영은 여전히 씻지도 않은 채로 소파에 누워서 핸드폰만을 들여다봤다.

“하아아암...피곤해. 씻기 귀찮은데, 그냥 잘까...? 어차피 내일 주말이니까 괜찮겠지?”

그렇게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조용하던 거실에 성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핸드폰만을 들여다보던 그녀는 이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굉장히 피곤한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성하영의 목소리에 성하은은 이어폰을 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라 혼잣말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성하은은 그녀의 말에 반응을 해주고자 했다. 그것이 언니이자, 가족의 의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씻고 자는 게 좋지 않을까? 화장한 건 지워야지...”

“하여튼 언니는...틈만 나면 잔소리야.”

“잔소리가 아니라...네 나이 때 피부 관리 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그래, 언니는 피부 좋아서 좋겠네. 나는 그냥 대충 살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너 진짜...언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치이, 그러는 언니는 나만 보면 맨날 잔소리부터 시작하면서...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좀 쉬게 해주면 안 되나...”

그렇지만 그녀의 말들은 전부 동생에게는 잔소리로 들렸던 모양이다. 성하영은 언니의 말에 입술을 삐죽이며 툴툴대더니 이내 다시 소파에 누워서 폰을 만지작거렸다. 나이가 무려 11살이나 차이가 났던지라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기에는 조금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오빠는 왜 안 와? 집에는 없는 것 같던데, 친구 만나러 간 거야?”

소파에 누운 성하영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번에는 정확히 성하은을 향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오히려 성하은이 반응을 할 수 없었다. 차마 그녀에게 성준이 집을 나갔다고 말하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왜 아무 말이 없어? 오빠 어디 갔냐고?”

“그게...”

“뭐야...왜 대답을 망설여? 오빠한테 무슨 일 생겼어?”

성하은이 섣불리 대답을 못하자, 성하영이 다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뭔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의 언니를 바라보았다. 그럴수록 성하은은 난감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설마 오빠랑 싸워서 집을 나갔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그, 그게...그러니까...”

“하...답답해. 됐어, 내가 직접 전화해서 물어봐야지.”

성하은이 계속해서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는 스스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통화음이 길게 울리더니, 이내 성준이 전화를 받았다.

“오빠, 지금 어디야?”

[아...지금...친구들이랑 있어...]

“오빠 집 나갔어? 혹시 언니랑 싸운 거야?”

성격이 급한 성하영은 바로 성준에게 본론을 꺼냈다. 성하영의 질문에 성준 당황한 듯 잠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왜 오빠도 대답이 없어? 보니까 둘이 크게 싸웠네. 무슨 일로 싸운 건데?”

[아...그게...그냥...어쩌다 보니까...하하...]

“무슨 일로 싸웠냐니까.”

[그냥...좀 안 좋은 일이 있었어.]

“나한테는 말하기 싫다는 거야? 하...아무튼 그러니까 언니랑 싸우긴 싸웠다는 거지? 그래서 오빠가 집을 나간 거고? 진짜 둘 다 참 답 없다.”

성하영은 굳이 성준이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아도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두 사람이 싸워서 한 명이 집을 나갔다는 부분이 매우 한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와 중에 성하은은 얌전히 서서 두 사람이 통화하는 내용을 엿 듣는 중이었다. 성준이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얘기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준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던 그녀였다.

“그래서 언제 들어올 건데? 오늘은 안 들어오는 거야?”

[당분간은...누나랑 잘 지내고 있어. 내가 없으니까 너라도 누나를 챙겨줘야지.]

“아씨...오빠는 아무리 싸웠다고 집을 나가? 오빠 없으면 나는 어떡하라고!”

[뭘 어떻게 해...알아서 지내야지. 내가 있다고 뭐가 달라지냐. 기숙사에서도 혼자서 잘 지냈잖아.]

“기숙사에서는 다른 애들이 있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잘 지내긴 뭘 잘 지내. 결국 쫓겨났는데. 언니랑 둘이서만 있으면 재미없단 말이야. 집에 오면 오빠랑 같이 하려고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도 잔뜩 가지고 왔는데...짜증나!”

성하영이 성준이 빨리 집에 돌아오길 바라는 이유는 언니와 오빠의 화해가 아니었다. 두 사람에 비해서 아직 철이 들지 않았던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우선이었다. 성준에 비해서 언니인 성하은 하고는 아직까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둘만 지내기에는 많은 불편함이 있을 것이라 그녀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성준은 지금 당장은 전혀 돌아갈 마음이 없었다. 안타깝지만 적어도 주말동안은 언니하고만 단둘이서 지내야 되는 그녀였다.

[아무튼 나는 바빠서 이만 끊는다. 누나랑 잘 지내고 있어.]

“고등학생이 유치하게 가출이나 하고! 흥!!”

[나중에 봐. 끊는다.]

그렇게 두 남매간의 전화 통화가 마무리 되었다. 전화를 통해서 왜 싸웠는지, 어쩌다가 나가는 선택까지 내리게 되었는지, 집을 나가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등등 중요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오빠가 당분간 집에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성하영은 씩씩거리면서 폰을 내려놓고 언니를 바라보았다.

“다 들었지? 대체 왜 싸운 건데?”

동생의 말에 성하은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차마 말해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그녀가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성하영이 그나마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신뢰하는 사람이 성준인데, 그것마저도 깨진다면 그녀가 지금보다도 훨씬 더 집밖으로 나돌 것임을 성하은은 알고 있었다.

“나한테 말해줄 수는 없다는 거야? 하...진짜 둘 다 답답하고 짜증나...”

“미안...나중에는 꼭 말해줄게.”

“아니, 그런데 잘못을 했어도 꼭 집을 나가야 되는 거야? 언니는 왜 오빠가 집 나가는데 안 말렸어? 세상에 오빠가 집을 나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네.”

“그러게...나도 설마 그럴 줄은...”

답답한 마음이 성하영을 괴롭혔지만, 그래도 그녀는 끝까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아무리 물어봐도 언니나 오빠가 말해주지 않을 것임을 알았던 그녀는 그저 이 상황에 짜증을 낼뿐이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짜증나는 일투성이야...하...피곤해...잠이나 자야겠다.”

“안 씻고 자려고? 화장은 지우고 자라니까...”

“아, 몰라. 씻을 힘도 없어. 내일 아침에 씻을게.”

“하영아...하아...”

짜증을 내던 성하영은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씻지도 않고 방으로 들어가는 동생에 모습에 잔소리를 하려던 성하은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을 해도 듣지도 않았기에 굳이 무리해서 힘을 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언니 동생 사이에 대화도 많이 주고받는다던데...나랑 하영이는 힘들겠지...’

성하은과 성하영은 평범한 자매들하고는 많이 달랐다. 나이 차이도 차이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애착이 형성되기에는 오랜 시간을 붙어있지 못했다. 그 점을 성하은 역시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녀에게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나도 빨리 자야겠다. 이대로는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아무 생각 말고 일단 자자...’

성하영이 방에 들어가고, 혼자 남게 된 그녀는 간단히 씻고 바로 잘 준비를 했다. 마음은 상당히 복잡한 상태였지만, 이것들을 정리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또한 당장 내일은 남자친구의 전와이프와의 만남을 앞두고 있었다. 적어도 잠을 푹 자서 체력을 비축해야만 스트레스에 적절히 대비를 할 수 있기에 그녀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렇게 그녀의 하루는 오늘도 슬픔과 외로움으로 끝이 났다.

*

*

*

-성준

공원에서 집에 돌아온 하서윤과 성준은 오랜만에 많은 시간을 걸었던 탓인지, 둘 다 상당히 지쳐있었다. 간신히 설거지를 끝내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완전히 녹초가 된 채로 소파에 앉아 TV를 감상했다. TV에서는 재미있는 예능이 방송 중이었지만, 두 사람의 눈꺼풀은 천근만근 서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엄청 피곤하네요. 우리가 거의 4시간은 넘게 걸었죠?”

“그러게...이제 겨우 12신데, 벌써 피곤하다.”

“그러게요. 이만 자야 될 것 같아요.”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성준은 잠을 청하고자 했다. 오늘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김에 같이 TV를 보면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자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있을만한 체력이 아니었다.

“그래, 그러자. 그나저나 옷은 괜찮아? 불편하진 않고?”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그녀가 물었다. 지금 성준이 입고 있는 옷을 그녀의 남편이 가지고 있던 옷이었다. 간단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였는데, 신기하게도 성준에게 딱 맞았다.

“네, 딱 좋아요. 그나저나 진짜 이걸 입어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괜찮다니까. 어차피 다 버릴 것들이야. 버릴 바에는 다른 사람이 입어주는 게 훨씬 좋지.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준이라면 더 좋고.”

처음에 성준은 이 옷을 입는데 많이 망설였다. 다른 사람의 옷을 입는 것도 조금 그랬지만, 그 사람이 그녀의 남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꾸만 그녀의 남편이 떠오르는 게 이상하게도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 옷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은 입을 게 없었다. 땀 냄새 나는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옷을 벗고 있을 수는 더욱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옷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였다.

“저는 먼저 들어갈게요. 잘 자고 내일봐요.”

“응, 잘 자.”

성준이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방에 들어갔다. 방에 들어간 그는 바로 이불 위에 지친 몸을 눕혔다. 눕자마자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곧 그의 머리와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또 다시 이곳에서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하루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새벽 3시. 갈증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그에게 또 다른 위기가 봉착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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