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79화 (7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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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다음날

토요일인 오늘은 성준이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데 굳이 억지로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던 성준은 아침 늦게까지 잠을 청했다. 피곤하기도 피곤했지만, 어제 있었던 일 때문에 차마 그녀를 마주하기가 두려웠던 그는 무려 11시가 넘어서야 거실로 나왔다. 거실로 나오자, 열심히 요가를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머, 준이 일어났구나.”

한창 요가를 하고 있던 그녀가 방에서 나오는 성준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요가를 하는 모습이 부끄러워서인지 그녀는 재빨리 요가매트를 정리하고는 성준에게 다가왔다. 성준은 혹시라도 그녀가 어제 일을 기억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보였다.

“어제는 잘 주무셨어요?”

“으응, 준이 덕분에. 계속 소파에서 잤으면 허리 아파서 오늘 아무것도 못 했을 거야.”

“혹시 허리 아파서 요가 하셨던 거예요?”

“아니, 그거 때문이라기보다는 원래 낮에 매일 하던 거라서...그나저나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봐. 내가 금방 밥 차려줄게.”

“아...제가 혼자 차려먹을게요.”

“아니야, 10분도 안 걸리니까 얼른 씻고 나와.”

요가하는 모습을 들켰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녀는 평소처럼 밝은 모습으로 성준을 대해주었다. 성준은 그런 그녀에게 지난밤에 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에 크게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자신도 평소와 다를 거 없이 그녀를 상대했다. 물론,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속이 쓰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제 일은 잊어야지...두 번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거야...1일1자위...어떻게든 성욕 조절을 해내고야 말겠어.’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 그는 찬물로 세수를 하면서 두 번 다시는 그녀에게 그런 마음을 품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이것으로 그녀에 대한 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은 전보다 훨씬 편안해질 수 있었다.

성준이 간단히 씻고 밖으로 나오자,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침을 먹었기에 혼자 먹는 밥이었지만, 그녀는 언제나처럼 최선을 다해서 식탁을 차렸다. 이렇게까지 정성이 들어갔는데, 어찌 맛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주말동안은 최대한 집 안에서 지내는 편이 좋겠지? 이제 여기서 지내는 것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아.’

성준이 이곳에서 지낸지 오늘이 벌써 3일 째이다. 밥을 먹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곳에서의 생활에 어색함이 많았던 그였지만, 이제는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지난밤에 그 편안함 때문에 일을 치를 뻔도 했지만 말이다.

'오늘은 밀린 공부나 좀 해야겠다. 그동안 너무 안 했으니까.'

주말 동안 그는 딱히 해야 될 일이 없었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없었고, 미리 계획해둔 일도 없었다. 그는 이 시간들을 이용해서 그동안 밀렸던 헌터부대 공부를 하거나 하서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준이는 주말동안 뭐 할 거야?”

하지만 그런 그의 생각을 읽었던 것인지, 그녀가 성준에게 물었다. 질문을 하는 그녀의 의도가 뻔히 드러났기에 성준은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을 해주었다.

“딱히 할 건 없어요. 그냥 누나랑 같이 집에 있어야죠.”

“정말? 다행이다.”

“왜요? 저랑 같이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요?”

“하고 싶다기보다는...준이가 도와줬으면 싶은 일이 있어서...”

“제가요? 어떤...?”

성준은 당연히 그녀가 같이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자는 말을 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무언가를 도와달라고 말했다. 산책이나 장은 과거에도 여러 번 했던 일이기에 굳이 도와달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일까.

“이, 이걸...전부 다요?”

“응, 너무 많은가? 나 혼자서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아서...”

“하하...아니에요...공짜로 밥도 얻어먹었고, 방까지 주셨으니까...몸으로라도 때워야죠, 뭐.”

그녀가 성준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한 것은 다름 아닌, 대청소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베란다와 방 하나에다가 온갖 잡동사니들을 쌓아두고 있었다. 아깝거나 나중에 사용할 물건들이라서 못 버린 게 아니라, 그녀의 힘으로는 차마 버리기가 어려웠고, 대인기피증 때문에 밖에 나가기를 두려워했기에 그대로 모아두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것들을 오늘, 성준을 통해서 전부 정리하고자 했다.

“미안...그치만 준이가 아니면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청소 업체한테 부탁하기에는 그 사람들이 집에 들어오는 게 좀 그렇기도 하고...”

“아니에요. 그동안 누나한테 일방적으로 받기만 했잖아요. 그것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고마워, 정말. 대신, 내가 청소 다 끝나면 맛있는 거 해줄게.”

“양이 꽤 많으니까 좀 빡세게 움직여야겠네요. 뭐부터 할까요?”

정리해야 될 물건들의 양에 성준은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그녀를 위한 일이었기에 두 팔 걷고 나서고자 했다. 이 일을 하고나면 오늘 공부는 조금 힘들어보였지만, 어차피 최근에 집중력이 좋았던 편도 아니었기에 차라리 그녀를 위한 일이 훨씬 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준과 하서윤의 대청소가 시작되었다. 그녀의 지시에 따라 성준은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치우고 치워도 끊임없이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중간 중간 의욕을 잃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녀와 함께였기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특히나 가끔씩 그녀가 물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줄 때면, 성준은 할머니가 읽어주는 동화를 듣는 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짓기도 했다.

“으읏차! 이제 거의 다 끝난 것 같은데요? 물건들이 없으니까 확실히 훨씬 더 깔끔하네요.”

“수고했어! 많이 힘들었지? 괜히 나 때문에 준이 몸살 나는 거 아닐지 모르겠네.”

대청소를 시작한지 벌써 약 6시간 정도가 흘렀다. 중간 중간 휴식도 취하고, 밥도 먹기도 했지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셈이었다. 그래도 깔끔한 방과 베란다의 모습을 보니, 성준과 하서윤은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상자는 뭐예요? 이것도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성준은 마지막으로 가장 구석에 위치하고 있던 상자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선물상자 느낌이 가득한 분홍색 상자는 안에 무언가 소중한 물건들이 들어있을 것만 같았다.

“상자? 무슨 상잔데? 안에 뭐라도 들어있어?”

“잠깐만요. 확인해볼게요, 제가.”

분홍색 상자는 크기도 제법 큰 편이었다. 상자를 집어든 성준은 바로 열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곧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나가 이런 취향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남편분 취향이겠죠?”

“으응? 무슨...소리야? 도대체 뭐가 들어있길...꺄아악!! 당장 내놔!!!”

상자 안에 들어있던 것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이었다. 세라복, 메이드복, 바니걸뿐만 아니라 굉장히 야릇한 모습의 속옷들이 들어있었는데, 그녀의 성격하고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그녀는 성준이 그 물건들을 들고 있는 것을 보자마자 달려와서 재빨리 등 뒤로 숨겼다.

“왜 이런 걸 여기에 보관한 거예요? 전혀 예상 못했던 물건이 나와서 당황했잖아요. 누나네 집에서 이런 옷들을 볼 줄이야...”

성준이 여전히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그녀는 성준의 놀리는듯한 반응에 얼굴이 붉어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렇지만 성준은 그런 그녀의 반응이 재밌었는지, 더욱 크게 웃었다.

“까, 깜빡했어...버린 줄 알았는데...거기 있었구나...”

“그럼, 이게 누나가 입었던 건 확실하다는 거네요.”

“옛날에...신혼 초에 입었던 거야...”

그 물건들은 심지어 그녀가 실제로 입었던 물건들이었다. 충분히 거짓말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이라고, 다른 용도로 구입한 것이라고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굳이 그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굉장히 부끄럽고 민망한 표정으로 애써 사실을 애기하는 모습이 성준의 눈에는 굉장히 귀엽게 보였다.

“신혼이라...뭔가 부럽네요.”

그리고 한 편으로는 새삼스럽게 그녀의 남편에게 질투심이 느껴졌다. 이렇게나 예쁘고 순수하고 착한 그녀에게 저런 옷을 입힐 정도라면, 두 사람의 사이가 어떤 사이였는지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으응? 뭐, 뭐가?”

“아니에요. 그럼, 이제 그것만 버리면 끝이네요. 어떻게 할까요? 버릴까요?”

왜 부럽냐고 물어보는 그녀의 말을 가볍게 넘긴 성준이 그녀에게 이 물건들을 어떻게 할지 물었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옷들의 수는 꽤 많아 보였다. 버리기에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당연히 버려야지...이제 쓸모도 없고...나는...이런 거 별로란 말이야...”

“역시 누나 취향이 아니라 남편분 취향이었군요.”

“그렇다기보다는...아무튼 이건 내가 버릴게! 준이는...이제 쉬어야지...”

그녀는 그 물건들을 전부 버리고자 했다. 이제는 그 옷들을 좋아해주는 남편도 없었고, 더 이상 입을 일도 없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아깝지 않아요? 보니까 속옷들도 많던데.”

“다...이상한 속옷들이란 말이야...”

“그래도 세라복이나 메이드복은...좀 아닌가...그런데 어떻게 버리시려고요? 괜히 이거 버리러갔다가 사람들하고 마주치면...좀 그렇지 않을까요? 그냥 제가 버릴게요.”

하지만 성준은 그녀가 이 물건들을 버리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녀의 소문이 썩 좋지 않은 편인데, 버리러가는 길에 사람들에게 그 물건들을 들켰다가는 최악이었다.

“그건 준이도 마찬가지잖아...내가 알아서 버릴게.”

“하긴...제가 그런 걸 들고 다니는 것도 이상하긴 하네요. 으음...그러면 이렇게 할까요? 누나한테는 필요 없지만, 혹시나 제 주변에 다른 사람들은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한 번 물어볼게요.”

그렇다고 성준이 직접 버리는 것도 모양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면 이 물건을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 끝에 그는 이 물건이 필요한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특히나 그가 그 생각을 하면서 떠올린 인물이 한 명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누구...?”

“이런 거 수집하고 보관하는 사람을 최근에 알게 되었거든요. 아, 물론 변태는 아니에요. 그냥 그런 쪽 일을 하는 사람이라...더군다나 여자이기도 하고요.”

그가 떠올린 인물은 유은정과 함께 사는 이소영이었다. 섹스 칼럼니스트이자, 야설 작가인 그녀라면 이 물건들을 고맙게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녀는 성인 용품들을 직접 보관하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

“세상에 진짜 별난 사람들 많거든요. 아무튼 이건 조금만 더 보관해주세요.”

“그래...버리는 것보단 낫겠지...아무튼 이 물건은 이제 잊고, 빨리 저녁 먹을 준비하자.”

“벌써요?”

“벌써라니, 이제 곧 저녁 7시라고. 얼른 밥 먹고 가볍게 산책 다녀오고 싶어.”

“오늘은 청소만 하다가 시간 다 갔네요. 알았어요, 여기만 마저 정리하고 바로 밥 먹어요.”

그녀는 성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억지로 힘들게 버리는 것보다는 그게 좋다고 판단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청소는 무사히 막을 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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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윤

청소를 모두 마치고 성준과 하서윤은 계획대로 저녁을 맛있게 먹은 뒤, 산책을 다녀왔다. 청소 때문에 굉장히 지친 몸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산책을 하니, 기분은 상쾌하고 좋았다. 특히나 오늘은 함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점에서 성준과 그녀 모두 만족할만한 하루가 되었다.

산책이 끝나고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바로 목욕을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오늘 하루, 몸 쓰는 일을 많이 한 덕에 몸은 온통 땀 냄새로 가득했다. 이런 날에는 샤워보다는 목욕을 하면서 피로를 푸는 게 좋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따뜻한 물이 가득한 욕조 안으로 그녀가 몸을 눕혔다. 물 안으로 몸을 맡기자, 온몸 가득히 퍼지는 따뜻함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스르르 눈이 감겼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두 명의 사람이 떠올랐다. 하나는 성준이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그녀의 전남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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