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신 능력자 -->
‘하...오늘 정말 제대로 꼬인 날이구나...아침에도 최악이었는데, 학교에서는 또 왜 하필이면 저 애랑 마주치는 건데!!’
그 여자를 발견한 성준은 그대로 얼어버렸다. 눈을 마주치기 전에 도망쳐야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결국, 그 여자와 그대로 눈을 마주쳐버렸고, 그는 굉장히 당황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픈 거야?”
그런 성준의 모습에, 박수아가 옆에서 물었다. 하지만 성준의 귀에는 박수아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아침에 하서윤과 눈을 마주쳤던 것처럼 온통 백지가 되어버린 상태였다.
‘어쩌지...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게 좋겠지...?’
그는 그녀와 마주쳤어도 모르는 척 하며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자꾸만 몸이 떨려왔으며, 얼굴은 당황했다고 글씨로 적혀있는 것보다도 못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도대체 그가 마주친 사람이 누구길래 이토록 두려움에 떠는 것일까.
‘날 기억할까...시간이 좀 흘렀으니까...기억 못할 수도 있겠지...? 그치만 나를 보면서 흠칫 놀란 것 같은데...아니겠지...? 아닐 거야...제발...’
성준이 마주친 사람은 과거에 그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던 인물이었다. 성준의 학교 후배이자, 성준에게 성추행을 당한 ‘최한결’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그녀는 성준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를 지나쳤다. 성준은 그저 그 여자가 지나갈 때까지 당황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나를 알아본다면 어떻게 될까...설마 신고하진 않겠지? 벌써 보름이 넘게 지났으니까, 잊었을 수도 있어. 딱 한 번 마주친, 그것도 밤에 본 얼굴을 아직도 기억할 수는 없을 거야. 그래, 그럴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자.’
최한결이 완전히 떠나고 난 뒤,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성준은 그대로 계단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적으로 너무 크게 긴장을 한 나머지, 기운이 다 빠져버린 모습이었다. 애써 합리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해보았지만, 불안감은 쉽게 떠나지 않았다.
“괜찮아? 많이 안 좋아 보여...”
“으응...그냥 좀...갑자기 몸이 안 좋네...”
“식은 땀까지 흘리고...”
“그러게...갑자기 왜 그러지...”
박수아가 옆에 앉아서 그를 걱정해주었다. 성준은 애써 웃으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방금 그 여자 때문이야? 그 여자...1학년이던데...너랑 아는 사이야?”
“아니...그럴 리가...모르는 여자야. 그 여자는 아무 상관없어. 그냥...몸이 안 좋아서 그런 거야.”
성준은 그녀에게 최한결에 대해서 말해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만큼은 박수아가 자신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있긴 했지만, 최한결의 일까지 공유할 필요는 없었다. 질투심이 많은 박수아는 어쩌면 성준의 능력을 알고 있는 또 다른 사람에게도 질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괜히 큰 일이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성준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조용히 넘어가고자 했다.
“그렇구나...그래...”
그렇지만 순간, 박수아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성준은 뭔가 이상하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지금은 박수아까지 챙길 수는 없었기에 무시하며 자기 자신을 돌보는데 집중했다.
“오늘 테스트는 여기까지 하자. 미안해, 컨디션이 별로라서...”
“괜찮아. 오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네가 아프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렇게 두 사람의 성욕 테스트는 여기서 끝이 났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성준은 그녀와 함께 반으로 돌아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최한결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
*
*
-최한결
‘그때 그 남자 맞지? 설마 우리 학교일 줄이야. 2학년 선배인 것 같은데...분명히 그 사람도 나를 알아본 것 같았어.’
제발 자신을 못 알아보길 바랐던 성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최한결을 그 날 마주쳤던 성준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 가해자와 달리 피해자는 사건 당일의 일을 조금 더 정확하고 오래 기억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기이한 현상에서 벌어진 성추행이었기에 그녀는 방금 마주쳤던 남자가 성준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때 그 느낌은 잊을 수가 없어...더럽고, 역겹고...그런데 그 사람은 어째서 멀쩡한 거지? 최근에 멀쩡한 사람도 존재한다는 소문을 인터넷에서 보긴 했지만...그건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잖아.’
그녀는 성준의 능력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시기에 그가 정말로 멀쩡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 궁금했고, 이 사실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지 고민이었다.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소문을 통해서 멀쩡한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생활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고...할까? 아니면, 조금 더 알아볼까? 그치만...만약 아니라면...괜히 선배한테 찍히는 셈이잖아. 옆에 여자 친구로 보이는 사람도 있던데...괜히 찍혔다간 학교 다니기 힘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성준이 임신 능력자임을 알았어도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우선, 그가 정말로 능력자인지부터가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엉덩이로 느꼈던 그 느낌은 분명히 남자의 그것이었지만, 100% 확신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녀의 생각이 틀렸다면, 괜히 사고만 치게 되는 꼴이었다.
‘그래...그 사람이 능력을 지녔든 이제 나랑 무슨 상관이야. 아니, 어쩌면 상관이 있을 수도...그가 또 나를 성추행할 수도 있을까? 아니, 놀란 표정을 보면 이젠 그럴 일은 없으려나...흐음...성추행범이랑 같은 학교를 다니는 건 조금 그렇지만...설마 별 일 있겠어? 놀라는 모습이 조금 걸리긴 해도, 아무 일 없을 거야...괜히 신경 쓰지 말자.’
성준에 대한 그녀의 고민은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래도 그녀는 애써 성준을 만났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성준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기도 했지만, 이런 일에 괜히 휘말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지하철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하...왜 자꾸 그 일이 떠오르는 거야...어차피 나랑은 아무 상관없잖아...설마 나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와서 나한테 무슨 짓을 하는 것도 아닐 텐데...빨리 잊어버리자...그치만...어쩌면 그를 통해서...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아아...왜 이러지...이제까지 잘 버텨왔는데...’
그녀가 계속해서 그때의 일을 떠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성욕과 성향 때문이었다. 그녀가 지닌 특유의 성향은 그녀로 하여금 자꾸만 성준의 그것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머리를 비우기 위해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마치 암세포처럼 전이 돼서 끝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그녀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다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SM성향의 일종인 남성에게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좋아하는 M성향, 서브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성향의 강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M성향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M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 전만 하더라도 그녀는 이 성향 때문에 항상 옆에 남자를 두고는 했었다. 단순히 남자 친구를 사귀는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자 친구가 없으면 성매매나 원조교제를 통해서라도 남자를 만나 성욕을 해소하고는 했다. 그녀에게 남자는 항상 곁에 두고선 성욕을 해소해주는 존재였다.
‘으으...또 시작이다...이러면 안 되는데...학교에서만큼은...이러면 안 돼...’
같은 M성향이라고 하더라도 종류는 다양했다. 그런데 그녀가 가지고 있는 성향은 조금 특이했다. 이런 그녀의 M성향은 그녀로 하여금 끊임없이 남자를 만나라고 강요했다. 그것 평범한 섹스가 아닌, 일방적으로 당하는 식의 섹스를 하도록 유혹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성욕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그녀가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해하도록 프로그래밍 했다. 오랫동안 남자를 만나서 성욕을 해소하지 않을 경우에 그녀는 자해를 통해서 욕구를 해소시키고는 했다.
그녀가 이런 성향을 지니게 된 것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3년 전, 그녀는 우연히 소개팅앱으로 통해서 알게 된 남자와 만나서 데이트를 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목적은 애초에 그녀를 통해서 성욕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만났던 그녀와는 달리 그는 최악의 남자였고, 그렇게 그녀는 그에게 강제로 성폭행을 당하고 말았다.
성범죄의 가장 큰 문제는 범죄가 일어난 이후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성범죄의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해자에 집중을 하느라 피해자를 외면하기 마련이다. 그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를 위로해주기보다는 가해자에게 더 집중을 했고, 가해자가 쉽게 잡히지 않자, 심지어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기도 했다.
특히나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그녀의 부모님의 경우에는 더욱 심했다. 그녀가 일주일동안 성폭행 당한 사실을 숨기다가 말했다는 점에서 그녀의 부모님은 위로를 해주기보다는 크게 화를 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평소 행동과 성격, 생각이 문제라며 더욱 그녀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렇게 그녀는 반강제로 성폭행을 모두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녀에게 극단적인 M성향을 선물하고 말았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성폭행을 당해도 싼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며, 늘 죄책감 속에서 살았다. 이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적 욕구를 통해서 쾌감을 얻는 것뿐이었다. 남자들과의 일방적인 섹스만이 그녀를 구원해주었다.
‘하...벌써 한 달이 훌쩍 넘었구나...고작 한 달인데도, 이렇게 힘들다니...최근들어서 더 심해진 것 같아. 진짜 내 머리가 어떻게 된 걸까...이대로 가다간 진짜 위험해질 것 같아. 그치만...일단 약으로라도 버티는 수밖에...’
하지만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이후부터는 그녀의 주변에 더 이상 남자는 없었다. 섹스가 아니라면, 굳이 그녀의 옆에 있을 필요가 없었던 남자들은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남자들이 떠나고 그녀는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된 그녀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두렵고 미칠 것만 같았다. 정신과를 다니면서 상담도 받고, 치료도 받고, 약도 먹어봤지만 크게 소용이 없었다. 치료를 받고 약을 먹을 때만 상태가 호전될 뿐, 효과가 사라지면 또 다시 성욕이 그녀를 찾아와 괴롭혔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력하게 그녀를 압박했다. 자해횟수는 계속해서 증가했고, 이제는 학교에서조차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으으...빨리 약 먹자...’
지금만 하더라도 그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다. 손이 갑자기 떨리기도 했고,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요동치며 호흡까지 가빠졌다. 이대로 가다간 그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물건을 집어들 것이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녀는 침착하게 심호흡을 하며, 약을 하나 꺼내 삼켰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차분해질 수 있었다.
‘이대로 죽긴 싫은데...이렇게 끝날 수는 없어...’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녀가 어찌 성준을 떠올리지 않겠는가. 애초에 그녀가 인터넷을 통해서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검색을 해본 것도 다 그런 이유였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진 지금, 그녀에게는 임신 능력자가 필요했다. 그것이 설사 성범죄자라 하더라도 말이다.
‘어차피 이렇게 끝날 바에 한 번 알아보자. 만약 아니더라도 상관없잖아. 선배한테 좀 찍히면 어때. 지금 당장 내 인생이 끝나게 생겼는데.’
결국, 그녀는 결심을 내리고 말았다. 어떻게든 성준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를 이용하는 쪽으로 말이다.
========== 작품 후기 ==========
최한결은 박수아와 같이 엮어서 진행하도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