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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5호, 하서윤의 집
박수아와의 만남 이후 성준은 곧장 집으로 향하지 않았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될 일이 있었던 그는 집이 아닌, 505호, 하서윤의 집으로 이동했다. 그녀에게 볼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고, 그녀와 함께 대청소를 하면서 발견했던 야한 속옷들과 옷들을 보건쌤의 룸메이트 이소영에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설마...서윤 누나도 내 능력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녀에게 미리 방문을 하겠다고 연락을 해둔 상태였고,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집 앞에서 서있던 성준의 마음은 이상하게도 복잡했다. 동생과 박수아의 일 때문인지, 성준은 자꾸만 하서윤도 의심이 되고 있었다.
‘아직 누나한테는 문제가 없을 거야...같이 지내는 동안에도 나한테만 문제가 있었지, 누나는 별 일 없었으니까...아니...그 날, 자위한 게 어쩌면 내 능력 때문일까...? 하...갑자기 머리 아프네...’
애써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의 집에서 생활했을 때를 떠올리며 걱정했다. 특히나 마지막 날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분명히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윤 누나마저 수아처럼 되면 곤란한데...누나는 내가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으니까...하...일단, 오늘은 빨리 짐만 챙겨서 나오자.’
하지만 그녀에게 문제가 생겼다고, 그녀가 박수아처럼 성욕에 지배당했다고 하더라도 성준은 성준이 할 수 있는 것이 딱히 없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품고 있긴 했지만, 그녀와 편하게 섹스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것이 성준의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띵동 띵동
애써 마음을 달래며 벨을 눌렀다. 이 문제는 어차피 당장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능력에 대한 고민을 잠시 내려놓은 채 하서윤을 만나고자 했다.
“자, 잠시만!!”
벨을 누르자 문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무언가 다급해보였다. 혹시 벌써부터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문이 열리자, 성준은 그 이유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미, 미안...이렇게 일찍 올 줄 몰랐어...”
문을 열고 나온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붉게 물들어 있었다. 또한 민망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성준의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아...음...그 옷...맞죠?”
그녀가 이렇게까지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바로 입고 있는 옷 때문이었다. 그녀는 놀랍게도 산타 복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사실상 빨간색 속옷에 가까울 정도로 매우 야한 복장을 말이다.
“...으응...그게...이제 이 옷들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고 하니까...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한 번 입어본다는 게 그만...”
“그런데 제가 너무 일찍 와버렸군요.”
“...어, 얼른 들어와...”
성준이 민망해하는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 있는 그녀의 몸매를 향해 있었다. 그녀의 몸매는 결혼을 한 여자치고는, 서른이 넘은 나이 치고는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끈했다. 이미 그녀의 몸매를 여러 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던 성준이었지만, 매번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히나 옷 때문인지, 그녀의 몸매는 오늘 더욱 부각되어 있었다. 예전보다 살짝 살이 오른 그녀의 엉덩이는 빨간색 팬티가 꽉 끼는 모습이었고, 가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고선 시선이 이동하지 않는 남자는 없을 것이다.
“그건 크리스마스 때 구입한 거예요? 아직 크리스마스까지는 많이 남았지만, 엄청 잘 어울리네요. 누나하고 딱이에요.”
“그렇게 보지 마...부끄럽단 말이야...”
“누나하고 이런 옷은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보니까 꼭 그렇지도 않네요.”
“아이, 정말...”
집안으로 들어온 성준은 그녀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는지 계속해서 그녀의 몸매를 칭찬해주며 놀렸다. 그가 그럴수록 그녀의 얼굴은 그녀가 입고 있는 산타 복장만큼이나 붉게 물들어갔다.
“혹시 다른 옷도 입어봐야 되는 거예요?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면, 굳이 저한테 안 주셔도 괜찮아요.”
성준은 이렇게 혼자서 입어볼 정도의 옷이라면 그녀에게는 나름 소중한 물건이 아닐까 싶었다. 비록 그녀의 말대로 더 이상의 쓸모는 없을지라도 추억과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기에 굳이 버리거나 다른 사람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그냥 갑자기 옛날 생각나서 입어본 거야...”
“갑자기 생각날 정도의 물건이면, 나름 중요한 거 아닐까요?”
“어차피 이젠 쓸 일도 없으니까...아무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옷 갈아입고 나올게.”
그렇지만 그녀는 끝내 아니라고 부정하며, 다시 원래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금은 세상에 없는 남편과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 과거에 집착하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런 옷이 집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워서일까.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그녀는 조금 전에 자신이 입었던 산타 복장을 상자에 담아 성준에게 건네주었다.
“정말 하필이면 왜 이럴 때 일찍 와가지고...밥은 먹은 거야?”
“아직 안 먹었지만, 아쉽게도 먹을 시간은 없을 것 같아요.”
“그래? 조금이라도 먹으면 좋을 텐데...간식이라도 줄까? 간단히 샌드위치 만든 게 있는데...”
“으음...좋아요. 한 15분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요.”
그녀가 옷을 갈아입은 뒤로 두 사람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쉽게도 성준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15분 정도 시간을 내서 그녀와 대화와 간식 타임을 가졌다. 잠깐이라도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성준에게도 무척이나 즐겁고 편안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서로에 대한 근황부터 시작되었다. 성준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 각자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별일은 없는지 등등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물어보고 대답을 해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은 진지해질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진지해진 것은 임신 클리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부터였다.
“그래서 아직 결정은 못한 거예요?”
“응, 아직은...지금도 여전히 고민 중이야.”
“빨리 결정해야 되는 건 아니죠? 만약 사기단체라면 최대한 빨리 결정을 하라고 요구할 수도 있거든요.”
“그런 건 아니야. 고민하는 게 당연한 거라고 오히려 편하게 시간 주더라. 그래서 적어도 다음 주까지는 미룰 생각이야. 어차피 곧 있으면 생리이기도 하고...”
그녀는 아직 임신 클리닉에 대해서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임신을 간절히 바란다고 하더라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고,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곧 있으면 생리가 다가오는 시기였기에 결정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생리...기간에는 임신이 안 되는 거 맞죠?”
“아예 안 된다기보다는 임신이 될 가능성이 굉장히 적다고 볼 수 있지. 준이, 성교육 시간에 졸았구나?”
“하하, 성교육 시간에는 원래 대부분 자죠...특히나 요즘에는 성교육 일정이 전부 취소라...아무튼 생리 끝나고 결정하신다는 거죠?”
“응, 그래야 될 것 같아. 아무래도 삽입으로 하는 임신이니까 가임기 때 한 방을 노려야지.”
임신 과정에서 삽입이 필수라는 점도 그녀의 선택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될 수 있으면 가장 임신이 잘 되는, 난자의 생식력이 높은 가임기를 이용해서 한 번에 임신을 하고 싶어 했다. 그 정도로 삽입은 썩 달갑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렇군요...으음...그밖에 거기서 말한 주의사항은 없어요?”
성준이 그녀에게 또 다른을 질문했다. 임신 클리닉과 관련해서 그녀의 선택도 그에게는 큰 관심거리였지만, 어차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그녀도 선택을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오늘 그는 그것보단 다른 것이 더 궁금했다.
“그밖에? 어떤 거 말하는 거야?”
“뭐...아무래도 임신 능력자들을 상대하는 거니까...음, 저번에 누나가 그랬었잖아요. 임신 능력자는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아무래도 임신 과정에서 임신 능력자들을 상대하게 될 텐데, 그때의 주의사항이나...유의점 같은 거요.”
그가 궁금한 것은 역시나 임신 능력자에 관련된 것이었다. 어제 오늘 있었던 일들 때문이라도 그는 임신 능력자의 능력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했다.
“글쎄...그건 왜 궁금한데?”
성준의 질문에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이미 성준이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 질문을 하는 의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자신과 같은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그...혹시라도 임신 과정에서 누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길까봐서요...”
“지금 나 걱정해주는 거야? 역시 준이밖에 없네. 하지만 지금은 딱히 아는 건 없어. 나중에 한 번 물어볼까?”
“그러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런 일은 최대한 신중하는 게 좋으니까요...”
“알았어, 한 번 물어볼게. 준이 말대로 조심할 필요는 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아직까진 성준을 떠보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성준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고자 했다.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임신 능력자임을 밝힐 때까지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임신 클리닉을 선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저는 이만 가봐야 될 것 같아요. 더 지체하다간 너무 늦을 것 같아서...”
“그래?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대신, 다음에 또 놀러 와야 된다.”
“당연하죠. 빨리 근신 풀려서 예전처럼 저녁도 먹고 운동도 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 임신하기 전에는 그럴 수 있겠지?”
“임신하기 전이라니까 뭔가 벌써 임신이 결정된 것 같잖아요.”
“헤, 그런가? 그래도 가면 갈수록 생각이 그쪽으로 기우는 것도 맞으니까...”
“으음...누나 생각이 그렇다면...그게 맞는 거겠죠...아무튼 저는 가볼게요. 다음에 봐요.”
“으응, 다음에 봐.”
그렇게 그것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속옷과 옷이 들어있는 상자를 챙긴 성준은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그가 향해야 되는 곳은 바로 위층인 보건쌤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집에서 나온 뒤로 성준의 마음은 묘하게 불편함이 있었다. 특히나 그녀가 마지막에 임신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고 했을 때부터 알 수 없는 답답함이 느껴졌다.
‘갑자기 왜 그러지? 누나가 임신할 수도 있다니까...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다는 점이 성준은 이상하게 불편함을 느꼈다. 그녀의 임신은 자신의 능력으로도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그는 자꾸만 그녀가 임신 클리닉에서의 임신을 선택하지 않길 바랐다.
‘하...서윤 누나 인생인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런 생각을 할까...어차피 누나한테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물론, 그의 이런 생각은 지나친 오지랖이었다. 그도 이것을 인정했다. 그녀에게 좋아한다는 말도 못하면서,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을 말하지도 못하면서 이런 걱정을 하고, 바람을 가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그는 애써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며,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하루라도 빨리 정리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그의 마음은 자꾸만 씁쓸함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