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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호, 유은정과 이소영의 집
하서윤에게 받은 짐을 들고 성준은 바로 601호로 향했다. 여기도 미리 보건쌤에게 연락을 해놓은 상태였기에 들어가서 전달만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조금 일찍 온 탓일까. 유은정은 잠시 외출을 나간 상태였고, 집에는 이소영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20분 뒤에 온다니까, 만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래요? 으음...20분이면 뭐...온 김에 인사는 하고 가야되니까요.”
처음에 성준은 유은정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 기뻐했다. 괜히 이런 짐을 전달하면서 그녀와 마주치면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소영은 그런 그에게 유은정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 말에 굉장히 곤란해진 그였지만, 생각해보면 아는 사람 집에 와서 그 사람을 안 보고 간다는 것도 이상했기에 얼굴만 보고 바로 집에 돌아가기로 했다.
“기이한 현상 때문에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러게...성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망했다고 보면 될 거야.”
유은정이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성준은 이소영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민망함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그것은 한참 전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어색함이 전혀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대화 내용은 주로 이소영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왜 소설은 계속 하시는 거예요?”
“남자의 성욕은 사라졌지만, 여자는 아직 멀쩡하잖아. 그 부분은 노리는 거지.”
“아아, 여자들도 은근히 야한 거 좋아하더라고요.”
“후훗, 야한 거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다만, 전에는 BL물 위주였는데, 이제는 현실성이 너무 떨어져서 조금은 변화를 줄 생각이야.”
“좋은 소재라도 있어요?”
“임신 능력자라고 들어봤어? 기이한 현상에서도 임신을 시킬 수 있는 남자들이 있다고 하더라고. 그 사람들을 대상으로 써볼 계획이야. 아직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설정만 완벽하면 꽤 잘 먹힐 것 같아.”
기이한 현상 이후, 그녀는 계약을 했던 회사가 망하면서 거의 백수로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특히나 야설과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보였다. 임신 능력자라는 말에 성준의 마음이 살짝 찔리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정보력을 통해서 몰랐던 부분을 알아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는 따로 조사하신 거예요?”
“조사 중이라고 볼 수 있지. 일반인이 알아내기는 조금 힘들어서 고생중이야. 최대한 인맥을 동원해서 찾아보고 있긴 한데,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 그나마 은정이가 있어서 참 다행이지.”
“쌤이랑 임신 능력자가 관련이 있어요?”
“네 쌤 동기 중에 정부나 헌터부대 쪽에서 일하는 사람이 제법 있거든. 간호사라서 많은 부분은 알 수 없지만, 이것저것 들은 내용들이 많은 모양이더라고.”
그녀가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정보를 얻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유은정이었다. 간호학과 출신이었던 유은정은 헌터부대에서 일하는 동기를 통해서 임신 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었다.
“아...그럼, 혹시...지금까지 알아낸 정보라도 있어요?”
“왜 이렇게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 이거, 외부로 발설하고 다니면 안 되는 건데...”
“...그냥...호기심이죠...절대 말 안할게요.”
“아직까진 아는 게 별로 없어. 다른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은정이한테도 이제 막 부탁했거든. 지금까지는 임신 능력자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제법 수가 된다는 거랑, 정부에서 그들을 찾아다닌다는 것뿐이야.”
“다른 정보는 전혀 없고요?”
“아직까진. 정확히 뭐가 알고 싶은 건데?”
“그냥...그들이 가진 능력이나 이것저것 궁금해서요.”
“이쪽에 관심이 많구나.”
“뭐...그렇죠...”
“아쉽지만 자세한 정보는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아.”
성준은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 궁금했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아직 그녀는 많은 정보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내용들은 이미 훨씬 전에 성준이 파악했던 부분이었다.
‘쌤한테 직접 물어봐야 되는 건가? 하지만...그랬다가는 분명 엄청 의심할 텐데...하...하필이면 임신 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서윤 누나랑 쌤이라니...’
이소영이 아니라 유은정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부탁을 한다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준은 차마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기가 두려웠다. 눈치가 빠르고 행동력이 좋았던 그녀는 바로 성준을 의심하고선 성준의 누나 등 주변을 탐색할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비밀이 밝혀지는 것은 싫었기에 성준은 고민이 되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할까? 어차피 쌤이라면, 내 능력을 가지고 해코지를 하진 않을 텐데...다만, 쌤도 내 능력으로 변해버릴까 걱정이지...’
그럴 바에 성준은 그녀에게만큼은 먼저 사실을 말해야 되나 고민이 되었다. 지금 성준에게 필요한 것은 하루라도 빨리 임신 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박수아와 함께 단 둘이서 알아내기에는 너무나도 벅찼다. 그렇다고 이 일에 가족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신지은은 임신한 몸을 관리하는 것도 힘이 들 테고, 하서윤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때문에 조금 더 자신의 편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그였다.
‘쌤이 장난만 조금 줄였다면, 당장 말했을 거야. 하...빌어먹을 성격을 감당할 자신이 없네.’
그렇지만 과연 유은정을 성준이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그 부분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더군다나 과거에 그는 유은정과 성적으로 큰 일을 경험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성준이 믿을 수 있는 사람 중에 한 명이었지만, 왜 하필이면 그녀일까 한숨이 나오기도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드디어 그녀가 집에 돌아왔다. 그녀는 거실에서 이소영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성준을 보며 놀라다가 이내 반갑게 미소를 지었다.
“나만 놔두고 둘이서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짓이라니요....그냥 대화했어요.”
“이렇게 옆에 야한 속옷이 잔뜩 담긴 상자를 두고 대화를 했다고? 응큼해!”
그녀는 성준을 보자마자 바로 장난을 쳤다. 이런 그녀에게 임신 능력자임을 밝히면 어떻게 될까. 그는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쌤 얼굴도 봤으니까, 저는 이만 가볼게요. 집에 빨리 들어가 봐야 해서...”
“벌써 가려고? 방금 만났는데, 너무해.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오늘 그녀에게 말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한 그는 그만 집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집에 갈 시간이 되기도 했고, 이곳에 더 있으면서 그녀의 장난을 받아줄 마음도 아니었다.
“제가 여기 있어봤자 할 것도 없잖아요.”
“히잉...나랑 놀자...”
“제가 쌤이랑 뭘 하면서 놀아요...”
“밥은 먹었어? 밥이라도 먹을까?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집에서 누나랑 같이 먹기로 했어요.”
“방금 만났는데 이렇게 벌써 가는 게 어디 있어...딱 10분만...”
“하...알았어요...정말 딱 10분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성준을 붙잡았다. 성준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딱 10분만 시간을 내주고자 했다.
“그런데 너는 언제 온 거야?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쌤 오기 20분 정도 전이요. 그냥 어쩌다보니까 일찍 왔네요.”
“그러면 둘이서 20분 동안 대화하고 있었던 거야?”
“뭐, 그렇죠. 그냥 어색하게 앉아있을 수는 없잖아요.”
“무슨 대화 했는데?”
“왜 자꾸 남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시는 거예요. 그냥 평범한 이야기했어요. 제가 가져온 옷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요즘 누나가 계획 중인 소설하고 관련된 이야기도 나누고 그랬죠.”
성준은 그녀와 마주앉은 채로 대화를 나누었다. 10분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기에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짓궂은 장난이 조금 짜증나긴 했어도 절대 악의가 담겨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즐겁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이소영의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물어보던데? 엄청 관심 있어 보이더라고. 그래서 네가 그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말했지.”
성준은 마음의 준비가 되기 전까진, 유은정에게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이소영이 갑작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어 그 이야기를 꺼냈고, 그때부터 유은정의 의심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왜? 네가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왜 관심이 있어?”
유은정이 의심의 눈초리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성준은 순간적으로 심장이 철렁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하고자 했다.
“관심이라기보다는...궁금해서요. 왜 요즘 기이한 현상이 길어지면서 다들 고생이잖아요...”
“혹시 하은이 언니 때문이야?”
다행히 그녀의 첫 의심은 성준이 아니라 성준의 누나, 성하은에게로 향했다. 성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최대한 그쪽으로 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뭐...그렇죠. 저희 누나도 아무래도 결혼할 나이다 보니까...임신과 관련해서 고민이 많을 테니까요...”
“그래? 정말로 그거 때문이야?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다른 이유...가 있을 리가 없잖아요...하하...”
그녀가 성준이 임신 능력자라고 생각할 이유는 현재로선 조금도 없었다. 성준 역시도 이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녀가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그를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하긴...요즘 애들 사이에서는 히어로보단 임신 능력자가 더 흥밋거리긴 하겠다.”
“뭐...그렇죠...”
“혹시 주변에 임신 능력자가 있거나 그런 건 아니지?”
“네? 그, 그럴...리가요...당연히...없죠...하하...”
특히나 그녀가 주변에 임신 능력자가 있냐고 묻자, 그의 당혹스러움은 더욱 커졌다. 왜 그녀가 이걸 묻는 것일까. 그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소영이 때문에 알아본 사실인데, 임신 능력자라는 게 우리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존재들이거든. 발견하는 즉시 신고하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아...그렇군요...그건 몰랐네요...”
그녀는 이소영의 말처럼 역시나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것 말고도 어떤 정보를 더 가지고 있을지 궁금하긴 했지만, 성준은 일단, 그녀의 의심에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하고 있어? 누가 보면 네가 임신 능력자인줄 알겠다.”
“네?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내가 자꾸 장난쳐서 그러는 거야?”
“아, 아뇨...그런 거 아니에요...”
자꾸만 불안해하고 있는 성준의 모습에 그녀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표정이 의심에서 걱정으로 바뀌는 게 오히려 성준에게는 천만다행이었다.
“이제 딱 5분밖에 안 남았네. 아쉽다...그냥 더 있으면 안 될까?”
“늦으면 누나한테 크게 혼날 수도 있어서 안 될 것 같아요...”
“전에는 늦게 다녀도 괜찮지 않았나?”
“그게...제가 요즘 근신 중이라...”
“근신? 역시 잘못을 저지르긴 했구나. 무슨 잘못이 길래 근신까지 하는 거야?”
“그러게요...하하...”
그녀의 말에 성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체감 상 10분이 훌쩍 넘겼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은 이제 겨우 5분이 흘러간 상황이었다. 그녀에게는 고작 5분이었지만, 성준에게는 5분이라는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이 옷들은 어디서 구했다고?”
“그냥...아는 사람 건데...이제 필요 없다면서 다 버릴 거라고 해서 들고 왔죠...”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나머지 5분 동안은 임신 능력자가 아닌 성준이 들고 온 옷들에 대해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이것도 성준에게는 썩 즐거운 대화 주제는 아니었지만, 성준은 차라리 이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옷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 전까지 그의 몸을 괴롭히던 긴장감은 한결 줄어들 수 있었다.
“아는 사람? 여자야? 어떤 여자 길래 사이즈가 이래? 나보다 가슴도 큰 것 같은데? 소영이가 입었다가는 다 흘러내리겠다.”
상자 안에서 속옷 하나를 꺼낸 그녀가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놓고선 사이즈를 체크했다. 그녀의 몸매도 매우 뛰어난 편에 속했지만, 역시나 사이즈로만 따지면 하서윤이 조금 더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취향을 가진 여자랑 아는 사이인 거야? 설마 여자친구?”
“제가 여자 친구가 어디 있어요...그냥 아는 사람이에요.”
“흐응...의심스러운데...아무튼 잘 입을게.”
“네? 이걸 쌤이 왜 입어요. 소영 누나 주려고 가져온 건데...”
“에이, 그래도 옷이니까 입긴 입어야지. 어차피 소영이가 입으면 다 흘러내릴 텐데. 지금 한 번 입어볼까?”
계속해서 이소영에게 팩트 폭력을 날리던 하서윤은 상자 안에 들어있던 옷들 중 하나를 선택하더니, 자신의 방으로 들고 갔다. 성준은 굳이 그녀가 이 옷을 입는 것을 바라진 않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로 행동했고, 1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매우 야한 옷차림으로 성준 앞에 등장하고야 말았다.
그녀가 고른 복장은 옷이라기보다는 속옷에 가까웠다. 그것도 평범한 속옷이 아닌, 중요부위만 살짝 가려져있고, 나머지는 전부 비춰 보이는 그런 속옷 말이다.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경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고생 앞에서 보건 선생님이 이래도 되는 거야? 아무리 기이한 현상이라도 그렇지...하...만날 때마다 이러니까 제가 쌤을 피하는 거라고요...’
너무 대놓고 몸매를 자랑하는 그녀 덕에 성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몸매는 눈이 호강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서윤하고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그렇지만 하서윤과는 달리 그녀의 몸매로부터 받는 느낌은 전혀 달랐다. 하서윤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던 지라 약간의 설렘과 흥분을 느꼈더라면, 그녀에게는 민망함이 우선적으로 느껴졌다. 지금만 하더라도 눈을 어디에 둬야 될지 몰라 난감해하던 그였다.
‘뭐지...아까부터 기분이 왜 이러는 거지...? 설마...쌤한테 흥분을...? 에이...조금 전에 수아하고 섹스도 했고, 서윤 누나가 옷 입은 걸 봤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잖아. 그런데 쌤이 속옷 입은 걸 보고 흥분한단 말이야?’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의 민망함은 곧 다른 감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성준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유은정을 바라보며, 아무런 성적 감정을 느낀 것도 없었고, 야한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던 성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