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주 -->
*
*
*
-성준의 집 근처 마트
이민정에게 박수아에 대해서 들은 후, 성준은 학교를 마칠 때까지 박수아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심란한 상태였다. 더군다나 박수아는 중간에 생리통이 더 심해져서 조퇴를 한 상태였던지라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답답함은 계속해서 그를 짓눌렀고, 그의 머리와 마음을 압박했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런 그를 구원해줄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하서윤이었다. 성준이 학교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에 그녀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랜만에 같이 장을 보자고 말이다.
당연히 성준의 입장에서는 그녀와의 만남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성준은 항상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끼고는 했다. 이런 상황일수록 그녀는 성준이 가장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물론, 그녀에 대한 감정이 아직 완벽히 정리되진 않아서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녀가 다른 임신 능력자의 능력으로 임신을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아려오던 그였으니 말이다.
그 부분이 살짝 마음이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강했던 그는 그녀와의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미리 도착한 그녀가 성준을 맞이해주었다.
“일찍 오셨네요. 오래 기다리신 건 아니죠?”
“아니야, 나도 방금 나왔는걸.”
성준을 발견한 그녀가 반갑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미소에 성준의 답답하고 복잡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나 성준에게 그녀는 매우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밖에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응, 아직까진 완벽하진 않지만 예전보단 훨씬 좋아졌어. 다 준이 덕분이지, 뭐.”
그리고 그녀에게도 성준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녀가 성준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바로 집근처로 외출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정신적으로 상당히 나약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매우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직까지도 여전히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불안증세가 많이 남아있었지만, 이렇게 혼자서 밖에 나오는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성준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그녀였다.
오늘만 하더라도 그녀가 혼자 나와서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성준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성준이 자신을 지켜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녀는 성준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 덕에 그녀 자신도 예전에 비해서 많은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져서 다행이네요. 이젠 저 없어도 혼자 멀리까지 놀러 갈 수도 있겠는데요?”
“그래도 아직까진 준이 없으면 멀리 못 나가. 지금도 준이 만나기 전까지 엄청 불안했는걸.”
“지금은 어떤 데요?”
“지금은 당연히 너무 좋지. 이렇게 준이랑 같이 다닐 때면,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야.”
“다행이네요. 음...우리 오랜만에 손잡고 걸을 까요?”
“헤, 당연히 좋지.”
그녀의 말에 고마움을 느낀 성준이 그녀에게 손을 건넸다. 그녀는 활짝 웃으면서 성준의 손을 붙잡았고, 두 사람은 나란히 마트를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장은 왜요? 원래는 인터넷으로 주문했었잖아요.”
“그냥, 오랜만에 준이랑 같이 돌아다니고 싶었어. 요즘 우리, 자주 못 만났잖아.”
마트에 도착한 두 사람은 천천히 여러 코너들을 돌면서 장을 봤다. 평소에 그녀는 마트에 직접 내려오기보단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서 장을 보곤 했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장을 보게 된 것은 전부 성준 때문이었다. 이렇게라도 성준과 함께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게요. 예전처럼 누나랑 같이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해야 되는데...”
“그때, 정말 좋았는데...이제는 힘들지 않을까 싶네...”
“...왜요?”
“그냥...그럴 것 같아서...”
“혹시 저 때문이에요?”
하지만 장을 보던 중에 중간 중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변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성준은 혹시라도 본인이 잘못한 일이 있는 것인지 물었지만, 그녀는 대답을 회피할 뿐이었다.
“에이, 왜 준이 때문이겠어. 아, 우리 저기 한 번 가볼까? 예전에 남편이랑 저기서 책 자주 구입하곤 했었는데.”
성준의 질문을 피해서 그녀가 이동한 곳은 마트에 위치한 작은 서점이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조금 전만 해도 어두웠던 그녀의 표정이 다시금 밝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표정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성준은 왠지 모르게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누나는 책 좋아하죠?”
“응, 이해 못하겠지만, 집에서 책 읽는 게 나한테는 큰 재미거든. 폐인처럼 지내는 동안에도 일주일에 한 권씩은 꼬박꼬박 읽었어.”
그녀를 따라 서점에 들어온 성준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책을 살폈다. 독서가 취미인 그녀와 달리 성준은 책하고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서점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그에게 흥미로운 책을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대단하시네요. 저는 책이랑은 좀 안 어울려서...”
“후훗, 우리 남편도 그랬었는데. 그 사람도 처음에는 책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었어.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내가 강제로 이쪽으로 이끈 거지.”
반면에 그녀는 매우 신나고 즐거운 표정으로 책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과거에 이곳에 남편과 자주 왔었는지, 중간 중간 남편 이야기를 해주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곳곳에 남편의 흔적이 남아있구나. 하긴...그렇게 좋아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성준은 이상하게도 씁쓸함을 느꼈다. 그동안 그녀가 즐거워하는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던 그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조금 전의 그녀의 말이 신경 쓰여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남편에 대한 질투심 때문일까. 그는 자꾸만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감정을 품고는 했다.
“서윤씨? 서윤씨, 맞죠?”
계속해서 그녀와 함께 서점을 둘러보던 중에 어떤 한 남자가 그녀에게 찾아왔다. 다부진 체격에 날렵한 인상을 지닌 그 남자는 그녀의 이름까지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누구...?”
반면에 그녀는 그 남자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혹시 임신 클리닉과 관련된 사람일까. 성준은 긴장하면서 그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다.
“기억 못하시는군요. 저, 준성이 친구, 서진우입니다.”
“아...진우씨...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이라서...”
“아닙니다. 벌써 2년이나 지났으니까요.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남자의 정체는 임신 클리닉과 관련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남편과 절친했던 헌터부대 동료였다.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가 그녀를 발견한 것이었다.
“네...뭐...”
“진작 찾아뵀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그 일 이후로, 갑자기 러시아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때, 진우씨 없었으면 정말 큰일 날 뻔 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너무 고마운 걸요.”
두 사람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 들 수 없었던 성준은 일부러 책을 보는 척 연기하며 멀찌감치 떨어져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대화 내용을 보아하니, 과거에 그녀가 남자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면서 성준은 또 다시 묘한 질투심이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남자가 특별한 관계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남자가 다가온 것만으로도 그는 이상하게도 질투심이 폭발했다. 박수아도 이민정과 대화를 나누는 성준을 바라보면서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이없게도 잠시나마 박수아의 질투심이 조금은 이해되는 그였다.
“2년 동안 많이 힘들었다고 들었는데, 역시 소문은 소문이 모양입니다. 이렇게 잘 지내는 거 보니까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네요.”
“뭐...이젠 벌써 2년이나 지났으니까요...지난 일들은 다 잊어야죠...”
“준성이도 그렇게 생각할겁니다. 서윤씨가 행복하기만을 바랐던 녀석이니까요.”
이후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두 사람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한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성준이 있다는 것을 잊은 것처럼 그녀 역시도 오랜만에 만난 지인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둘의 대화는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흘러서야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 친구는 서윤씨랑 아는 사이인가요?”
“어머, 깜빡하고 있었네. 최근에 저를 도와주는, 제가 많이 의지하고 있는 친구에요. 오랜만에 아는 사람 만나서 같이 왔다는 걸 깜빡했네요.”
“그렇군요. 아무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계속 서윤씨랑 있다가는 저 친구한테 크게 혼날 것 같네요.”
“꼭 연락할게요. 다음에 봐요.”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그제야 그녀가 남자를 보낸 뒤, 성준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매우 미안한 표정으로 책을 바라보고 있는 성준에게 말을 걸었다.
“미안, 조금 오래 걸렸지? 갑자기 아는 사람을 만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저 사람도 헌터부대 출신 맞죠?”
“응, 남편하고 친했던 동료였어. 남편이 죽고 나서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받았었거든. 그런데 그 후로 내가 폐인처럼 지내고, 저 사람도 러시아로 가면서 지금까지 쭉 연락을 못했었지.”
“그랬군요. 이제라도 만나서 반가웠겠네요.”
“응, 밖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거든. 나한테 이제 예전 친구들은 전부 사라졌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대화가 끝나고 나서야 자신을 떠올린 그녀에게 성준은 살짝 서운한 감정이 생겨났다. 하지만 남자하고의 갑작스러운 만남을 너무나도 좋아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만나면 당연히 좋을 수밖에요. 추억의 장소에서 추억도 떠올리고, 예전 친구도 만나고, 엄청 좋았겠네요.”
“그러게, 준이 없었으면 만나지도 못했겠지. 고마워, 준아. 그리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고.”
“괜찮다니까요. 이제 얼른 다시 장봐요, 우리.”
성준이 억지로 웃으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성준의 말에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렇게 두 사람의 장보기는 다시 시작되었다.
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장보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날 수 있었다. 처음과 비교해서는 조금 텐션이 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즐겁게 장보기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고작 이런 일로 왜 그러지...하...괜히 만났어...처음에는 누나랑 함께 있으면 답답했던 마음이 뻥 뚫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답답해...얼른 집에 가고 싶다...’
그렇지만 성준의 마음 한켠은 여전히 불편했다. 마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정확히 그 남자, 서진우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준은 그녀와 함께라는 생각에 너무나도 편하고 행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때의 감정과 정반대였다. 지금 그는 속이 막힌 것 같은 답답함에 괴로워했다. 이민정에게서 박수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답답함을 느끼는 그였다.
반면에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추억 속에 빠져서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거에는 그녀가 웃을수록 행복해하던 그였지만, 지금은 그럴수록 그의 마음이 더욱 아파왔다.
그래서 결국, 성준은 꽁꽁 숨겨왔던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꺼내보이고자 했다. 그녀와 함께 집에 돌아가는 길, 성준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원래는 이 이야기를 전혀 꺼낼 생각이 없었던 그였지만, 너무나도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가 없었던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저...누나...?”
“으응? 왜? 혹시 저녁 먹고 가려고?”
“아뇨...그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고...으음...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요.”
“어떤 건데?”
“그...임신...말이에요. 정말...하실 거예요? 그러니까 임신 클리닉을 통해서요.”
성준의 질문은 그녀의 임신과 관련된 것이었다. 사실, 성준이 그녀에게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서진우나 남편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바로 이것이었다. 머리로는 그녀의 선택이 이해되었지만, 마음으로는 그녀가 그 선택을 내리지 않길 바라던 그였다.
“그걸 왜 물어보는 건데? 준이, 너는 내가 임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뇨...그런 뜻이 아니라...그...꼭 임신 클리닉이어야 싶어서요.”
“거기가 아니면, 임신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걸? 준이, 너는 전에 내가 꼭 임신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잖아. 그게 내 삶의 목적이자 희망이라고도 말했고.”
“아...그랬었죠...”
“지금은 생각이 달라진 거야?”
“아뇨...그럴 리가요. 그냥 걱정이 돼서...”
“너무 걱정하지 마. 이건 내 선택이니까. 내 선택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선택을 내린 뒤였다. 어쩌면 마트에서 그녀가 중간에 했던 말 역시도 이것을 뜻하는 지도 몰랐다. 임신을 하게 되면, 성준과 이전처럼 지내기는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성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른 할 말은 없고?”
“...네...”
“그래, 거기서 임신하게 되면...준이한테도 바로 말해줄게.”
“네...그럼, 다음에 또 봐요...”
“응, 오늘 고마웠어. 다음에 보자.”
그녀와 헤어질 때까지도 성준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그녀에게 고백을 하며, 제발 임신 클리닉에 가지 말라고 외쳤지만, 마음속으로 외친 목소리는 그녀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오늘도 답답한 마음을 안고 그녀에게서 멀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하서윤 이야기는 딱 여기까지만 끌고, 이후부터는 빠르게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