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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를 발견하자마자 성준은 재빨리 몸을 숨겼다. 다행히 그의 누나는 카페 밖의 상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지, 성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설마 저 사람이 누나 남자친구?’
몸을 숨긴 성준은 그녀가 바라보기 힘든 위치에 서서 카페 안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곧 누나와 함께 맞은편에 위치한 한 명의 남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남자가 누나가 다니는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곧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그녀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주앉은 두 사람은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가 그녀의 남자친구가 맞다면, 분명히 심각한 이야기일 것이다.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그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지만, 성준은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최근 누나에 대한 소식은 전혀 못 들었어. 요즘 남자친구하고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분위기로 봐서는 사이가 썩 좋아보이지는 않던데...여전히 집에서 지내고 있기도 하고...으음...전혀 예의가 아니겠지만...이렇게라도 누나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어.’
결국, 그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어쩌면 이번이 누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절대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지 않는 그녀였기에 이런 방법을 통해서라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스스로의 행동에 합리화를 했다.
‘어차피 저 사람은 나를 전혀 모르니까, 이쪽에 앉으면 절대 걸릴 일 없겠지?’
그렇게 카페 안으로 들어간 성준은 간단히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는 그녀의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거기서 그는 그들의 대화 내용을 몰래 엿 듣고자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길래 표정들이 심각한 거지? 설마 임신과 관련된 건가?’
성준은 커피를 마시는 척하면서 최대한 그녀의 뒤에 붙어 이야기를 들었다. 두 사람은 지금도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귀를 쫑긋 새운 채로 그들의 대화 하나하나를 집중하며 들었다.
“그래서 정말로 헤어지자고?”
하지만 성준이 그들에게서 처음으로 들은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헤어지자니,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 말이 그녀의 입이 아니라 남자의 입에서 나왔다는 점이었다.
“하은아...우리 지금까지 잘 버텨왔잖아. 조금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될까?”
“미안해요...더 이상은...못 버티겠어...”
“조금만...조금만 더 기다려줘...부모님은 내가 어떻게든 설득할 수 있을 거야...”
“어머님만 설득하면 뭐해...진호씨부터 아이를 원하고 있잖아. 나는 더 이상 자신이 없어...이제 그만해요, 우리...”
“아이 문제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 사람은 아이를 키울 형편이 전혀 못돼. 일단, 결혼하고 그 이후에 양육권으로 다투면 충분히 승산이 있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그 사람이랑 같이 살지 않아도 된다고.”
“그만...이제 그만...다 지긋지긋해...더 이상은...하기 싫어요...”
“하은아...”
“더 이상 못할 것 같아요. 진호씨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서 잠시 흔들렸던 거고...여기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서로한테 좋아요. 이제 그만해요,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는 성준이 듣기 시작하자마자 바로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성준은 시작부터 절정을 향하는 두 사람의 감정에 크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헤어지자는 말부터 양육권에다가 결혼 문제까지...18살인 그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니었다.
“지금은 너무 감정적이라서 그런 거야.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고, 내일 다시 얘기하자. 우선 최대한 좋은 생각 떠올리면서 진정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상황에 좋은 생각이 무슨 소용이에요. 진호씨...아니, 오빠...미안해요, 더 이상은 무리에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한지 고작 40일밖에 지나지 않았어. 딱 100일, 100일만 기다려줘. 그 이후에도 달라진 게 없으면 그때 포기하자. 그때 포기해도 전혀 늦지 않잖아. 제발 부탁할게. 그때까지만...조금만 더 기다려줘...”
남자는 계속해서 그녀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하지만 짧은 시간동안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받은 그녀는 더 이상 사랑을 지속할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남자에게는 고작 40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그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았다.
‘하...누나가 이 정도로 힘들어하다니...하여튼 우리 누나도 고집 하나는 알아준다니까. 이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을 말하지 않았을 줄이야...뭐, 거기에는 내 지분도 있긴 하지만...’
누나와 남자의 대화를 들으면서 성준은 자꾸만 한숨을 나왔다. 그녀가 임신과 남자친구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은 성준도 이미 오래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동안 너무 능력에만 매달린 채 가족은 멀리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특히나 신지은과의 일로 누나에게 실망을 줬던 일이 자꾸만 미안하게 생각되었다.
“미안해요...이젠 못할 것 같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면 안 될까? 아주 조금이라도...”
“하...제발 이러지 말아줘요. 부탁할게요...”
“하은아...”
“정말 미안해요. 그럼...저는 이만 가볼게요.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동안...고마웠어요...”
성준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의 대화는 어느새 절정을 지나 결말로 향하고 있었다. 남자의 애원에도 그녀는 결코 그의 손을 붙잡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는 그녀가 자리를 떠나기 전까지 계속해서 매달려봤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남자를 혼자 남겨둔 채로 카페를 떠나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우리 누나...한동안 많이 힘들겠네...하...동생이란 놈은 누나 결혼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데, 자기 걱정만 하고, 사고만 치면서 돌아다녔으니...한심하다 정말...’
성준은 그녀가 카페를 나설 때까지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뭐...겉보기에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지만...어쨌든 우리 누나를 울린 사람이니까...신경 쓰지 말자.’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금 전까지 그녀와 대화를 나누던 남자의 모습이 더 잘 보일 수 있었다. 그녀를 떠나보낸 남자는 모든 것을 잃은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짠해 보이기도 했지만, 성준은 그가 자초한 일이라 생각하며 그를 지나쳐 카페를 빠져나왔다.
카페를 나와서도 성준은 최대한 신중하게 행동했다. 혹시라도 여기서 누나에게 발각되었다가는 썩 좋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집으로 가려나? 어쩌면 친구들을 만날 수도 있겠고...으음...누나 성격이라면 집으로 갈 확률이 높겠지? 일단, 누나보단 일찍 집에 들어가는 게 좋겠어.’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녀가 갈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별의 슬픔에 혼자서 방황을 할 수도 있는 일이었고, 친구들을 만나서 슬픔을 달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녀와 마주쳐서 안 된다는 점과 그녀보다 일찍 집에 들어가야 된다는 점이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성준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는 집을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
*
*
-성준의 집
‘허헉...허헉...오랜만에 운동하니까 힘들어 죽겠네...어쩌면 섹스 때문일 수도...’
집에 도착한 성준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멀리 돌아온 탓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래도 누나가 신고 있던 신발이 현관에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보다 일찍 도착한 듯 했다.
“뭐야? 왜 이렇게 숨을 헐떡거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집에 있던 그의 동생, 성하영이 물었다. 그녀는 친절하게도 땀을 흘리는 오빠에게 물을 한잔 건네주었다. 성준은 그녀에게 받은 물을 단숨에 들이키며 몸과 마음을 진정시켰다.
“누나는 아직 안 왔지?”
“응, 아직...왜 그러는데?”
“다행이네. 자세한 건 씻고 나와서 말해줄게.”
그녀의 질문에 성준이 잠시 고민을 했다. 그녀에게 이 사실을 말해줘도 되는 것일까. 그는 우선, 샤워를 하면서 머릿속을 정리해보고자 했다. 그 역시도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문제와 맞닥뜨린 바람에 아직 정리가 된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준은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면서 전체적으로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일단, 가장 중요한 것은 누나가 결혼을 생각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기이한 현상으로 인해서 임신을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었다. 이것은 굳이 남자친구하고의 대화가 아니더라도 성준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남자친구하고 헤어진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겠지. 어디까지나 누나의 선택이니까...그 부분은 존중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진 일은 딱히 성준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었다. 아주 잠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그녀를 도울까 고민을 해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으로 그녀가 임신을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준은 그 부분까지는 자신이 관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역시 그것뿐이구나...’
그렇다면 역시나 그가 신경 쓸 부분은 현실적인 것이 아닌, 그녀의 감정적인 문제였다. 고작 미성년자인 성준과 성하영이 그녀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최선이었다. 부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그녀를 위해서 사고를 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집에서만큼은 그녀가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성준은 이것을 떠올리자, 더욱 길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나서 그동안 그가 그녀에게 한 짓들은 죄다 실망 그 자체였다. 아니, 실망을 넘어서 엄청난 상처를 그녀에게 안겨주었을 것이다. 성준은 어쩌면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이토록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누나에게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동생이었구나...한심하다, 정말...’
생각을 하면 할수록 성준의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도저히 머리가 정리되지 않았던 그는 샤워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동생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며 같이 좋은 방법을 떠올려 볼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방금 집에 도착한 듯 보이는 누나와 마주칠 수 있었다. 그녀는 성준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인사를 했다.
“씻고 있었구나. 잠깐, 할 말 있는데, 괜찮을까?”
그녀와 마주친 성준은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될지, 어떤 식으로 대해야될지 전혀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달리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성준에게 대화를 하자고 말했다.
“아...응...당연히 괜찮지...”
도대체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성준은 그녀가 왜 이렇게 멀쩡한 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는 애써 걱정과 불안을 표정으로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소파에 앉았다.
“하영이도 와. 너도 우리 가족이니까 들어야지.”
그녀는 심지어 성준뿐만 아니라, 성하영도 자리에 앉혔다. 무슨 중대한 발표라도 하려는 것일까. 성하영이 눈짓을 주며, 성준에게 무슨 일이냐고 신호를 보냈지만, 성준은 그런 것에 하나하나 반응할 정도의 정신이 아니었다.
“심각한 얘기는 아니니까 걱정 마. 그냥, 앞으로 나도 여기서 쭉 같이 지낼 것 같아서.”
성하영이 자리에 앉자, 그녀는 바로 입을 열어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말에 성하영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고, 성준은 딱히 표정변화가 없었다. 그녀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면, 앞으로 집에서 지내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남자친구랑...사이가 아직도 안 좋은 거야...?”
성준이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묻는 것이었지만, 그는 이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상당히 몸이 떨려왔다. 혹시라도 그녀에게 또 다시 아픔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아니, 헤어졌어.”
하지만 그의 그런 걱정과 달리, 그녀는 너무나도 태연했다. 그녀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굉장히 쉽게 성준과 성하영에게 해주었다. 그동안 남자친구하고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던 그녀가 어째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헤어졌다고? 원래 결혼하려던 거 아니었어? 혹시 임신 때문에 그런 거야?”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그녀의 말에 성하영이 먼저 반응을 보였다. 성하영은 언제나 그랬듯 궁금한 것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직접적으로 언급을 하고는 했다.
“결혼할 사이이긴 했지. 근데 막상 결혼 준비하려니까, 이것저것 부딪히는 게 많더라고. 임신도 그 중에 한 문제고. 그래서 헤어지기로 했어.”
성하영의 직접적인 질문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을 했다. 슬퍼보이기는커녕 오히려 오랫동안 짊어진 짐을 내려놓은 듯 너무나도 편해보였다.
“그래서 이제는 어떻게 할 건데? 계속 우리랑 지내는 거야?”
“당연히 그래야지. 당분간 결혼 같은 거 생각 안하면서 편하게 지내려고. 그동안 내가 남자친구 때문에 너네한테 신경 못 쓴 것도 많잖아. 아버지도 그렇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가족들하고 시간을 좀 보낼까 싶어. 아, 그 전에 나를 위한 시간도 가져볼 생각이야. 여행도 마음껏 다녀야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자꾸만 카페에서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그녀가 자신의 속마음을 꺼내놓지 않는 게 아닐까 싶었다.
“많이 힘들지...?”
그래서 그는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 질문했다. 그가 이 질문을 하자, 순간적으로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말이야? 내가 왜 힘들어...오히려 속 시원한 걸?”
“힘들면 언제든지 편하게 말해줘. 나나 하영이가...현실적으로 누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없겠지만...그래도 우리는 언제나 누나 편이니까...”
“그래...그렇게 말해주니까 고맙네. 그치만 힘든 거 없으니까 너무 걱정 마. 아무렇지도 않아.”
그녀는 애써 자신의 표정을 숨기며 말했다. 성준은 그제야 그녀가 겉과 달리 속으로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자신과 동생이 그녀에게 신뢰를 얻지 못했다는 사실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 그녀에게 성준은 더 이상 속마음에 대해서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웃으면서 성준과 성하영에게 앞으로의 계획들에 대해서 말해주었고, 성준은 그저 그녀처럼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들어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