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129화 (12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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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일(금)

-다음날, 학교

어제 누나의 일 이후에 성준은 아직까지도 침울한 기분에 휩싸여있었다. 누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더군다나 그녀가 그 사실을 혼자서만 짊어진 채로 억지로 가족들에게 미소를 짓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자신의 힘으로 그녀를 도울 수 없다는 점도 자꾸만 그의 마음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당연히 학교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학교에 도착한 그는 내내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공부가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은 당연했고, 친구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박수아마저도 오늘만큼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는 거야? 우리 힘든 일이나 고민 있으면 서로 공유하기로 했던 거 기억나? 나한테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그렇지만 그런 성준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하루 종일 어두운 성준의 표정에 그녀가 직접적으로 물어봤다. 어제보다 생리통이 훨씬 좋아진 그녀는 성준과 달리 상당히 밝아진 모습이었다.

“가족 문제라고 말했잖아. 아무리 너하고 약속한 사이라도 가족과 관련된 문제까지 말해줄 수는 없어. 그건 가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그녀의 직접적인 질문에도 성준은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박수아에게 아무런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 그가 그녀에게 약점을 잡혀서 휘둘리고 있고, 그녀가 도움을 주고 있는 입장이라 하더라도 가족의 일까지 말해줄 수는 없었다. 더군다나 그 역시도 아직 이번 일에 대해서 마음 정리가 되질 않았기에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그렇지만...그래도 하루 종일 이런 상태니까 걱정돼서...”

“걱정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 이런 일로 걱정 끼쳐서 미안하고. 하지만 오늘만큼은 혼자 뒀으면 좋겠어. 부탁할게.”

때문에 성준은 그녀에게 진지하게 부탁했다. 그는 이 정도면 그녀도 충분히 알아 듣고 이해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그녀가 최근에 많은 기행을 보였고, 자신에 대해서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더라도, 이런 상황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진 않을 것이라 믿었다.

‘이상성욕에 시달리더라도 이번 건 성욕과 전혀 관련이 없으니까...그렇다고 다른 여자하고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그녀도 이해할 수 있을 거야. 하...오늘은 다른 생각은 말자. 괜찮을 거야.’

그녀가 질투심이 심하더라도 가족에게까지 질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나 어제 여러 번의 섹스를 한 만큼, 오늘은 그녀에게 미치는 능력의 영향력이 약해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성준은 오늘만큼은 부디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라며, 박수아에 대한 생각은 접고 오로지 누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생각이 빗나갔다. 그녀는 성준의 부탁에도 여전히 성준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녀는 수업시간이나 쉬는 시간 내내 혼자서 생각에 잠겨있는 성준의 주변에 맴돌았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말을 걸어오거나 이상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해서 신경 쓰이게 만들었다.

“제발...오늘은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야?”

“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참다못한 성준이 약간은 짜증이 섞인 톤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왜 그러냐는 표정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가 딱히 성준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성준을 주변에 머물면서 그를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성준은 그런 그녀가 굉장히 거슬렸다. 혹시라도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고, 그녀의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니...그렇긴 하지만...오늘만큼은 그냥...내가 없는 셈치고 다른 친구들하고도 어울리고, 그동안 나 때문에 못했던 일들도 하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친한 사람이 너밖에 없기도 하고, 딱히 할 것도 없고, 그냥 가만히 있는 게 편하니까 그렇지. 너야말로 은근히 고민하는 척 나 신경 쓰는 거 아니야?”

“하...제발 나 좀 내버려둬, 수아야. 오늘은 나 좀 괴롭히지 말라고.”

결국, 그는 그녀에게 신경질을 부리고 말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가 계속해서 자신을 신경 쓰이게 만들 것만 같았다. 그녀에게는 미안했지만, 오늘은 정말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은 그였다.

“괴, 괴롭히지 말라고? 내가 그동안 너를 괴롭혔다는 거야?”

하지만 그의 짜증은 그녀로 하여금 큰 충격을 주었던 모양이다. 성준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성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내가 오늘만큼만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잖아. 그런데 자꾸만 내 옆에서 맴돌길래...”

“당연히 네 짝궁이니까 그렇지. 그럼, 나보고 갈 곳도 없고, 만날 사람도 없는데, 쉬는 시간마다 교실 밖으로 나가라는 뜻이야?”

“그런 말이 아니잖아...하...다 알면서 왜 그래...나는 네가 이 정도는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평소의 성준이라면 그녀의 이런 태도에 당황하면서 어떻게든 달래주기 위해서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그는 누나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너무나도 벅찼다. 박수아의 투정을 받아주기에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이해해서 가만히 있었잖아. 오늘은 너한테 테스트도, 관계도 하잔 말 안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널 괴롭혔다고? 옆에서 바라만보는 게 괴롭히는 거야? 너는 그동안 내가 바라보기만 해도 싫었구나?”

“야, 박수아! 너...하...일단, 나가서 얘기하자. 애들이 쳐다보잖아.”

성준의 달라진 모습에 이번에는 박수아가 크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두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성준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심지어 다른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테스트와 관계라는 단어까지도 꺼냈다. 주변의 시선이 두려웠던 성준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교실을 나가려고 했으나, 그녀는 성준의 손을 뿌리쳤다.

“됐어! 이거 놔! 왜?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말할까봐 무서워?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말 안할 거니까, 걱정 마.”

“하...수아야...오늘 하루만 부탁하는 건데, 그게 그렇게 어려워? 내가 어려운 부탁한 거야?”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데? 옆에서 바라만 본 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네가 잘못을 했다는 게 아니라, 하루만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잖아. 내가 너한테 이런 부탁한 적 있어? 딱 오늘 하루만 부탁할 게. 딱 하루만.”

“그저께 나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 들은 거지? 그거 때문에 이러는 거지?”

성준은 그런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제 성준에게 짜증을 내는 것을 넘어서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성준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오늘은 가족일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 왜 그 얘기가 나오는 건데?”

“네가 자꾸만...나한테 화내고...짜증내고 그러잖아. 나는 그냥 짝궁이니까...걱정도 되고...그래서 바라만 봤을 뿐인데...괴롭히지 말라고 그러고...”

성준을 노려보던 그녀는 곧 자신의 화를 못 참고 눈물을 흘렸다.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는 게 표정으로 드러났다.

“다시 한 번 말할게. 걱정해주는 건 정말 고마워. 그치만 네가 이러면 내가 자꾸 신경이 쓰이니까...가족 일로 마음이 너무 복잡한데, 네가 자꾸 나한테 관심을 보이면, 간신히 정리했던 게 다시 흐트러져버려서 그랬던 거야.”

그런 그녀에게 성준이 다시 한 번 차분하게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현재 가족에 대한 일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말하면서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부탁을 했다. 이번이 그녀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 생각하며, 조금식 끌어 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그래도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할 수가 있어?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한테 이런 적 없잖아? 나에 대해서 안 좋은 얘기 들어서 그런 거지? 그게 아니고서는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없어...흐윽...너무해...흑...”

그렇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그녀는 오로지 자신의 감정만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녀의 눈물이 점점 굵어지자, 주변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한 순간에 성준과 그녀를 둘러쌌다. 성준은 뭔가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니 그러니까...하...됐다...그만하자. 오늘은 더 이상 얘기해봤자, 소용없을 것 같으니까 이쯤하자.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면, 정말 미안해. 그치만 절대로 네가 싫어서 그랬던 게 아니야. 오늘만 봐줘라, 제발. 오늘만 나 좀 내버려달라고. 부탁할게, 수아야.”

“흐흑...흑...”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잔뜩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풀 수는 없었다. 또한, 그녀는 그의 비밀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그는 이번에도 억지로 화를 다스리며, 그녀와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렇게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주변에 사람이 몰리면서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도 없었다. 성준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친구들을 돌려보냈고, 눈물을 흘리던 그녀도 곧 진정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은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한 마디를 나누지 않으며 서로의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한 주의 마지막 수업이 마무리 되었다.

‘내가 너무 심했나? 하지만 딱 오늘 하루만 부탁한 건데...하...모르겠다...일단, 주말이니까 수아 문제는 잠시 잊자. 지금은 고민해야 될 게 너무 많아.’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평소라면 교문 앞에서 박수아와 인사를 했을 그는 오늘따라 허전함을 느꼈다. 특히나 내일이 주말이라서 그런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크게 후회하진 않았다. 어차피 박수아하고는 언젠간 부딪힐 것이라 예상했던 그였다. 예상 못한 포인트에서 부딪혔다는 점이 걸렸지만, 언제까지 그녀에게 휘둘릴 수는 없었다. 이렇게라도 반항심을 보여야, 앞으로 그녀와 함께하는 것이 조금 더 편하리라 생각했다. 사귀게 되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그는 아쉬운 마음을 애써 달래며, 집으로 걸어갔다. 이럴 때일수록 급하지 않게 차분하게 마음을 먹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주말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에게 달갑지 않은 문자 두 통이 도착하게 되었다.

‘2박3일로 여행을 떠난다고? 왜 갑자기? 남자친구랑 헤어져서 그런가...? 하긴...누나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하겠지...하...주말동안 누나 위해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는데...어쩔 수 없이 다음으로 미뤄야지...’

첫 번째로 도착한 문자는 그의 누나에게서 온 문자였다. 오늘부터 일요일까지 2박3일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이었다. 주말동안 누나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던 그는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온 문자에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최근 너무나도 많은 사건들을 겪으면서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람에게서 온 문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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