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132화 (132/193)

<-- 폭주 -->

“어서와. 갑자기 연락 와서 엄청 놀랐어.”

“저도 오늘 누나랑 저녁을 먹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요.”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걸로 미안해하고 그래. 그리고 나는 준이랑 저녁 먹을 때가 제일 좋단 말이야. 얼른 들어와. 저녁은 조금 더 기다려야 될 것 같아.”

하서윤이 성준을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성준에게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은 그녀는 방금 막 저녁을 준비하고 있던 중인지,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집안에서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풍겨와 성준의 코를 간지럽혔다.

“괜히 쉬고 있는데 방해한 건 아닌가 모르겠네요.”

“내가 요리하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요즘 준이랑 저녁을 못 먹어서 엄청 아쉬웠다고.”

그녀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자, 냄새는 더욱 진하게 그의 코를 자극했다. 주방에는 온갖 요리 재료와 냄비들로 분주해보였고, 식탁은 이미 다양한 음식들이 완성되어 올려있었다. 고작 30분 만에 이런 요리들을 선보이는 그녀가 새삼스럽게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나저나 오늘 누나가 여행 갔다고?”

아직 끝내지 못한 요리를 마무리 하던 중에 그녀가 성준에게 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에게 저녁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하긴 했지만, 그녀는 자세한 부분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네, 맞아요. 2박3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해서...덕분에 오늘은 예전처럼 밤늦게까지 누나랑 저녁도 먹고 산책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다시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 그는 그녀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인만큼 이 기회를 잘 살리고자 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여기서 같이 지냈었는데, 같이 저녁 먹은 지 엄청 오랜만인 것 같아.”

“그러게요. 그때는 진짜 좋았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그는 그녀와 함께 지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비록 그녀에게 여러 번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행복했던 만큼 떠날 때의 아쉬움도 상당했다.

“맞아, 엄청 좋았었지. 그래도 집에 들어가는 게 맞는 거야. 요즘 집에서는 어때?”

그녀 역시도 그 시간들이 매우 즐겁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성준과 함께 하면서 그녀는 오랜 시간 익숙해져왔던 외로움을 잠시나마 털어낼 수 있었다. 또한, 성준을 통해서 그녀는 행복과 사랑이라는 감정을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두 사람은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말대로 성준은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와 달리 성준에게는 함께 사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이다.

“뭐, 그럭저럭이요. 요즘 하도 정신이 없어서 신경을 못 쓴 것 같기도 하고요.”

성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함부로 그녀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었다. 매번 그는 뒤에서만, 속으로만 그녀를 좋아한다고 외칠 뿐이었다.

“정신이 없어?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아뇨...그냥...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는 일이 많아서요.”

또한, 최근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서 머리가 복잡해진 상황이었다. 가족에게조차 신경 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그녀에게는 더욱 힘든 것이 현실이었다.

“무슨 일인지 나한테는 말해주기 어려운가보구나. 조금 서운한데?”

“아...그게...”

“후훗, 장난이야. 이제 이것만 하면 될 것 같아. 너무 갑자기 준비해서 차린 게 별로 없어서 미안.”

“에이, 이 정도면 저한테는 진수성찬이죠. 무엇보다 오랜만에 누나랑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저녁이 완성되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두 사람은 식탁에 마주보고 앉았다. 짧은 시간 동안 그녀가 준비한 음식은 엄청났다. 성준은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고마움을 표하며 맛있게 밥을 먹었다.

“진짜 맛있어요. 이거 때문이라도 제가 누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니까요.”

“후훗, 맛있게 먹어주니까 고맙네. 그동안 이것저것 해주고 싶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오늘은 있는 재료로 간단히 준비했어. 대신, 다음에 또 기회가 되면 정말 맛있게 해줄게.”

“지금도 충분히 맛있어요. 누나도 얼른 드세요.”

“그래, 우리 저녁 먹고 나서는 오랜만에 여기 앞에 공원이나 돌까?”

“당연히 좋죠. 이러니까 진짜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네요.”

그렇게 저녁 식사와 함께 성준과 하서윤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랜만에 같이 하는 저녁이었지만, 두 사람은 예전과 다르지 않는 모습으로 서로를 대하며 이 시간을 즐겼다. 오랜만에 맛보는 이 행복함에 성준은 물론이고 그녀 역시도 만족할 수 있었다.

그들의 행복한 시간은 산책을 마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성준은 오늘만큼은 집에 늦게 들어가도 되었기에 산책이 끝나고 나서도 그녀의 집에 머물렀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갑자기 웬 술이에요?”

특히나 하서윤은 성준과의 대화중에 치즈와 함께 와인을 꺼냈다. 그녀가 술을 먹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성준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냥...오늘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갑자기 술 생각이 나네.”

원래 그녀는 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이는 남편하기 죽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 역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오늘 갑자기 술을 꺼낸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그녀가 한 말 그대로 성준과 함께하면서 기분이 무척 좋아서였고, 두 번째로는 임신 때문이었다. 이제 임신을 하게 되면, 약 1년 정도 술하고는 안녕을 해야만 했기에 분위기 좋을 때 마지막으로 한 잔을 하고자 했던 것이다.

“저는 마시면 안 되겠죠?”

“당연하지. 준이는 와인 대신, 포도 주스.”

성준은 아직까지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녀의 기분이 평소보다 좋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또한, 그녀가 곧 임신을 한다는 사실을 굳이 떠올리거나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하네요. 와인이랑 포도주스는 너무 단가차이가 심한 거 아니에요?”

“어린 게 벌써부터 술 좋아하면 큰일이야. 그리고 그 포도주스 은근히 비싼 거다.”

“방금 엄청 꼰대 같았던 거 알죠?”

“흥, 나중에 나이 먹고 오면 얼마든지 같이 마셔줄게. 지금은 절대 안 돼.”

그렇게 저녁 식사와 산책에 이어서 이번에는 두 사람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그들의 술자리는 가벼우면서도 때로는 진지하고 무거운 모습이 있었다. 그 특유의 느낌에 두 사람은 점점 분위기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와인대신 포도주스를 마시고 있는 성준 역시도 조금씩 분위기에 흠뻑 취할 수 있었다.

“헤, 오랜만에 술 마시니까 기분 좋다.”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와인도 은근히 취한다던데.”

“원래 술은 취하려고 마시는 거야.”

여러 잔의 술을 마신 그녀는 와인임에도 벌써 취기가 잔뜩 올라온 듯 보였다.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성준의 눈에는 귀엽게도 보였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긴 하지만, 이제 곧 취하실 것 같은데...”

“치이, 취하면 준이가 챙겨주면 되잖아.”

“그것도 그렇긴 하지만...혹시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성준의 걱정에도 그녀는 마치 취하기로 각오한 사람처럼 술을 마셨다. 지금까지는 그녀의 기분이 무척 좋아보여서 말리지 않았던 성준은 이제는 어느 정도 그녀를 말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보이며, 술을 들이켰다.

“무슨 일은...헤...그냥, 기분이 좋아...”

그리고 와인 잔이 비어갈수록 그녀의 정신도 조금씩 비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입가에 미소뿐만 아니라 눈웃음까지 치면서 정신을 못 차렸다. 자꾸만 몸과 머리가 앞뒤로 기울어지기도 했다.

“왜 기분이 좋은데요?”

성준은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그녀의 집이었다. 굳이 기분이 좋아 보이는 그녀를 말려서 분위기를 깨기보다는 오늘만큼은 그녀 마음대로 하게끔 놔두었다. 그는 오늘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글쎄...왜 좋을까? 준이는 내가 왜 기분이 좋다고 생각해?”

반쯤 눈이 감겨있는 그녀가 성준에게 물었다. 취한 그녀는 자꾸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손가락을 쉴 새 없이 꼼지락 거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그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리고 문득 그녀의 게슴츠레한 표정이 참 섹시하다는 생각도 했다.

“으음...글쎄요...낮에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그의 대답은 이번에도 똑같았다.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되묻는 식으로 넘겼다. 그녀가 기분이 좋은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직접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그에게는 용기가 부족했다.

“치이, 바보...다 알면서...”

“...네?”

“아니야, 아무것도. 흥.”

성준의 대답에 그녀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녀는 매번 성준에게 속마음을 꺼낼 기회를 주었다. 그렇지만 그때마다 성준은 입을 굳게 다물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녀는 성준이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서른 두 살의 미망인인 자신에게 용기를 내기에 그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가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그녀도 이해했다.

그렇기에 어쩌면 오늘, 그녀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술을 마셨을 수도 있다. 술의 힘이란 항상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다. 그녀는 이 힘을 바탕으로 마지막 기적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준이는...어떻게 생각해?”

“...뭐가요?”

“아니...그러니까...음...임신...내가 임신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조금씩 눈이 감기던 그녀가 간신히 힘을 내서 성준에게 다시 한 번 물었다. 이번 질문은 임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의 이번 질문에 성준은 다소 당황했다. 이전까지 그녀와 만나면서 매번 듣던 질문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의 임신이 얼마 남지 않아서일까. 그는 이 질문에 어떤 대답을 해야 될지 망설였다.

“그, 글쎄요...”

“또 글쎄요...왜 맨날 준이는 피하기만 하는 거야?”

“아...그게...”

“그냥...솔직하게 말해주면 안 되는 거야? 솔직하게...”

“솔직...하게요...?”

“왜?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우리는...솔직하면...안 되는 건가...?”

이번에도 성준이 대답을 망설이자 참다못한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에 성준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용기내서 꺼낸 그녀의 말에 성준은 무언가에 강하게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정신을 차린 그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도 빨개진 얼굴로 성준을 마주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나오는데 그라고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둘 사이에 어마어마한 벽이 가로막고 있을 지라도 이대로 시작해보지도 않고, 끝내는 건 너무 허무했다. 지금까지 그가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그녀와 함께일 때마다 얼마나 행복하고 즐거웠던가. 그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음을 꺼내보이고자 했다.

“솔직하게 말해줘...솔직...하...ㄱ...ㅔ...”

하지만,

성준이 입을 열려는 순간, 완전히 눈이 풀려버린 그녀의 얼굴이 수직낙하하면서 식탁에 머리를 박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의 고백도 바닥 깊숙이 떨어지게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