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주 -->
‘누, 누구지? 내가 잘못 본 건가? 분명히...누가 소파에 앉아있던 것 같은데...’
당연히 집에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며 주방에 들어왔던 그녀였지만, 갑자기 느껴지는 낯선 인기척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두려움이 그녀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주, 준인가? 준이겠지? 어제 안 들어가고 여기서 잔거야?’
두려움에 휩싸인 그녀는 자신의 뒤에 있는, 소파에 있는 사람을 성준이라고 생각했다. 성준이라면 어제 밤까지 함께 있었고, 전에 그녀의 집에서 같이 자면서 생활한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준이라면 내가 나오자마자 말을 걸었을 텐데...아직도 자고 있는 건가?’
다만, 성준이 아닐 가능성도 이에 못지않게 만만치 않았다. 그녀가 알고 있는 성준이라면 일어나자마자 바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아직도 자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분명히 그녀가 스치듯이 확인한 그 사람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더군다나 성준이 멀쩡한 방을 놔두고 소파에서 잘 이유도 없었다.
‘만약 준이가 아니라면...누구지? 어떻게 내 집에 들어온 거지? 준이가 문을 열어줬을 리는 없고...서, 설마...강도? 그치만...왜 가만히 있지? 내가 일어났으면...나를 제압하던가, 나한테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건가?’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이 성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또 다시 그녀의 마음속에 두려움과 공포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그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해도 떠올릴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더군다나 최근 그녀는 성준을 제외하고는 만났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얼마 전에 죽은 남편의 친구와 마주치긴 했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 불쑥 허락도 없이 찾아올 리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궁금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아직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어. 돌아볼까? 설마...돌아보는 순간, 덮치는 건 아니겠지? 그치만...요즘 세상에 성범죄는 없어졌으니까...강도라면 무조건 달라는 대로 주면 될 거야...침착하자...이럴수록 침착해야 된다고 했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서워도 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먼저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돌아서야만 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 뭐, 뭐야? 마, 말도 안 돼...어째서...?’
그녀가 긴장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는 순간,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긴장과 두려움에서 곧 당황스러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녀의 집에 있는 사람의 정체는 놀랍게도 그녀의 남편이었다.
“오, 오빠? 오빠가 왜...?”
남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그제야 그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2년 전, 그녀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오랜만이네?”
미소를 지으며 그가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아직까지도 믿기지 않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씻고 바라보아도 그녀의 앞에 있는 남자는 남편이 틀림없었다.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남편의 모습에 그녀는 자신이 있는 곳이 현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안타깝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녀도 그것을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였기에 가끔씩 꿈에서 마주치더라도 아무렇지 않게, 반갑게 맞이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기분은 뭔가 이상했다. 이전에 꿨던 꿈하고는 많이 달랐다. 현실처럼 생생한 것은 당연했고, 느낌 또한 꿈과는 달랐다. 마치 정말로 눈앞에 남편이 살아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게...요즘 통 안 나타나더니...”
꿈이라는 걸 알게 된 그녀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이게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거부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었다. 이전 꿈하고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어차피 꿈이 아니던가. 그녀는 용기를 내서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네. 잘 지내고 있지?”
“맨날 그 소리...내가 잘 지냈으면 좋겠어?”
“당연하지.”
“오빠 없이 나 혼자서 행복하라고? 오빠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평소 그녀라면 꿈에서 남편을 만나면 대화를 나누기보다는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데이트를 하거나 즐겁게 놀면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생생한 꿈인 만큼 그녀는 오늘만큼은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특히나 그녀는 오늘만큼은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가 하는 말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따지듯이 되묻기도 했다.
“그러면 안 된다는 법도 없잖아. 너는 나 없이도 행복할 자격 있어.”
“오빠는...지금 행복해? 나 없이...행복하냐고?”
“물론, 네 옆에 있으면 더 좋겠지만...그래도 나한테는...설아가 있으니까...”
그녀가 남편과 대화를 하던 중에 그의 입에서 ‘설아’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그녀는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서, 설아랑...함께 있다고?”
설아는 한때, 그녀의 뱃속에 있었던, 두 사람의 아기의 태명이다. 안타깝게도 극심한 스트레스로 유산이 되면서 지금은 세상에 없는 아이였다. 죽은 아이가 죽은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럼, 설아가 나 두고 다른 데 갔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어, 어디 있는데? 보여줘...얼른! 얼른 데리고 와!”
하지만 그녀는 그 사실에 그에게 소리치듯 말했다. 남편이 죽고, 유산을 경험한 뒤, 그녀는 2년이란 세월을 폐인처럼 지내왔다. 그 시간동안 그녀는 끊임없이 두 사람을 그리워했다. 특히나 미처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한 설아에게는 죄책감에 밥조차 제대로 먹기 힘들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설아가 죽은 남편과 함께 있다니, 그 말에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순간적으로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만나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꼬옥 안아주고 싶었다.
“안 되는 거 알잖아. 설아는...태어나지 않았으니까...”
“무슨 말이야? 그런데 왜 같이 있다고 한 건데?”
“같이 있어. 그건 사실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설아를 데리고 올 수 없었다. 설아는 태어나지도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설아의 모습은 그녀의 꿈에서조차 구현될 될 수 없었다.
“같이 있다면서. 같이 있으면서 왜 자꾸 혼자만 찾아오는 건데? 얼른 보여줘. 빨리 설아 데리고 오라고!”
“미안해, 서윤아...”
설아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 역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에게 계속 소리쳤다. 어쩌면 이것이 꿈이었기에 그녀는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속마음을 그에게 털어놓는 것일 수도 있었다.
“흑흑...너무해...나빠...흐흑...”
그녀가 그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다. 꿈인데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마치 2년 전에 남편과 설아를 잃었을 때의 기억이 떠오르는 듯 했다.
“나는 꿈에서조차 너를 아프게만 하는구나. 미안해, 정말...”
“흐윽...그런 말 하지 마...자꾸 그러면...흑...더 슬프잖아...”
“그래...”
그렇게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겨서 한참의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미친 듯이 아파오던 가슴과 머리는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괜찮아졌다.
꿈인데도 불구하고 그의 품은 너무나도 따듯했고, 시간은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그녀의 눈물은 그의 품에서 금방 멈출 수 있었고, 곧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행복을 느끼게 되었다.
“기억나? 예전에는 우리 자주 이렇게 있었는데...”
그녀의 마음이 진정되자, 그가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밝은 미소가 그녀의 마음에 사뿐히 자리 잡자, 가슴에 느껴지던 통증이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랬었지. 늘 오빠 품에 안긴 채로 TV도 보고, 잠도 자고, 책도 읽고 그랬었는데...”
“그게 벌써 2년도 지났네. 그때는 어땠어? 행복했어?”
“응...두 번 다시는 내게 오지 않을 행복이었지.”
그의 말에 그녀가 2년 전 남편과 함께하던 시간들을 떠올려보았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듯 한 행복을 느꼈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움과 행복으로 가득했고, 뱃속에서 자라나는 아름다운 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남편과 아이를 잃은 뒤부터 그녀에게 행복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 혼자뿐이었다.
“나는...자기가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해.”
그런 그녀의 마음을 읽었는지, 그가 말했다. 그는 이번에는 미소가 아닌,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그런 그의 표정에 그녀 역시도 심각한 모습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럴 수 있을까? 하지만...너무 힘들어...오빠랑 설아 없이는...힘들단 말이야...”
그녀도 그의 말처럼 다시 한 번 행복을 꿈꿔본 적이 있다. 아니, 지금도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다. 2년이란 폐인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일어설 때, 그녀는 결심했다. 혼자서도 어떻게든 해내겠다고.
하지만 아직까진 많은 부분에서 힘든 점이 많았다. 대인기피증도 극복하지 못했고, 다시 일어서게 만들어준 임신에 대한 결심도 기이한 현상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여기에 혼자라는 점, 외로움이 자꾸만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너는 혼자가 아니잖아. 네 옆에는 그 사람이 있잖아.”
그녀의 말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그녀의 행복을 바랐다. 특히나 그는 그녀의 곁에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성준을 떠올렸다.
“...그 사람? 준이를...말하는 거야?”
그녀의 질문에 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성준이 자신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녀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그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졌다.
“준이는...좋은 사람이야...나를 걱정해주고 위해주는 사람은 맞아. 마치...예전에 오빠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하지만 그 애는 고작 18살 고등학생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괜찮다고?”
“행복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그리고 그 사람한테는 지금 네가 가장 필요로 하는 능력이 있잖아.”
“그렇지만...과연...그 애도 나를 좋아해줄까...?”
“이미 알고 있잖아. 그 애가 너한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잖아. 그 애한테는 네가 필요해. 너도 마찬가지고.”
그녀의 연속된 질문에도 그는 마치 두 사람의 관계를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대답을 했다. 그의 말에 말문이 막힌 그녀는 그저 입술을 다문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 그녀는 성준에게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그를 좋아하고 있었다. 나이는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그치만...오빠는...괜찮아? 내가 오빠 없이 행복해져도, 다른 사람이랑 만나도 괜찮은 거야?”
그럼에도 그녀가 지금까지 성준에게 다가서지 못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아직 그녀에게 남편의 모습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이렇게나 생생하게 남편이 떠오르는데,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 불편했다.
“그 질문에 대한 내 대답이 뭔지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알고 있다고?”
“응, 그리고 나는 서윤이 네가 원하는 대로 대답할 거야. 내가 바라는 건 네 행복뿐이니까.”
그런데 그는 마치 그녀가 당연히 이 질문을 할 줄 알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그녀의 어떤 질문에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럽게 답을 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대답을 들은 그녀는 불편함을 느끼기보다는 이상하게도 오히려 안심을 하고는 했다.
어째서 그는 그녀의 마음을 이렇게나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나 영혼이나 귀신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해서 그녀의 곁을 맴돌면서 계속 지켜봤던 것일까. 아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존재는 무엇일까.
“내가...이런 질문을 할 줄 알고 있었던 거야? 나를...계속 지켜봤구나.”
“당연히 그럴 수밖에. 나는 항상 네 속에 있었으니까.”
“내 속에 있었다고?”
“나는...네가 만들어낸 존재니까.”
“내가...만들었다고?”
그가 그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곧 그녀가 만들어낸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꿈속에서 만들어낸, 그녀의 무의식이 남편의 모습을 통해서 반영된 허구의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