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퇴양난 -->
“하, 하영아?”
“오빠,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으응...그래...”
왜 갑자기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성준은 그녀를 따라 거실로 이동했다. 유은정의 말에 머리가 복잡해져있던 그는 동생까지 이런 모습을 보이자, 더욱 당황했다.
“바로 물어볼게. 저 언니가 한 말, 사실이야?”
“무, 무슨...말...?”
특히나 그녀의 말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유은정과 성준이 나눈 대화를 몰래 엿들은 것일까. 성준은 모르쇠로 일관하고자 했지만, 동생의 인상은 더욱 일그러졌다.
“방에서 둘이 나눴던 말 말이야. 전부 사실이야? 아니지? 내가 잘못들은 거지?”
“바, 방에서...라니...? 너 설마...”
“자꾸 저 언니가 우리 집에 찾아오니까...둘이 무슨 얘기 나누나 궁금했어.”
“아무리 그래도 대화를 엿 들으면...”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래서 그 대화가 전부 사실이라는 거야?”
역시나 그녀는 성준과 유은정의 대화를 모두 엿듣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보면 오빠를 향한 그녀의 경멸스러운 표정이 이해가 되었다.
“아니, 그러니까...그게...”
그녀가 대화내용을 전부 들었다는 사실에 성준의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가족들에게 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던 비밀이 이런 식으로 어이없게 발각되었다는 생각에 그는 신지은과의 관계를 누나에게 들킨 것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그의 등 뒤에서는 자꾸만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차라리 동생에게 모든 사실을 고백할까. 아니면, 끝까지 모르는 척하면서 버틸까. 그는 억지로나마 정신을 부여잡고 최대한 머리를 굴러보았다.
“정말로 오빠가...저 언니를 덮친 건...아니지...?”
“그게...”
“얼른 대답해! 자꾸 이런 식이면 언니한테 바로 전화하는 수가 있어.”
하지만 아무리 고민하고 고민해도 딱히 답은 없었다. 그녀는 이미 대화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 성준이 유은정과 섹스를 했고, 앞으로도 섹스를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두 알고 있는 상태였다. 다만, 오빠의 입으로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듣기 위해 물어보는 것이었다.
“...맞아...그치만 내가 일방적으로 덮친 건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였어...내 능력이, 쌤한테도 영향을 미친 것 같아. 그것도 예전에 너하고는 달리, 아주 강력하게...”
그렇기에 성준은 그녀에게 사실대로 얘기해줄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동생에게 꺼내기에는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운 이야기였지만, 그는 솔직하게 말하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지은이 언니에 이어서 어떻게 그런 짓을...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고 약속했잖아! 그리고 조금 전만해도 아무 일 없다고 했으면서 너무 뻔뻔한 거 아니야?”
“지은이 누나는 서로 원해서 그랬던 거야. 물론, 능력 탓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임신이 목적이었으니까...반면에 이번 일은 전적으로 능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어. 서로 원하지 않았지만, 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거라고...속인 건...미안해...”
“하...그래서 앞으로 그 능력을 통제하기 위해서 그 언니랑 계속...그...관계를 가져야 된다고? 꼭 그래야 되는 거야?”
“그러고 싶진 않지만...쌤 말로는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니까...그리고 쌤도 이미 내 능력에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고...”
“그 언니는 이 능력에 대해서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아는 건데?”
“아는 사람 통해서 정보를 얻은 것 같아.”
“하...이게 무슨 일인지 도저히 모르겠네...”
성준의 설명에 그녀가 연신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오빠가 능력을 잘 통제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얘기를 듣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평소에 오빠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걱정이 많았던 만큼, 그녀의 입장에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가만...그 언니랑 계속 해야 된다는 건...앞으로도 그 언니가 오빠 능력에 계속 영향을 받게 된다는 말 아니야?”
“뭐...그런 셈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영향을 받으면 계속 지속되는 모양이야.”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그녀는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떠올랐다. 그 걱정이 떠오르자,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는 말은...나도...언젠간 저번처럼 오빠 능력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뜻 아니야?”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걱정은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 역시도 분명히 성준의 능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의 일은 그녀에게는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이불을 걷어차고 싶을 정도로 민망했던 기억이었기에 당연히 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성준과 유은정의 대화가 사실이라면, 그녀 역시도 여전히 성준의 능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언제든지 흑역사를 되풀이할 수 있다는 뜻이었고, 심각할 경우에는 오빠와 섹스를 해야만 되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점이 걱정되고 불안했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너나 누나한테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니까.”
“그러면 저 언니하고는? 저 언니하고도 절대 원하지 않았었다면서.”
“그건...”
“은정 언니 말대로 오빠는 제대로 자기 능력을 통제할 줄 모르는 상태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오빠를 믿을 수가 있어? 지금 당장이라도 나한테 영향을 미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녀의 말에 성준의 말문이 막혔다. 그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성준 역시도 항상 그 부분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동생과 누나한테 제대로 관심조차 기울이지 못했던 그였다. 조금이라도 두 사람과 얽혔다간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큰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맞아...네 말이 맞아...그래서 나도 최대한 그런 일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중인데...이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어...”
성준은 그런 자신의 능력이 무척이나 원망스러웠다. 이 능력 덕분에 섹스라는 엄청난 쾌감을 얻을 수 있었고, 평생 모태솔로로 지낼 뻔했던 그에게 여러 여자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하지만 반대급부로 인한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그동안 있었던 여러 사건사고들은 물론이고, 이제 성준은 자기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만 끼치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어쩌면 실험실에 갇혀서 사는 게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고민이 되기도 했다.
“만약...나나 언니가...은정 언니처럼 되면...그때는 어떻게 할 건데?”
힘들어하는 성준에게 성하영이 물었다. 그녀는 이 문제로 오빠가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렇지만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면 그에 대한 대책이 중요했다. 아무리 힘들어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만 했다.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인상을 쓰면서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정말로 생각도 하기 싫은 그 일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때도 박수아나 유은정에게 그랬던 것처럼 섹스만이 답일까.
“그렇게 된다면...하...만약 그렇게 된다면...신고를 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렇지만 아무리 그런 상황이 벌어져도 동생과 누나하고는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두 사람에게 실수를 할 수 없었던 그는 그 순간에는 결심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희생을 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신고해서 잡혀가겠다고? 헌터부대에 잡히면...바로 실험실 행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되면 이 상황이 끝나기 전까지는 영영 우리하고 만나지 못하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상황이 상황이니까...그게 누나랑 너한테는 가장 안전한 방법일 거야.”
“하...진짜...처음에는 그냥 재미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는데...이젠 무섭고 짜증나고...완전 싫다...”
성준의 말에 그녀는 또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말한 대책이 지극히 현실적이었지만, 이대로 기이한 현상이 끝날 때까지 오빠와 멀리 떨어져있어야만 된다는 상황이 싫었다. 더군다나 실험실에서 그가 무슨 짓을 당할지도 알 수 없었기에 머리가 복잡해져만 갔다.
“미안해...괜히 나 때문에 누나랑 네가 고생이네...”
“그러니까 처음부터 속이지 않고 사실대로 말했으면 얼마나 좋아.”
“미안...”
“하...일단, 은정 언니랑 만나면서, 그러니까...관계 가지면서 버텨볼 생각인 거야?”
그녀가 한숨과 동시에 소파에 앉으면서 성준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일단, 지금 당장은 그녀도 그렇고, 성하은에게도 아직 큰일은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성준의 성욕을 컨트롤하는데 최대한 머리를 쓸 필요가 있었다.
“뭐, 그래야겠지. 혼자 하는 것보다는...이제 훨씬 좋다고 했으니까...”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우리 오빠 진짜 답답하네. 이 정도일 줄은 정말 몰랐어.”
성준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가 한심하고 못났다고 생각했다. 능력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에도 문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게...내가 너무 내 자신을 과대평가한 것 같아.”
성준 역시도 자신의 문제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처음만 하더라도 그는 이 능력을 숨기기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매우 단순하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능력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에도 혼자서 통제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결과는 자꾸만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지금은 동생에게까지도 믿음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지금부터라도 혼자서 판단하지 말고, 주변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는 게 맞는 것 같아, 오빠.”
“그래야겠지...”
여기까지 온 이상 그에게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그녀의 말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맞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점은 박수아를 제외하고는 성준을 돕겠다는 사람이 제법 있다는 점일까. 성준은 그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다.
“무슨 일 있으면 무조건 비밀로 하지 말고, 제발 나나 언니한테 바로 말해줘. 우린 가족이니까 무조건 오빠 편이란 말이야. 여기까지 온 이상, 이제 부끄러울 것도 없잖아.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 그리고 나도 영향을 받고 있는 상태고...”
“미안...더 이상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특히나 누나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는 상태고...”
“누나가 힘들어하는 게 누구 때문인데? 이제 남자친구하고도 헤어졌으니까, 언니도 그렇고 나도 무조건 오빠한테만 관심 가져야겠어.”
성준을 따라 성하영도 다짐을 했다. 그녀는 앞으로 오빠에게 조금 더 관심을 기울이고자 했다.
“그러다가 누나나 너한테 일이 생기면 어쩌려고...두 사람은 떨어져있는 게 맞다고 생각해.”
“언니는 몰라도 나는 괜찮으니까...”
“뭐가 괜찮다는 거야...엄청 당황했으면서...”
“그때는...너무 갑작스러워서 그렇고...혹시라도 이후에 나한테 그런 일이 생기면...나는 괜찮으니까...”
“무슨 소리야...이런 상황에서 그런 장난치고 싶냐? 하여튼 너랑 누나한테는 절대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더 이상은 네 말대로 이 능력을 나 혼자서만 짊어질 생각도 없으니까.”
다만, 그녀의 관심은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준은 그녀의 말을 짓궂은 장난이라 생각하며 넘겼지만, 그녀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있어 보였다.
“은정 언니한테 도움 받을 거야?”
“뭐...쌤은 내가 싫어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그밖에도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이 있으면 최대한 부탁해봐야지.”
“앞으로는 절대 거짓말은 금지야.”
“알았어. 대신, 누나한테는 내가 직접 설명할게.”
그렇게 그것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났다. 아직 성하영은 오빠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망설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성준에게 전화가 걸려오면서 대화가 마무리 되고 말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산 넘어 산이라더니...오늘도 힘드네...’
성준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그가 아침부터 기다리던 하서윤이었다. 핸드폰 화면에 떠있는 그녀의 이름에 성준의 심장이 또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그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통화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