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퇴양난 -->
“역시 누나하고 공무원은 조금 안 어울렸어요. 잘 그만두셨다고 생각해요. 이제부터는 누나가 원하는 일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지. 물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우선이겠지만.”
성준과 김소영은 여전히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즐거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렇게 가끔씩 진지한 이야기를 통해서 두 사람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 친분을 과시하고는 했다.
‘고시원 나온 것 때문에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은 건가? 왜 자꾸 누나가 뭔가 숨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
다만, 성준은 아까부터 자꾸만 그녀의 표정이 거슬렀다. 그는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대화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마음이 쓰이게 만들었다.
성준은 그녀의 표정에 애써 말하기 힘든, 안 좋은 일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왠지 모르게 다른 이유, 그것도 자신에게 볼일이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성준은 빨리 그녀가 자신에게 속내를 밝히기를 바랐다.
“너는 정말로 요즘 별 일 없는 거야?”
그녀가 성준에게 물었다. 근황토크는 조금 전에 끝난 상황인데, 왜 또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그녀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성준은 조금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할 뿐이었다.
“그냥 그저 그래요. 학교 다니고, 공부하느라 바쁘죠. 별다른 일은 없어요.”
“그래? 정말로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꼭 별 일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요? 너무해요.”
성준의 형식적인 대답에 그녀는 또 다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한 번 질문은 던졌다. 그녀의 질문에 성준은 장난을 치며 받아쳤지만,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리가. 그나저나 너는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그리고 이어서 그녀는 뜬금없이 성준에게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물었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 혹시 그녀도 기이한 현상 때문에 심각한 고민이 있는 것일까. 성준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녀에게 역으로 질문을 했다.
“요즘 그거 때문에 다들 난리도 아니잖아요. 혹시 기이한 현상 때문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나는 아직 결혼할 마음도 없고, 애를 가질 생각도 없으니까 나랑은 관련 없지. 그냥 남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했어. 무엇보다 준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이야.”
“저요? 하하...제 생각은 왜요? 남자들이야 다 똑같죠.”
그녀가 기이한 현상과 관련된 성준의 생각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되는 그녀의 이야기에 성준은 더 이상 어물쩍 넘어가기보다는 조금은 진중하게 고민을 해보았다. 그리고 그는 곧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가만...그러고 보니까...기이한 현상이 언제부터 시작이었더라? 고시원을 내려오고 나서였나? 아니, 고시원에서 내려오기 전부터였어. 그렇다는 말은...소영 누나는 내가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그래서...나한테 이런 질문을 하는 거야?’
기이한 현상은 성준이 고시원에서 내려오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고시원에서 내려오기 전, 마지막 날에 그녀와 섹스를 하려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당연히 그녀의 입장에서는 성준이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젠장, 왜 이걸 이제 알았을까...’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부터 성준의 마음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대화를 하면서 나왔던 그녀의 표정은 어쩌면 이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자들이 다 똑같다고?”
“아...물론, 임신 능력자들은 다르겠지만요...”
이에 성준은 먼저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말을 꺼냈다. 아직 정체를 밝히는 건 조심스러웠고, 이런 식으로라도 이야기를 꺼내서 그녀가 먼저 물어보길 바랐다.
“그렇지. 임신 능력자들은 다르겠지. 유일하게 임신이 가능한 사람들이니까. 그 얘기 들었어?”
“어떤...이야기요?”
“정부에서 임신 능력자를 발견했다고 신고하는 사람들한테 포상금을 주겠다고 했던 거?”
“아...”
하지만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성준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녀가 꺼낸 이야기는 성준도 들은 바가 있었다. 아직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은 아니었지만, 임신 능력자를 원하는 히어로 협회와 헌터부대에서 신고에 대한 포상금을 준다는 이야기를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왜 성준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만약 그녀가 성준이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에 확신을 품고 있다면, 문제가 커질 가능성도 있어보였다.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왜 그런 이야기를...?”
“그냥, 혹시 주변에 임신 능력자가 있으면 신고해서 포상금이나 받을까 생각중이거든. 공무원도 때려 쳤으니까, 이제부터는 돈 걱정 해야지. 돈이 있으면 아버지도 아무 말 안하시지 않을까?”
“아...그렇군요...하지만 임신 능력자가 흔한 건 아니잖아요.”
“그게 문제지. 임신 능력자를 어디서 찾아야 되나...혹시 아는 임신 능력자 있어?”
그리고 이번 대화를 통해서 성준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성준이 임신 능력자라는 사실을 100%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식의 질문들을 꺼낼 수는 없었다.
‘미치겠네...설마 나를 신고하겠다는 뜻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까 만났을 때, 나를 계속 찾아다녔다는 식으로 말했었어. 설마...정말로 나를 신고하고 포상금을 받겠다는 거야?’
그녀가 성준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준은 그녀가 자신을 협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성준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뭐...있긴 있는데...왜요...? 정말로 신고하시려고요?”
“글쎄...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네 생각은 어때?”
그녀는 이제 표정까지 숨기지 않았다. 능글맞은 모습으로 대놓고 자신의 의도를 드러냈다. 이대로 가다간 속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던 성준은 결심을 내렸다.
“정확히...원하시는 게 뭔데요?”
잠시 주변을 둘러보며 근처의 사람들을 살피던 성준은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직접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후훗, 내가 너 찾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폰이 망가지는 바람에 연락처고 뭐고 다 사라져 버린 거 있지? 그런데 이렇게 우연히 길에서 만날 줄이야.”
“절 왜 찾으신 건데요?”
“이미 말했잖아.”
“...포상금이요?”
포상금이라는 단어에 그녀가 음흉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역시나 그녀의 목적은 돈이었던 것일까. 성준은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건 없지만, 포상금 양이 꽤 된다고 하더라고. 그것도 지금처럼 임신 능력자가 귀할 때일수록 더 값이 나가겠지?”
“제가 임신 능력자라는 건 언제부터 아신 건데요?”
“바로 알지는 못했어. 폰이 망가져서 인터넷을 확인할 수 있어야지. 주말에 폰 고치러 가면서 기이한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었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너를 떠올렸고.”
“그래서 고시원도 그만두고 저를 찾으러 다니신 거예요?”
“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돈 욕심은 없었어. 그런데 고시원 생활이 너무 지겹잖아. 그러다가 포상금 소식을 듣고 나서는 생각이 바뀐 거지.”
그녀의 이야기에 성준은 기가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성준이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의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녀가 고작 돈에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그는 믿겨지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이대로 신고...하실 거예요?”
“아니, 바로 신고할 수는 없지. 너도 가족이나 친구가 있을 텐데, 그 사람들하고 인사는 제대로 해야 되지 않을까?”
“하...어쨌든 신고는 하겠다는 말이군요. 꼭...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요.”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세상은 결국 돈이 전부거든. 돈 때문에 나라도 팔아먹는데, 그깟 한 달 우정 따위야 아무렇지도 않지.”
이대로 그녀가 신고를 하면 성준은 어떻게 될까. 히어로들에 의해서 헌터부대에 의해서 바로 실험실로 직행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족들하고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게 될 것이고,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하고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 18살 고등학생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도 힘든 현실이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끔찍한 생각들이 떠오르자 성준은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딱히 없어보였다. 그나마 유일한 방법이라면 그녀를 때려눕혀서 감금시키는 것이겠지만,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언제...신고하실 계획인데요? 그러다가 제가 도망치면 어쩌려고요?”
“도망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보단 가족들이나 친구한테 신고하게 만들어서 포상금을 챙길 수도 있겠고.”
“저는...잡히고 싶지 않아요. 도망치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부탁할게요, 누나. 제발...한 번만 봐주세요...”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릎 꿇고 비는 것뿐이었다. 그는 이대로 잡히고 싶지도 않았고, 도망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이제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고, 능력을 통제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겼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래서 지금 신고하지 않겠다는 거야. 대신, 조건이 있겠지?”
“조건...이요?”
다행히 그녀는 지금 당장 성준을 신고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대신, 그에 대한 조건을 한 가지 제시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조건은 무엇일까.
“일단, 돈은 무조건 필요해. 포상금처럼 억대까지는 필요 없겠지만, 어느 정도는 너한테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돈...그리고요?”
“네 능력을 원하다고 볼 수 있지.”
“제...능력이요? 설마...”
“맞아. 그래도 우리 한 때는 삽입까지 했던 사이니까 괜찮지?”
그녀가 원하는 첫 번째는 돈이었고, 두 번째는 섹스였다. 원래부터 성욕이 많은 편에 속했던 그녀는 성준의 능력을 통해서 자신의 성욕을 해소하고자 했던 것이다.
“돈 때문에 배신에다가 협박까지 해놓고선...저랑 그걸 하자고요?”
“왜? 싫어? 고시원에서는 좋다고 만졌으면서? 이제는 임신 능력자라고 나보다 더 젊고 예쁜 여자만 좋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하...아무튼 알았어요. 하지만 돈은...조금 힘들 것 같아요. 알다시피 제가 학생이라...”
“돈이 없으면 돈을 벌어야겠지.”
“제 나이에 알바가 한계라는 거 알잖아요.”
성준은 그녀가 내세운 조건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협박에 이어서 섹스를 하자는 말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았고, 자신이 고등학생임을 잘 알면서도 많은 액수의 돈을 달라는 그녀의 요구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마련해야지. 정 돈을 구하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돈을 벌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도 말했다.
“도와준다고요?”
“네 능력만 활용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돈을 끌어 모을 수 있으니까.”
“그게 무슨...? 혹시 임신 클리닉 말하는 거예요?”
임신 능력자의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성준은 가장 먼저 임신 클리닉을 떠올렸다.
“임신 클리닉? 그게 뭐야?”
“아...그러니까 임신을 해주겠다고 하면서 돈을 받는...”
“야, 그런 게 가능하겠냐? 그걸 어떻게 우리 둘이서 하겠어. 바로 들켜서 잡혀갈걸? 임신은 임신으로 끝나는 게 아니잖아. 출산할 때까지, 아니, 그 이후까지 우리가 신경 써야 될 텐데, 우리 둘이서는 불가능해.”
그렇지만 그녀의 말대로 임신 클리닉은 굉장히 위험했다. 이재희처럼 철저한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들킬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말하는 돈 버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러면 어떤...?”
“네가 말한 거에서 딱 임신만 제외하는 거야.”
“...네?”
“성매매. 이거만큼 쉽게 돈 버는 게 없거든.”
그녀가 떠올린 방법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미성년자인 성준에게 성매매를 꺼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