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퇴양난 -->
“누나? 이제 오는 거야?”
성준을 부른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친누나, 성하은이었다. 2박3일 여행을 떠난 그녀는 방금 막 이곳에 도착했는지, 한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가 잡혀있었다. 성준은 재빨리 그녀에게서 캐리어를 받아들었다.
“원래는 조금 더 늦게 도착할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네. 준이, 너는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아...잠깐 어디 좀,..”
“말만 근신이고 그동안 전혀 안 지키고 있었구나?”
“미안...”
그녀와의 만남에 성준은 놀람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와 성준은 능력 때문이라도 당분간 집에서 근신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이렇게 밖에 나갔다 오는 모습을 들켜버렸으니, 성준의 입장에서는 변명조차도 할 수 없었다.
“괜찮으니까 됐어. 이젠 더 이상 과거 일 가지고 뭐라고 하고 싶지 않으니까. 지금이 중요하고, 앞으로가 중요한 거잖아. 과거에 얽매이며 살 수는 없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성준에게 잔소리를 하거나 전혀 짜증내지 않았다. 성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니, 환하게 미소가 떠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의 기분은 상당히 좋아보였다.
“여행은...어땠어?”
“혼자 가는 여행은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좋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다녀올 걸 그랬나봐. 그동안 돈 때문에, 시간 때문에, 사람 때문에 미루기만 했었던 게 너무 아쉬울 정도야.”
그녀의 기분은 여행 때문으로 보였다. 그녀는 이번 여행으로 많은 즐거움을 얻었는지 시종일관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행이 끝난 지금까지도 이러는 걸 보면, 그녀에게 이번 여행은 정말 특별하게 다가온 듯 했다.
“다행이네. 그동안 쉼 없이 달려왔잖아. 이제라도 누나만의 삶을 찾았으면 좋겠어.”
“후훗, 너랑 하영이가 말만 잘 들어도 문제없을 거야. 그나저나 나 없는 동안 큰일은 없었지? 이쯤 되면 하영이가 한 번 사고를 칠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게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집으로 이동했다. 하서윤과의 만남을 기대했던 성준은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누나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봤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한 편으로는 이런 누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하영이도 이젠 정신 차렸겠지. 그리고 하영이보단 내가 문제지, 뭐.”
“그래, 이제부턴 준이 너한테 조금 더 관심을 가져야겠어. 임신 능력자...다른 나라도 요즘 난리더라.”
그래도 성준은 용기를 내서 이야기를 꺼냈다. 그의 동생, 성하영이 했던 말처럼 이제는 가족들에게도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가 되었다. 더군다나 성준의 누나는 유은정하고도 친했기에 그 일을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상처와 충격을 주긴 싫었지만, 그래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도 이제부터는 감추지 않을 생각이야. 누나나 하영이는 가족이니까...솔직하게 말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그동안 이것저것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구나.”
성준의 말에 그녀가 살짝 걱정하는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제야 동생이 자신을 믿고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에 그녀는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여행 전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유해지기도 했다.
“뭐, 이것저것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 누나 말대로 이제 더 이상 나 혼자서는 안 될 것 같아. 이걸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된 거야. 그렇게 생각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부턴 다 같이 노력해보자. 분명, 좋은 방법이 있을 거야.”
그녀는 뒤늦게나마 도움을 요청하는 성준에게 결코 짜증을 내거나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성준에게 이해한다면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녀의 말에 성준은 가슴 속에 쌓여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녀의 반응에도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제 앞으로 그가 누나와 동생에게 들려줄 이야기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내용들일 것이다. 차마 모든 비밀을 말해주지는 않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에게 큰 충격을 줄 것이 분명했다. 성준은 두 사람이 자신의 능력과 함께 자신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러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그럴 거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 들어가서 하자.”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혼자 있던 성하영이 두 사람을 맞이해주었다.
“둘이 같이 들어오네?”
“바로 앞에서 만났어. 그동안 잘 지냈지?”
“오히려 언니 없어서 너무너무 좋았지. 물론, 오빠가 사고를 좀 치긴 했지만. 여행은 재밌었어?”
“응, 완전. 나중에 너하고도 같이 가야겠다. 둘이 가도 분명히 재밌을 거야.”
“에이, 난 언니랑 가는 건 좀 별론데. 그래도 한 번쯤은 같이 가줄게.”
성하영은 말로는 툴툴대면서도 성하은을 반갑게 맞이했다. 고작 2박3일이었지만, 세 사람이 이렇게 모인 게 무척이나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다.
세 사람은 성하은의 짐을 정리하면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세 사람의 이야기는 주로 성하은의 여행 이야기였다. 여행지에서 그녀가 겪은 이야기를 들으며, 셋은 너무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최근 세 사람에게는 안 좋은 일들이 가득했다. 임신 능력자인 성준은 당연했고, 성하은에게도 안 좋은 일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웃을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오랜만에 셋이서 나누는 즐거운 이야기에 기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이야기는 곧 진지한 분위기로 빠지게 되었다. 여행과 관련된 이야기가 모두 마무리 되고, 세 사람은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당연히 성준이 놓여있었다.
‘드디어 내 차례구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까. 누나랑 하영이가 내 이야기를 이해해줄 수 있을까. 하...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네. 그렇지만 이제는 말해야 되니까...용기내서 꺼내보자...’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성준은 고민했다. 두 사람에게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까. 성준은 이 부분에 대해서 먼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아무리 두 사람이 가족이고, 그의 편이라도 모든 이야기를 해줄 수는 없었다. 특히나 하서윤과 관련해서는 무조건 비밀로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자칫했다가 사랑하는 그녀에게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성준은 최대한 선을 잘 정하고자 노력했다. 두 사람이 받는 충격이 적정선을 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성준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정말로? 그 정도로 심했던 거야? 왜 그동안...아니...말하기 쉽진 않았겠지...지금은 어떤 건데?”
“지금은 그래도 성욕과 관련된 부분은 많이 좋아진 편이야. 지속적으로 성욕 해소를 위해 노력해서 그런지, 갑자기 뜬금없는 타이밍에 성욕이 생기는 건 없어졌어.”
“정말이지? 정말로 괜찮은 거지?”
“응, 내 성욕은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누나한테 들켰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성욕 컨트롤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거든.”
성준의 이야기의 시작은 먼저, 그의 성욕에 대해서부터였다. 그는 현재 자신의 성욕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과거에 성욕 때문에 어떤 고생을 했고, 어떤 문제를 일으켰는지 솔직하게 말했다. 지하철에서 최한결을 성추행한 일부터 짝궁인 박수아의 앞에서 발기하는 바람에 능력을 들킨 사건까지도 이야기를 했다.
다행히 이 정도 수준의 이야기에 두 사람은 크게 놀란 눈치는 아니었다. 이미 성준이 신지은과 어떤 관계이고, 두 사람이 섹스하는 영상까지 본 마당에 이 정도로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더 큰 문제? 어떤 건데?”
“하영이는 이미 알고 있는 문제인데...음...조금 충격 받을 수도 있을 거야. 그래도 끝까지 들어줬으면 해.
“응, 알았어. 이제 준이가 내게 손을 내민 이상, 비난하지 않을 거야.”
다만, 앞으로의 이야기가 문제였다. 성준의 이야기는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성하은에게 예고를 한 뒤,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그의 이야기에 성하은의 표정은 갈수록 어두워졌고, 굳어만 갔다.
“저, 정말로 은정이랑...준이, 너랑...그, 그랬다고?”
“맞아...나중에 쌤한테 직접 물어봐도 될 거야. 쌤도 누나한테 말해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어떻게...”
특히나 성하은은 유은정과 관련된 일에 더욱 충격을 받은 듯 했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친구에 이어서 가장 아끼는 후배하고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에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정말 심각한 상태였구나...”
그래도 다행인 점은 충격은 받았지만, 과거와 달리 그녀가 이 충격과 스트레스를 분노로 해소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성준에게 분노하기보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그밖에 다른 일은 없는 거야? 이게 끝이지?”
“으음...한 가지 더 문제가 있긴 해.”
“또 있다고? 이번엔 어떤 건데?”
“아무래도 능력을 통제하지 못하다 보니까...누나나 하영이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겠지.”
“설마...아직까지 우리한텐 아무 일도 없었잖아.”
“누나한테는 그랬지. 하영이는...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어.”
“하영이한테!?”
유은정에 이어서 성준은 성하은에게 동생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성하영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 이야기가 사실임을 표하자, 성하은이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이번 이야기가 그녀에게 조금 더 큰 스트레스를 준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다행히 하영이한테는 아직까지 큰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닌 것 같아.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그 이후로는 아직까진 별일 없고. 그렇지?”
성준이 성하영에게 물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현재까지 성하영에게는 그때 일 이후로 별일이 없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이 능력 때문에 문제가 조금 심해졌어. 은정쌤 말로는 능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그...관계를 가지는 것만이 답이라고는 했는데, 아직 그것도 확실하진 않으니까.”
성준은 두 사람에게 오픈할 이야기의 선을 여기까지로 정했다. 그밖에 오늘 있었던 일이나 하서윤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꺼내놓지 않았다. 그는 바로 앞으로 이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 관련된 주제로 대화를 넘겼다.
“임신 능력자라는 게...정말 문제가 많구나...”
“그래서 차라리 실험실로 가버리는 건 어떨까 고민 중이기도 해.”
그리고 그는 그 중에서도 실험실에 대해서 두 사람의 의견이 궁금했다. 지금 그가 처한 현실은 상당히 암울했다.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실, 실험실 행이 정답이기도 했다.
“그건 절대 안 돼. 그랬다가 기이한 현상이 영영 끝나지 않으면 어떡해? 그러면 두 번 다시 준이, 너랑 못 만나는 거잖아. 그건 싫단 말이야.”
성준의 말에 성하은은 성하영과 똑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역시나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는 것에 찬성할 사람은 없어보였다.
“그래서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이야. 그전까지는 최선을 다해봐야지.”
“그럼, 은정이하고는...계속 그런 관계로 지내야 되는 거야?”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 성욕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니까.”
“하...내가 은정이하고 한 번 만나봐야겠네. 지은이한테도 말해봐야겠다.”
“미안해. 이런 이야기 많이 불편할 텐데.”
성준은 이런 이야기를 가족들에게 꺼내는 것에 상당한 죄책감을 받았다. 민망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당연했고, 특히나 두 사람에게 짐을 떠넘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어차피 나중에 알게 될 일이라면, 조금이라도 미리 아는 게 중요하니까.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누나는 그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성준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거웠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하서윤을 만나지 못해 아쉬운 마음도 지금은 모두 훨훨 날아가 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그것으로 세 사람의 대화가 끝이 났다. 성준의 솔직한 이야기 뒤에 세 사람은 대처방법에 대해서 한 시간이 넘도록 모의를 해봤지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정보를 모으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대화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성준은 바로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자 했다. 잠시 하서윤에게 연락을 해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오늘은 이대로 잠을 자고 싶었다. 편안해진 지금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잠에 빠지고 싶었던 그는 그대로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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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영
한편, 대화를 마치고 마찬가지로 방에 들어간 성하영은 성준과 달리 쉽게 잠에 들지 못했다.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편하게 먹은 채 잠을 청해봤지만, 자꾸만 딴 생각이 떠오르면서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애써 그 생각들을 억눌러 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생각들이 침투해 그녀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잠을 방해하는 그 생각들은 과연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