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149화 (149/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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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야 제가 잘못을 했으니까...”

“당연히 준이, 네가 잘못하긴 했지. 내가 그렇게 경고했는데도 함부로 능력을 사용했으니까. 그치만...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해. 그 부분에 대해서 일방적이라느니, 덮쳤다는 식으로 표현한 건 조금 지나쳤던 것 같아.”

유은정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성준에게 심하게 대했음을 인정했다. 그녀의 집에서 벌어진 일은 두 사람 모두 의도했던 상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성준에게 심하게 화를 냈던 부분에 대해서 사과를 했다.

“아니에요. 결과적으로 쌤은 의식이 없었잖아요. 쌤 의견 없이 제 멋대로 판단했으니까 일방적인 것도 맞죠. 그때의 일은 전부 제 탓이에요. 정말 죄송해요.”

그녀의 사과에 성준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도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죄송한 마음을 전달했다. 성준의 사과를 끝으로 두 사람의 표정은 전보다 훨씬 가벼워질 수 있었다.

“궁금하지 않아? 내가 왜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했는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능력 때문에 발생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더라도 그 일은...누구에게나 충격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렇지...나한테는 엄청 충격이었어. 그때의 상황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마치 유체 이탈한 기분이랄까. 생각도 할 수 있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 다 느껴지는데, 몸이 전혀 내 말을 듣지를 않는 그런 거 말이야. 나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처럼 말이야. 웃긴 건 그런 상황에서도 감정이나 느낌은 완전 생생하다는 점이지.”

사과 이후에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 상황 이후로 성준에게 차갑게 대했는지 성준에게 말해주고 싶어 했다. 그것은 그녀에게는 굉장히 불편한 얘기였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성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자 했다.

“차라리 기억을 못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네요...”

“그러게...차라리 그랬으면 훨씬 좋았을 텐데...그랬으면 과거의 일을 그렇게 생생하게 떠올리지도 않았겠지...”

“죄송해요...”

“마치 성폭행 당하는 느낌이었어. 그 상황이 너무나도 괴롭고 싫은데, 막상 몸은 반응하고...혹시 내가 전에 말했었나?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고. 고등학생 때만 하더라도 엄청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거든. 그런데 어떤 일을 계기로 완전히 바뀌었지.”

“과거에 힘든 일이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그때, 저희 누나가 많이 도와줬다고...”

그녀의 과거 이야기에 대해서는 성준도 친누나를 통해서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었다. 정확히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꽤나 큰일이었고, 누나가 그녀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알고 있었다.

“응, 맞아. 하은이 언니 없었으면 지금의 나도 없었겠지. 그래서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지내는 거고.”

“혹시 그때 사건하고 저하고의 일이 관계있는 건가요?”

“...그렇겠지?”

“많이 힘든 이야기면 굳이 안하셔도 괜찮아요. 제가 뭐라고...”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예전처럼 두렵다고 도망치기 싫어서...이제는 맞서 싸워야지...”

성준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는 중간 중간 그때의 일이 떠올랐는지, 괴로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성준은 굳이 그녀를 다시 한 번 과거로 되돌려 보내기 싫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참아내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본격적으로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성준은 조금이라도 그녀의 마음이 풀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경청했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경청하고 공감하고 위로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녀의 마음을 감싸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을 도와준 그녀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능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 대한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충격적이었다. 그녀가 학생 시절에 교생선생님한테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한 것도 충격이었고, 늘 당당하기만 한 줄 알았던 그녀의 어두운 과거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과외 중간에 도망친 이유 역시도 성준의 마음을 흔들었다.

“많이 두려웠겠네요. 이런 일이 있었다고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매일 매일이 무섭고 두려웠지. 그래도 어떻게든 잊었는데...몸이 기억을 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거야. 그래서 막상 너하고 일을 저질러놓고선 말도 없이 도망쳐버렸던 거지.”

과외를 하면서 보였던 그녀의 이상 성욕은 과거의 성폭행을 당한 트라우마에 기인했다. 그 충격으로 그녀는 성준의 가족에게서 도망을 쳤고, 간호사가 되어서 또 다른 삶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간호사의 삶마저도 중간에 포기하고 이곳에 와서 보건선생님으로 새 삶을 출발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간호사가 된 이후의 그녀의 삶은 어땠을까.

“전에 보건실에서 쌤하고 처음 봤을 때, 말했던 것 같아요. 간호사 시절에도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내가 그랬었나? 안 좋은 일이라기보다는...또 다시 과거의 트라우마에 발목을 잡히고 말았지.”

간호사가 된 이후에 그녀의 삶은 너무나도 평탄했다. 소문답게 업무 강도가 높아서 제대로 잠을 자기 힘들 정도로 바빴지만, 다행히 그녀에게 간호사는 천직에 가까울 정도로 잘 맞았다.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까지 만났을 정도로 그녀는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번에도 트라우마였다. 트라우마 때문에 성관계를 극도로 꺼려하던 그녀는 막상 남자친구하고는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를 늘 배려해주었고, 그녀를 이해해주었다. 문제는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발생하고야 말았다.

“하필이면 그곳에서 그 사람을 만날 줄이야...”

“그 사람이라면...교생선생님이요?”

그녀가 담당하던 환자 중에 하필이면 그녀에게 트라우마를 심어준 교생선생님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사람은 너무나도 태연하게 그녀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했고, 이제 막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그녀는 다시금 혼란과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몰라.”

“그만큼 과거의 일이 쌤한테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겠죠. 트라우마라는게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잖아요.”

성준은 그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에게 누구나 트라우마는 존재한다. 자기 스스로는 아무렇지 않다고 여길지라도 마음속에 자리 잡은 트라우마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녀처럼 큰 사건으로 발생한 트라우마는 오죽하겠나. 그녀가 받았던 상처와 충격을 그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일 이후로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라고. 평생 그 사람을 저주했는데, 막상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그 사람을 보니까, 더 이상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다는 생각도 들고...그때부터 모든 게 망가지기 시작했지.”

과거의 트라우마와 다시 접촉한 이후부터 그녀의 새 삶은 조금씩 무너져버렸다. 결국, 그 상황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도망치는 것이었다. 성준의 가족에게서 도망쳤던 것처럼 그녀는 또 다시 트라우마로부터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렇게나 힘들어하는데, 제가 또 트라우마를 불러일으켰군요. 하...전혀 몰랐어요. 쌤이 이 정도로 힘들어할 줄은...죄송해요, 정말...”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성준이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서 그녀에게 사과를 했다. 이제야 그녀의 상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었던 그는 자신이 정말 못된 짓을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그 일은 이미 조금 전에 사과하고 끝났잖아.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

“이런 상황에서 쌤하고 계속 관계를 가질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관계를 가질 때마다...트라우마에 시달릴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성준은 앞으로 그녀하고 관계를 가지는 것에 큰 부담을 느꼈다. 아무리 그녀가 능력에 영향을 받고 있더라도 관계를 가질수록 그녀의 상처는 늘어만 갈 것이다. 그는 그 점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저번처럼 의식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단 괜찮을 거야.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합의 하에 관계가지는 걸로 상처받고 충격 받겠어.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단지, 준이 네가 내 상처를 이해해주길 바랐어.”

그렇지만 그녀는 관계만큼은 거부하지 않았다. 의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당했던 기억이 그녀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면 몸이나 정신에 이상이 있을 때만 하는 걸로 해요.”

“그러다가 저번처럼 갑자기 이성을 잃으면...이런 말하기 부끄럽지만, 최근에 성욕이 엄청 증가했단 말이야...어떻게든 혼자서 풀고있긴 하지만...걱정이야...”

“음...능력이 정확히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으니까 답답하네요.”

“그러게...내가 어떻게든 알아내는 수밖에...”

때문에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위해서는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더욱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임신 능력이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방식으로 조절할 수 있는지가 앞으로 두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할 것이다. 성준 역시도 그녀처럼 하루라도 빨리 정보를 알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얘기 들어줘서 고마웠어. 처음에는 말해야되나 고민도 많이 했는데, 막상 말하고 나니까 답답했던 마음이 훨씬 풀린 것 같네.”

“어려운 얘기 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많이 힘들 수 있겠지만, 최대한 노력해볼게요.”

“아, 언니한테는 말했어?”

“어제 얘기했어요. 아마도 조만간 쌤이랑 만날 것 같아요.”

“흐응...언니한테는 또 어떻게 말해야 되나...”

“누나도 요즘 힘든 일이 많아서 이해해줄 거예요. 걱정 마세요.”

“그래, 하은이 언니야, 워낙 착하고 따뜻한 사람이니까...아무튼 고마웠어. 이제 수업종 치겠다. 얼른 들어가.”

“네, 나중에 봐요.”

그렇게 그것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보건실을 빠져나온 성준은 그대로 교실로 향했다. 보건실을 들어갔을 때만 하더라도 유은정하고의 관계가 무척 걱정되었던 그였지만, 생각보다 잘 풀린 것 같다는 생각에 안심할 수 있었다.

‘이것으로 쌤은 잘 마무리 된 것 같네. 앞으로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이상, 문제없어 보여. 그렇다면 남은 건 최한결이랑 박수아뿐이네. 수아는...당분간 놔두면 될 것 같고, 오늘은 최한결만 잘 마무리하자.’

이제 오늘 하루, 그에게 남은 것은 최한결과 하서윤뿐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한결 문제는 굉장히 중요했다. 남은 시간동안 그는 최한결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시간을 보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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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박수아를 포함한 친구들과 인사를 한 성준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집에 가기 전에 그는 해야 될 일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그는 먼저, 최한결과의 계약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괜히 다른 사람들이 보면, 오해할 수도 있으니까 잠깐 편의점에 있다가 들어가자.’

학교를 빠져나온 그는 최한결에게 10분 정도 늦는다는 문자를 보낸 뒤, 근처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냈다. 괜히 친구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최한결을 만나는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10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하고 나서 그는 편의점을 빠져나와 최한결과 약속을 했던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이곳에 도착한 최한결은 지난번과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조금 늦었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도 방금 왔는걸요.”

그녀는 성준에게 방금 왔다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미 그녀가 들고 있는 찻잔의 차가 절반 정도 줄어든 뒤였다. 아마도 그녀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온 듯싶었다. 그만큼 그녀에게 이번 계약은 굉장히 중요했음을 의미했다.

“그러면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도 될까?”

“네, 그렇게 해요.”

그녀만큼이나 성준에게도 계약은 상당히 중요했다. 유은정과의 일이 잘 마무리 되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그녀에게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계약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선, 계약에 대한 대답부터 해야겠지? 계약...하자. 나는 이대로 실험실에 들어가고 싶진 않거든.”

계약과 관련된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성준은 그녀의 제안에 대한 답을 먼저 들려주었다. 성준의 말에 그녀는 거의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살짝 미소를 지어보였다.

“다행이네요. 솔직히 거절하실까봐 걱정 많이 했거든요. 거절하면...정말로 신고해야 되나 망설이기도 했고요.”

“대신, 계약이 중요하겠지.”

두 사람에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이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박수아나 하서윤, 유은정하고는 달랐다.

“그렇겠네요. 계약은...어떻게 할까요?”

“내가 이쪽 세계를 잘 아는 편은 아니라서...음...그리고 너 역시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으니까, 그것부터 얘기해볼까?”

“선배에 대해서요?”

“나에 대해서, 정확히 말하면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말이야. 그리고 마찬가지로 너에 대해서도 조금 더 자세히 알고 난 이후에 계약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그렇기에 성준은 계약 전에 당사자인 서로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그녀는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를 것이 분명했기에 계약 전에 알려줄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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