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퇴양난 -->
“저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말한 그대로에요. 저는...남자 없이는, 성관계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거든요.”
그녀가 먼저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녀의 성적 취향은 매우 독특했다. 그 특유의 성향 때문에 그녀는 성매매나 원조교제를 통해서라도 항상 남자를 옆에 두고는 했다. 성격과 맞지 않게 성준을 협박하면서까지 그와의 관계를 원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혹시 그 이유를 알 수 있을까? 네가 그렇게 된 이유 말이야...”
성준이 조심스럽게 그녀가 그런 성향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은정과 흡사한 점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 성폭행을 당해서 충격을 받았고, 그것이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는 점은 매우 비슷했다. 다만, 큰 차이점이 있다면, 유은정에게는 성하은이라는 도움의 손길을 내민 존재가 있었지만, 최한결에게는 그런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큰 결과를 불러왔다.
‘이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성범죄라는 게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마어마한 범죄구나...피해자의 상처에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까, 충격이 더 클 수밖에...’
그녀의 이야기에 성준은 유은정과 대화를 나눴을 때와 마찬가지로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성준은 임신 능력자가 된 이후로, 여러 가지 루트를 통해서 성을 접해왔다. 특히나 능력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성을 접하게 되면서 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벼운 생각을 지니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이 무척 잘못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랬었구나. 음...그 상처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거야?”
“벗어나고 싶죠.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걸요. 죽는 것 말고는 답이 없어요. 그게 제 인생이에요.”
그녀가 품고 있는 상처는 상당해보였다. 성준은 그녀가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동정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서 최대한 노력해봤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손에 있는 저 상처들...그냥 상처가 아닌 것 같은데...’
성준의 시야에 찻잔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들어왔다. 그녀의 손등에는 많은 상처와 흉이 남아있었다. 아마도 그녀는 괴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자해를 통해서 해소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나마 이런 상황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게, 남자들하고의 만남이었어요. 관계를 가질 때면,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그러면서도 답답한 마음이 녹아내리는 기분이거든요. 그리고 두 번째로는 이런 식으로 제 몸을 괴롭히는 방법이 있죠. 하지만 이건...겉으로 티가 많이 나서 자주 할 수는 없어요.”
성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그녀가 먼저 자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도 자해한 것을 들켰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었다. 성준은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캐 묻지는 않았다.
“그런 일들 때문에 나하고 관계를 가지길 원했구나.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단순히 저번에 들은 이야기로는 한계가 있었거든.”
“이해를 바라지는 않아요. 저는 관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그래...우리는 어디까지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관계니까...”
성준과 최한결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전까지 전혀 친분이 없었다. 서로의 욕망에 의해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이었기에 깊은 교류를 나누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임신 능력자는...기이한 현상 전의 남자하고는 조금 다른가요?”
그녀가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꺼려졌는지 성준에게 먼저 물었다. 이제는 성준이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줄 차례였다.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계약 전에 꼭 해주고 싶었어.”
“어떤 점이 다른데요?”
“기본적인 건 똑같아. 여자하고 관계를 가질 수 있고, 임신 시킬 수 있다는 점이 같지. 하지만 일반 남자에게는 없는 능력이 존재한다고 할까? 우선, 성욕이 지나칠 정도로 많아진 것도 그 중에 하나야.”
그녀의 질문에 성준이 천천히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설명해주었다. 그 역시도 아직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꼭 알아야될 부분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자신의 성욕이 얼마나 강한지 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까지도 말이다.
“제일 문제인 건 바로 다른 사람의 성욕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이야. 이상성욕을 불러온다고 해야 될까. 능력으로부터 받는 영향이 커지면 이성을 잃을 수도 있을 거야. 물론, 그렇게 만들지 않으려고 내가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항상 주의해야겠지.”
성준의 능력은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성준과의 섹스를 바라고 있었지만, 성준의 능력에 영향을 받는 건 싫어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성준은 이 부분을 강조해 설명했다.
“무조건 이성을 잃는 건 아닌 거죠?”
“아직 정확한 원인이나 해결방법은 알 수 없어서...그나마 지속적으로 성욕을 해소하면 괜찮은 것 같긴 해.”
“그러면 다행이네요. 어차피 저는 기이한 현상이 끝나기 전까지는 선배랑 지속적으로 관계를 가질 계획이니까요.”
성준의 이야기에도 그녀는 성준과의 계약을 포기하지 않았다. 걱정은커녕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내 능력에 영향을 받아도 괜찮다는 거지?”
“뭐, 상관없어요. 어차피 선배 능력이 아니더라도 저는 항상 성욕에 크게 시달리는 걸요.”
“그래...괜찮다면 다행이네. 그럼, 이제 계약서를 작성해볼까?”
그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마무리 되고, 이제는 계약서를 작성할 차례였다. 이런 식의 계약이 처음이었던 성준은 갑자기 긴장감이 확 몰려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시간은 저번에 네가 말했던 대로 학교 끝난 직후나 저녁으로 하는 게 좋겠지?”
“네, 주말에도 저녁이었으면 좋겠어요.”
“좋아, 시간은 그렇게 하고...관계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선배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관계는 일주일에 한두 번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긴장하는 성준과 달리 이런 경험이 무척 많았던 그녀는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놓았다. 그녀가 최대한 성준을 배려하면서 의견을 내세웠기에, 성준의 입장에서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그럼, 일주일에 두 번으로 하자. 공평하게 한 번은 내가 원하는 날에 하는 걸로 하고, 나머지 한 번은 네가 원하는 날에 하는 거야. 어때?”
“나쁘지 않네요. 그렇게 해요.”
“그리고 당일에 연락하는 건, 선약이 있으면 거절할 수 있는 걸로.”
“좋아요.”
“장소는 어디가 좋을까?”
“이 근처에 무인텔을 이용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멀티방도 괜찮죠.”
“음, 걸리지는 않겠지?”
“예전에도 안 걸렸는데, 요즘은 더 그러지 않을까요?”
계약과 관련된 두 사람의 대화는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단순히 구두 계약으로 끝낼 수 없었기에 둘은 각자 종이 한 장씩을 준비해서 내용을 적어갔다.
“관계 횟수는...어떻게 할까? 관계 방식이라든지...”
“그건 선배 마음대로 해도 괜찮아요. 관계가 시작되면 선배가 원하는 대로 절 다뤄주셔도 상관없어요. 한 가지 부탁이 있다면, 제 취향을 조금이나마 들어주셨으면...”
심지어 두 사람은 성관계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나 그녀는 자신의 취향을 성준이 존중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음...정확히 어떤 취향인데? SM...맞지?”
“네, 맞아요. 너무 하드하진 않아도 괜찮아요. 소프트하게라도 해주셔도 괜찮은데...”
“소프트한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건지 내가 잘 몰라서...”
물론, 그 점이 성준에게는 무척이나 난감했다. 성준의 성적 취향은 SM하고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더군다나 이제 막 섹스를 시작한 그의 입장에서 SM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냥...수갑이나 안대 정도...랄까요?”
“수, 수갑? 수갑이 소프트한 거였구나...”
“제가 이러는 거 많이 부담스러우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그냥 나는 이쪽 세계를 잘 모르다보니까...노력은 해볼게. 그것말고는 또 뭐가 있는 건데?”
“그냥 마음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때리거나 욕하는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냥, 평소에 여성에게 표출하고 싶은 욕구를 마음껏 표출하시면 돼요. 저는 선배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녀의 입을 통해 들은 SM의 세계는 성준에게는 신세계와 다름없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말대로 부담도 느끼고 거부감이 많이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SM에 대해서 듣다보니까, 어느 정도 관심이 생기고 흥분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야동에서만 보던 것을 현실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성준은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내가 SM에 취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소프트한 정도는 해볼 만하겠어.’
성준은 그녀를 통해서 SM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보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는 그녀를 존중하는 것이기도 했기에 어느 정도는 SM플레이를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성준이 SM플레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녀의 입 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될까? 그밖에 또 하고 싶은 말은 없어?”
“네, 괜찮아요. 관계에 대한 건 직접 경험하면서 조정하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러면 첫 만남은 언제가 좋을까?”
그렇게 두 사람의 계약서 작성이 마무리 되었다. 이제 첫 번째 만남을 통해서 계약을 이행하기만 하면 두 사람의 본격적인 관계가 시작될 것이다. 성준은 첫 번째 만남에 대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은...힘들겠죠?”
“아, 오늘...오늘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내가 약속이 있어서...”
그녀는 말이 나온 김에 지금 당장 첫 번째 관계를 가지길 원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준에게는 약속이 있었다. 그는 그녀와의 대화가 마무리 되는 대로 하서윤을 만나야만 했다.
“그럼, 내일은 어때요? 될 수 있으면 빨리 하고 싶어서...죄송해요...”
“아니야, 계약까지 했는데, 죄송할 게 뭐가 있어. 내일은 괜찮을 것 같다. 내일 하는 걸로 하자.”
“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보는 거예요?”
“그렇게 하자. 내일도 이 시간에 여기서 만나면 될 것 같은데?”
“좋아요, 그렇게 해요.”
어쩔 수 없이 첫 관계는 내일로 미루게 되었다. 오늘은 불가능하다는 말에 그녀는 살짝 아쉬워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이 상당히 급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완전히 마무리될 수 있었다.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인사를 나눈 뒤, 따로 카페를 빠져나가고자 했다.
그녀를 먼저 보낸 성준은 하서윤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 기다렸다. 약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서야 그녀에게서 연락을 받은 그는 그제야 카페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직 여유는 있구나. 천천히 가도 되겠다.’
오늘 하서윤은 임신 클리닉 사람들과의 약속이 있었다. 임신 클리닉에서 제안한 것을 거절하는 것에 더해서 그들을 통해서 임신 능력자에 대해서 알아보는 것이 오늘 그녀의 목적이었다.
이에 성준은 그녀와 동행 하지는 못하더라도 멀리서 지켜보는 것을 요청했다. 혹시라도 그들이 그녀에게 해코지를 가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를 위하는 마음이 워낙 컸던 그는 그녀가 보내준 약속장소로 이동했다.
‘별일 없겠지? 갑자기 불안해지네.’
약속장소로 이동하면서도 그의 걱정은 계속해서 커져만 갔다. 쓸데없는 걱정일수도 있겠지만, 자꾸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막 그녀를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애써 마음을 편하게 먹어봐도 그녀와 관련된 일이라면 지나치게 신경이 쓰이고는 했다.
‘뭐지? 왜 아무 연락이 없는 거야? 누나가 이렇게까지 연락을 늦게 할 사람은 아닌데...’
그리고 그의 걱정과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그녀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혹시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다급한 마음에 성준은 약속장소를 향해 뛰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