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퇴양난 -->
“내가 용서한다고 네가 또 준이를 안 만난다는 보장 있어? 아주 제대로 발정난 것 같던데, 또 준이한테 달려들지 어떻게 알아?”
“절대...절대 아니에요. 맹세할게요.”
“후훗, 귀엽네. 그렇게 말하면, 내가 순순히 믿어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최한결의 계속된 사과에도 여자의 살기는 여전했다. 그녀는 마치 최한결을 가지고 놀 듯 여유 있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압박했다.
“빨리 버스가 오길 기다리는 거지? 아니면, 누가 너를 도와주길 기다리는 건가? 그치만 안타깝게도 아무도 없네? 버스도 아직 5분이나 기다려야 될 것 같고.”
최한결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버스의 속도는 더뎠고, 지나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버스가 오는지 살피다가 그녀의 신경을 더욱 건드리고 말았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지?’
최한결은 이제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지 고민했다. 성준과 함께 모텔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가 직접 목격했다면 변명은 무리였다. 지금은 그저 그녀가 최대한 자신을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제, 제가...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두 번 다시는 선배랑 만나지 않을게요...정말로 맹세할 수 있어요. 원하시면 선배 번호도 바로 삭제할게요.”
“같은 학교 다니고 있는데 번호가 무슨 소용이야. 무엇보다 준이가 너한테 먼저 연락을 할 수도 있는 거잖아.”
“정말로 오늘 같은 일은 없을 거예요. 정말이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최한결이 또 다시 여자에게 빌고 또 빌었다. 지금으로선 어떻게든 여자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설득시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렇지만 계속되는 최한결의 사과에도 여자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어서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최한결은 그녀가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너 같은 년들은 그냥 사라지는 게 답이야. 용서해줬다가는 분명히 또 다시 지랄할게 뻔하니까.”
“아,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제발 용서해주세요...”
“아예 준이한테 접근할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줄게.”
여자는 결코 최한결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 성준에게 두 번 다시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액체가 담긴 병을 높이 들어올렸다. 아마도 그것을 최한결에게 뿌릴 것으로 보였다.
‘설마...아니겠지...?’
그리고 그 순간, 최한결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과거에 그녀는 인터넷에서 뉴스를 봤던 적이 있었다. 바로 염산 테러와 관련된 뉴스를 말이다. 어쩌면 여자가 들고 있는 병에 담겨있는 액체가 염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돼...그럴 수는 없어...!!’
액체가 염산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어갔다. 저 염산이 얼굴이나 피부에 닿는 순간,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염산 테러에 당한 피해자들의 사진 역시도 뉴스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촤아아아악
하지만 안타깝게도 생각과는 달리, 몸의 반응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염산을 뿌리려는 여자를 저지하려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액체가 뿌려지고 말았다.
“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빈 병이 바닥에 떨어져 떼구르르 굴러갔다.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순식간에 끝이 났다.
최한결은 어떻게 되었을까. 만약 그녀가 맞은 것이 정말로 염산이라면 지금쯤 그녀의 상태는 정상이 아닐 것이다. 얼굴 피부가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서 큰 지장이 있을 것이 당연했다. 염산 테러란 그 정도로 위험하고 잔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 뭐야? 전혀 통증이 없는데...뭐지...? 설마, 그냥 물인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여자가 최한결에게 뿌린 것은 염산이 아니었다. 공포와 두려움에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최한결은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축축하고 차가운 느낌과 함께 찝찝함만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후훗, 귀엽네?”
최한결에게 염산 테러, 아니, 찬물 테러를 가한 여자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도대체 그녀의 의도는 무엇일까. 재빨리 물을 닦아낸 최한결이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최한결은 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이런 장난을 치는 것은 정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다.
“어머, 지금 나 노려보는 거야? 남의 남자랑 놀아난 주제에 기가 막히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칠 수가 있어요?”
최한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은 여자가 뿌린 물과 함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순간적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장난? 너는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니? 지금은 물이지만, 다음번에는 다른 게 들어있을 거야. 내가 못할 것 같지? 한 번 두고 보자고.”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최한결의 화는 곧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한 채 여자의 살기에 또 다시 눌리고 말았다. 여자는 눈에서는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그녀의 숨마저도 멎게 만들 것 같았다.
‘이 여자...진심이야...다음에는 정말로 염산을 뿌릴 생각이야. 어떻게 그런 짓을...미쳤어...’
최한결이 여자에게 겁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자의 말과 표정이 진심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나 장난이 아니었다. 여자는 진심으로 최한결을 증오하고 있었고, 심지어 죽일 생각도 품고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경고만 하는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경고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두 번 다시 준이랑 붙어있는 모습을 보였다간, 가만 두지 않을 거야. 명심해. 두 번은 없어.”
“......”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정류장을 떠났다. 최한결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침 그녀가 타야 되는 버스가 도착했지만, 그녀는 버스를 탈 수 없었다. 그녀의 몸과 마음은 온통 공포로 휘감겨져 있었다.
*
*
*
-박수아
“먼저 갈게요. 수고하세요.”
“그래, 내일 보자.”
“오늘 늦게 온 만큼 내일은 평소보다 더 일찍 올게요.”
“그래그래, 조심히 들어가고.”
오늘 하루도 박수아는 알바로 마무리를 했다. 알바 사장님과 직원들에게 인사를 마친 그녀는 바로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최근, 그녀는 아프다는 이유로 학교를 빠졌었다. 그렇지만 아프다는 사람치고는 그녀의 상태는 멀쩡해보였다. 알바까지 할 정도이니, 누구라도 그녀를 아픈 사람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녀는 왜 아프다는 핑계를 학교에 가지 않은 것일까. 정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다녀왔어요. 뭐야? 아직 안 오셨나? 하긴, 금요일이니까...”
집에 도착한 그녀를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는 일 때문에 바쁘셨고, 그녀의 동생은 불금을 즐기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이 상황이 매우 익숙했던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나온 그녀는 머리를 말린 뒤, 알바하는 식당에서 가져온 포장된 음식을 그릇에 담아두었다. 저녁 늦게 동생이나 어머니 집에 들어오면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말이다.
이 부분을 통해서 평소에 그녀의 성격이 어떤지 알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그녀는 가족에게 있어서만큼은 많은 부분에서 희생을 하고는 했다. 친구들하고 어울릴 때도 보면, 그녀는 늘 희생하는 포지션에 위치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달라지게 만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성준이었다. 성준을 만나 후로, 그녀에게는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성준과 친구들 앞에서 성격을 변화시킨 것은 물론이었고, 심지어 외적인 모습까지도 변화를 주었다. 이 모든 게 바로 성준의 마음에 들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너무 지나치다고 해야 될까. 성준에 대한 그녀의 마음은 관심과 애정에서 점점 집착으로 바뀌게 되었다. 성준은 소유하고 싶은 마음에 그녀는 친구들에게 못된 짓을 하거나 나쁜 마음을 품기도 했다. 과거의 그녀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그녀는 어떨까. 학교에 안 나온 지 3일째인 그녀는 그동안 무엇을 하면서 지냈을까. 성준을 그토록 좋아하면서 왜 3일 동안 성준이 있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던 것일까.
‘오늘은 참 기분이 더러우면서도 좋기도 하네.’
집에서 자신이 해야 될 일을 모두 마친 그녀는 이제 개인적인 일에 집중했다. 구석에서 커다란 종이 상자를 꺼낸 그녀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상자를 열었다.
“후훗, 오늘은 중간에 이상한 년이 끼어 들어서 별로 못 찍었지만, 그래도 덕분에 한 명은 제거해서 다행이야. 이민정도 확실히 얘기해뒀으니까 이제 앞으로 얼마 안 남았네.”
그녀가 꺼낸 상자 안에는 온통 성준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성준이 학교에 등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누굴 만나거나 집에 들어가는 것까지 온갖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성준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이제 스토킹이라는 범죄 수준까지 심화된 것이었다.
“생각보다 준이 옆에 꼬이는 여자들이 많아서 걱정이야.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제거해야지. 그래도 학교에서는 더 이상 준이한테 꼬리치는 애들은 없으니까...”
그녀는 단순히 성준을 미행하고 관찰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는 성준의 곁에 있는 여자들에 대해서 적개심을 품었다. 과거에 이민정이나 다른 친구들에게 협박을 했던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 적개심이 더욱 심해지고 있었는데, 성준을 미행하면서 알아낸 여자들 때문이었다. 지난 3일 동안 성준을 스토킹하면서 그녀는 성준의 곁에 많은 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그녀들에 대해서 증오심을 품었다. 최종적으로 그녀들을 모두 성준에게서 떨어트려 놓는 것이 바로 그녀의 목적이었다.
“최한결은 확실히 제거했고...이제 하서윤이라는 여자랑, 보건만 끝내면 되려나? 아니야, 분명히 더 있을 거야. 조금 더 조사가 필요해.”
오늘 정류장에서 최한결에게 협박과 위협을 가한 것도 그녀였다. 성준을 미행하다가 그녀와 모텔에 들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박수아는 분노에 휩싸였고, 모든 원망을 성준이 아닌, 최한결에게 쏟아냈다. 그녀의 증상이 이제 단순한 질투심 때문이 아닌, 정신병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가 되어버린 셈이었다.
최한결을 협박한 그녀는 심지어 묘한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 성준의 곁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고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안에 잠들어있는 폭력성이 깨어난 것인지, 최한결이 겁에 질려하는 모습을 보고선 흥분을 느꼈던 그녀였다. 착하고 내성적이며 소심한 그녀의 모습은 이제 하나의 가면이 되었을 뿐, 그녀에게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렇게 그녀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사진들을 바라보며, 성준에 대한 사랑을 키움과 동시에 다른 여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키워갔다. 다른 여자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는 일은 이제 그녀에게는 무척 즐거운 시간이 되어버렸다.
‘누구지? 엄만가? 놀러간 애가 이 시간에 들어올 일은 없으니까, 엄마겠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나보네.’
상자 안의 사진들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에, 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녀는 재빨리 상자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어머니나 동생에게 자신의 은밀한 취미를 들킬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엄마? 엄마야?”
상자를 안전하게 숨겨놓은 그녀는 태연스럽게 밖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집에 들어온 사람이 당연히 자신의 어머니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엄마? 왜 이렇게 일찍...누, 누구...세요..?”
하지만 그런 그녀의 생각은 틀렸다. 그녀의 집에 들어온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방문이 열리면서 나타난 사람은 정장차림의 두 명의 남자였다. 난데없는 두 사람의 등장에 그녀는 기겁을 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