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임신 클리닉-181화 (181/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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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수아, 너...아직까지 나한테 감정이 남아있었구나...미안해...그때는 가족들 문제 때문에 내가 워낙 예민했었어...제대로 사과했어야 되는데, 네가 괜찮은 줄 알아서...정말 미안해...”

성준은 지금 그녀의 모습이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지난번에 그녀에게 화를 내고 의심했던 일이 아직까지 연결되어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진심어린 사과라 판단한 그는 바로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빌었다.

“아, 아니...그런 게 아니라...정말로 친구냐고 물어본 건데...가, 갑자기 이러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준의 판단은 틀린 모양이었다. 성준이 사과를 하자, 그녀의 당혹스러움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성준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이를 통해서 성준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번 일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예상치 못한 그녀의 반응에 성준이 그녀에게 이유를 물었다. 도대체 그녀의 지금 행동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이어서 들려온 그녀의 대답은 성준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만 만들뿐이었다.

“저번 일이라니...나는 네가 무슨 말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너랑 내가 친구라는 것도 잘 이해가 안 되고...짝궁인 건 알겠는데...우린 처음 만났을 때말고는 거의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잖아...”

“?!!”

이건 또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 그녀는 이제 성준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잊은 듯 보였다. 아니면, 이제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성준에게 진저리나는 것일까. 그녀의 대답에 성준은 할 말을 잃은 듯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왜 그러는 거야...무섭게...”

“너야 말로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갑자기 찾아오는 것도 그렇고...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을 말하질 않나...”

“정말로...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지난 한 달 동안 나랑...많은 일들이 있었는데도?”

“미안한데...혹시 나를 놀리는 거라면...그만 뒀으면 좋겠어...제발 부탁할게...”

그녀의 표정과 말투는 전혀 거짓이나 장난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성준보다 더욱 진지해보였다. 아무리 그녀가 연기를 잘한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까지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는 말은 정말로 그녀가 성준과의 일을 잊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 역시도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이 며칠 만에 한 사람에 대해서, 그리고 한 달 동안의 기억을 전부 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스트레스가 심해도, 방어기제가 작동했다고 하더라도 이건 매우 비상적인 상황이었다.

‘설마...내 능력 때문인가? 아니면, 임신 클리닉에서 벌써 움직인 건가? 갑자기 수아가 왜 이러는 거지? 몸이 너무 아프다고,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이럴 수 있는 거야?’

드라마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기기억상실이라도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전개될 일은 없다. 그녀는 크게 아팠다기에는 지금 상태가 너무나도 멀쩡했고, 특별한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나 이유는 두 가지 뿐이었다. 임신 능력자인 성준의 능력과 임신 클리닉, 이 두 가지만이 이유라 할 수 있었다.

“혹시...최근에 수상한 사람이 너 찾아오거나 한 적은 없지?”

“수상한 사람? 솔직히 말하면...지금 네가 제일 수상한데...?”

“아...아무튼...없는 거지?”

“응, 없어. 그나저나 나 이제 일해야 되는데...”

“그래...오늘은 이만 갈게.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그녀의 상태에 대한 정확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쉬는 시간이 끝난 그녀는 다시 알바를 하기 위해 자리를 떠났고,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 되었다.

‘끝날 때까지 기다려볼까? 아니야, 괜히 수아를 자극할 수도 있으니까...지금은 일단, 물러나자. 내일이나 모레 학교에서 다시 대화해보는 거야. 그게 좋겠어.’

그녀가 걱정되었던 그는 고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 하더라도 알바를 하면서 자꾸만 성준의 눈치를 보는 그녀였다. 그녀가 변한 이유는 궁금했지만, 오늘은 이만 물러나는 편이 그녀를 위해 좋겠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렇게 식당을 빠져나온 성준은 김소영하고의 만남처럼 기나긴 한숨을 내쉬게 되었다. 김소영의 일도 생각하면 할수록 답답했지만, 이번 일 역시도 그의 마음을 답답하게 짓눌렀다.

‘하...얼른 집에 돌아가야겠어. 도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에휴...’

답답한 마음을 느낀 그는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하서윤이 유일했다. 그녀는 성준이 처한 상황을 이해해줄 뿐만 아니라 항상 그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였다.

그렇게 성준은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하서윤을 떠올리자, 그나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을 느꼈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얼마 못가서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야에 아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냥 지나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그는 무언가에 끌리듯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학원 가는 건가? 주말에도 바쁘게 보내는구나. 인사 정도는 해도 괜찮겠지?’

성준이 발견한 사람은 어제 그와 뜨거운 섹스를 경험했던 ‘최한결’이었다. 그녀는 주말인 오늘도 가방을 메고선 학원에 가는 듯 보였다.

평소에 성준이라면 그녀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굳이 인사까지 하진 않았을 것이다. 서로 그리 좋은 관계인 것도 아니었기에 마주친 것이 아니라면 무시하고 지나가는 게 편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박수아하고의 일 때문인지 그는 그녀에게도 인사를 해보고 싶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녕? 학원가는 길이야?”

성준이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리 약속을 잡은 것도 아니고, 학교에서의 만남도 아니었기에 다소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는 용기를 내서 그녀의 앞에 섰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긴장되는 마음으로 말이다.

“...네?”

“주말에도 학원 다니느라 바쁜 모양이구나.”

“...네?”

성준의 인사에 그녀가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성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그녀도 상상조차 못했던 모양이다.

“이런 곳에서 만날 줄은 몰랐네. 어제는 집에 잘 들어갔지?”

“...네? 누, 누구...신데요...?”

하지만 그는 곧 그녀의 반응의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성준과 갑자기 마주쳐서 당황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도 박수아와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것이다.

‘뭐, 뭐야? 설마...최한결도 수아처럼? 말도 안 돼...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 거지? 수아야 한동안 학교에 안 나와서 못 만났지만, 한결이는 어제도 만났는데...’

생각지도 못한 그녀의 반응에 성준은 더욱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최한결하고는 불과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서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작 반나절 사이에 자신을 기억 못하는 그녀가 도저히 이해될 수 없었다.

“누구냐니...이런 곳에서 인사해서 그런 거야?”

“저를...아세요? 죄송한데, 저는 기억이 안 나서...”

이해가되지 않았지만, 그것이 현실로 일어났다. 그녀 역시도 절대 장난을 치거나 연기를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생생한 반응에 성준은 어쩔 줄을 몰랐다.

“아...그...혹시...수아...아니에요?”

“아닌데요. 잘못 보신 것 같아요.”

“아, 죄송합니다.”

자신을 기억 못하는 그녀를 억지로 붙잡고 있을 수 없었다. 수아는 적어도 같은 반에다가 짝궁이라는 점은 기억을 했었지만, 최한결은 성준에 대해서 아무런 기억조차 남아 있지 않아보였다. 이에 성준은 사람을 잘못 봤다는 식으로 사과를 하며 그녀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성준은 멀어져 가는 최한결의 뒷모습을 허탈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불안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겠지? 임신 클리닉이든 내 능력이든...아닐 거야...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거니까...’

현재까지 성준에 대한 기억을 잃은 사람은 모두 성준과 깊은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이와 비슷한 다른 사람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서윤을 비롯해서 신지은, 유은정 등을 말이다. 그 사람들이라고 절대로 안전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성준은 재빨리 유은정과 신지은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전속력으로 하서윤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만약 하서윤마저도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만큼은 결코 바라지 않았기에 그는 미친 듯이 집을 향해 달리고 또 달렸다.

‘허헉...허헉...제발...제발...’

5분도 채 걸리지 않아서 집에 도착한 그는 엘리베이터를 탈 생각도 없이 계단을 이용해 5층까지 뛰어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렇지 않았다. 지금 그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하서윤이 자신을 기억해주는 것, 그것만이 그가 바라는 것이었다.

‘아닐 거야...서윤 누나만큼은...절대 아닐 거야...’

하서윤의 집, 505호에 도착한 성준은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다. 불안한 생각이 자꾸만 그의 머릿속을 압박했지만, 그는 애써 그것들을 떨쳐내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그의 앞에 그녀가 나타났다.

“누, 누나...?”

조심스럽게 성준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를 바라보는 성준의 눈빛이 매우 불안정하게 떨려왔다. 이대로 사랑하는 그녀마저도 잃게 되는 것일까.

“준아? 무슨 일 있어? 표정이 왜 그래?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성준을 알아보았다. 성준에 대한 그녀의 기억만큼은 아직까지 멀쩡한 상태였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녀의 모습에 성준은 그대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만큼은 누구보다 놓치고 싶지 않았던 그는 그녀의 품에 안겨서 조금 전까지 떠올렸던 불안한 기억들을 모두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다행이다...정말 다행이야...”

“주, 준아? 정말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성준의 모습에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그를 토닥여주었다. 성준은 그런 그녀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그녀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도 자신을 평생 기억해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잠깐의 해프닝이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그녀의 품에서 마음을 달랠 수 있었던 성준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그녀에게 전달해주었다. 성준의 이야기에 그녀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준이 너를 전혀 기억 못했다고? 어떻게 갑자기 그럴 수가 있지? 네 능력이나 임신 클리닉에서 조치를 취한 게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아니라면, 이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요.”

“음...아무래도 임신 클리닉 같아. 내 생각에는 임신 클리닉 짓이야.”

그녀는 이번 일이 임신 클리닉의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들이 박수아와 최한결에게서 성준의 기억만을 지운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번 일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들이 벌써 움직이는 걸까요? 다른 사람들은 아직 괜찮은 것 같아요.”

성준이 그녀에게 핸드폰 문자를 보여주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성준은 유은정과 신지은에게도 확인 차 문자를 보냈었다. 그들은 아직까지 성준을 기억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 명씩 만나서 처리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누나도...?”

이번 일에서 성준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하서윤의 기억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서윤 만큼은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나는 아닐 거야. 나랑 준이의 관계에 대해서 말해줬으니까.”

“아...다행이네요...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성준의 걱정에 하서윤이 말했다. 그녀는 이재희에게 확실하게 자신과 성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이번 일이 그들의 짓이라면, 자기 자신을 절대로 안전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후훗, 조금 전에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겠네. 준이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아니...뭐...아무튼 임신 클리닉에서 움직이는 거라면 최대한 빨리 처리해줬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에 성준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조금 전에 자신이 너무 오버한 게 아니었나 싶어서 조금은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민망한 기분이 들었던 그는 재빨리 화제를 돌려 다른 이야기를 대화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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