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 가문의 비밀. (1)
2003년 5월 10일. 운동 시작 이틀 차.
다가오는 2004 아테네 올림픽은 총 28개 종목으로 육상 체조 수영 베드민턴 테니스 축구 야구 등등으로 분류 되어 있었다.
나는 어떤 종목에 참가할지를 고민하다 모든 운동의 시작과 끝 육상을 고르기로 했다.
"어. 왔냐?"
"아 뭔데... 밤 10시라고. 잠도 안 자냐?"
"10시에 뭔 잠을 자. 고등학생이."
"아무튼 왜? 왜 불렀어."
"정석아. 너가 옳았다."
"뭐가?"
"남자는 능력이야."
"그래서...?"
"올림픽에 나갈래."
"...어?"
"육상으로 정했어. 그러니까 기록 좀 재 줘."
"타임. 너 지금 미친 거 아니지?"
밤 10시.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불려나온 정석이는 뭔가 골몰히 생각하더니 다시금 물었다.
"저녁에 뭐 잘 못 먹었어?"
"아니야. 진짜야."
"병신아 니가 무슨 올림픽을 나가는데?"
"할 수 있어. 아직 1년도 더 남았고 그때까지 훈련하면"
정석이는 끝까지 듣지않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남수냐? 난데. 나 지금 마하랑 같이 있는데, 애한테 뭐라고 한 거냐?"
생각보다 통찰력이 있는 정석이였다.
아무리 봐도 태윤이는 아닌 거 같고 뭔 일이 있다면 남수라며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둘이서 뭐라 떠드는지 몰라도 정석이가 숨이 넘어가듯 웃기 시작했다.
"캌핰! 컼!! 진짜? 진짜로?"
"야. 바꿔줘 봐..."
"아 꺼져. 야 남수야. 그건 니가 잘못했네. 그런 말 들으면 이 새끼는 눈 돌지."
가까이 다가가니 정석이 핸드폰으로 남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왜? 너네 지금 뭐하는데? 라고 묻는 소리에 정석이가 답했다.
"올림픽 나간다고 나한테 기록 재달래잖아."
남수의 웃음소리도 핸드폰을 뚫고 나왔다.
그래. 비웃어. 무릇 모든 꿈은 그렇게 비웃음을 거름삼아 발전하는 법이니까.
"아 씨발. 끊으라고! 나 지금 제대로 집중하고 있는데."
"하하하. 마하야. 남수도 나온다고 잠깐만 기다리란다."
"에이 새끼들. 겨우 몸 풀어 놨는데."
남수가 올 때까지 다시 운동장을 뛰었다.
정석이도 놀리더니 반 바퀴 달릴 때 가로질러 와 옆에 서 같이 뛴다.
"너도 진짜 장난아니다. 뭔 말을 못 하냐."
"뭐. 꿈 있으면 좋은 거지."
"야. 그 꿈이 겨우 섹스 한 번 하려고 이러는 건 아니잖아."
"뭐가! 모든 사람이 다 궁극적으론 섹스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데!"
"이 새끼는 씨발 섹스가 무슨 종교도 아니고..."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소리하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내가 너네 반 만 생겼어도 이러지는 않어 나도."
"아 새끼 또 지랄이네."
"정석아. 너. 올림픽 선수촌에서 뭐 주는지 아냐?"
"몰라. 밥?"
"콘돔."
"콘돔을 왜...?"
"이것 봐. 너도 몰랐지. 시드니 올림픽에선 9만개 콘돔이 나눠졌데. 기사에서 봤어."
보름에 9만개란 소리는 단순 산술로 하루에 1500개의 콘돔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1500분의 1. 안 가는게 미친 거지.
이러저러 그곳을 가면 나도 가능성이 있다.
진심이었다.
죽을 때 까지 섹스 한 번 못 해보고 갈 바에야, 올림픽이란 큰 꿈에 모든 것을 투자하고 싶었다.
"헉 헉... 와 너 진짜 농담 아니라 정신과 한번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마음대로 생각해. 나는 확률이 높은 쪽을 택할 뿐이야."
"확률이라..."
"올림픽이야. 거기가 아니고선 날 받아줄 여자들을 만날 수 없어."
운동장 세 바퀴를 돌고 있을 때였다.
숨이 차는가 정석이가 자리에 멈춰 물었다.
"헉. 헉. 근데 마하야. 올림픽은 어떻게 나가는 건데?"
질문에 대한 답을 떠올리다 나도 자리에서 멈춰 돌아보았다.
"내가 가고 싶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신청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야. 그러지 말고. 훅. 후욱. 남수 우리 집으로 오라고 하고. 그때까지 내가 우리 집 컴퓨터에 있는 거 씨디 구워줄게. 가자."
"됐어. 필요 없어."
"서양 거로 해주면 되지? 내 동생이 백인들 많이 보던데."
"...넌 동생이랑 야동 공유하냐?"
"컴퓨터가 한 대인 걸 어떡하라고. 서로서로 조용히 아 이런 제수씨구나 아 형수가 이런 사람이구나 하는 거지."
"와... 안 쪽팔리냐?"
"미친새끼. 지는 섹스 한번 하려고 밤 10시에 운동장 뛰는 주제에 무슨."
이러저러 떠들고 있으니 남수가 슬렁슬렁 모습을 나타냈다.
정석이는 보자마자 애한테 뭐라고 하고 있었다.
"니가 문제야! 너 같은 새끼들이 순수한 올림픽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어."
"뭐. 정확히 그렇게 말한 것도 아니고. 쟤가 지 좋을 것만 골라 들은 걸 어쩌라고."
"남수 왔냐."
"운동하고 있었냐?"
적당히 인사를 마치고 남수가 운동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진짜 하려고?"
"어. 기록 좀 재 봐."
"근데, 마하야. 여기 아마 직선거리 100미터 안 될 걸?"
"그래도 일단 얼마나 나오나 한번 재보고 싶어서."
"와 얘나 쟤나 진짜..."
"가자 정석아."
남수가 꿍얼거리는 정석이를 데리고 골인지점으로 걸어갔다.
두 녀석의 대화소리가 어렴풋이 들리다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부정적이야. 친구가 한다면 우리는 응원해주면 되는 거지."
"부정적인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봐야 될 거 아냐."
"너랑 태윤이가 능력이니 외모니 하니까 저 새끼 더 의기소침해서 그랬지."
"아 몰라. 저러다 또 안 되면 찡찡 거리고 이러는 거. 나 몰라. 니가 알아서 해."
"됐어. 마하가 알아서 해. 나온 김에 PC방이나 갈까?"
"야. 근데 진짜로 올림픽 나가면 할 수 있어?"
"그렇대. 금메달만 따면 그때는 뭐 생긴 게 뭔 상관이야. 여자들이 줄을 슨다더만."
"호오 노력은 배신하질 않는다 이건가."
두 녀석이 저만치 떨어져 목소리를 높였다.
준비 됐냐는 말에 잠깐만 이라고 답해주며 호흡을 골랐다.
"후우. 후우우."
나는 원래 운동을 잘했다.
하지만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중학교 시절.
주목받는 게 싫어 일부러 체력장이고 어디고 설렁설렁 힘을 숨기고 다녔다.
기억해라. 어릴 때의 나는 달리는 걸 좋아하고 3학년 운동회 때는 계주 대표로 나간 경험이 있다.
믿는 구석이 있기에 나도 꿈을 품어본다.
생긴 게 이래서 그렇지. 나도 잘하는 게 분명히 있을 거야.
하늘은 모든 걸 뺏어가지 않어.
만약 여기서 운동마져 못 한다면 그땐 진짜 신을 저주하고 악마를 등에 새겨넣고 살아가도 누가 뭐라고 못 할테니까.
"마하야 됐냐?"
"후우. 어! 오케이!"
여기가 정식으로 100미터가 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가능성을 보자.
해보자. 꿈을 위해.
떠올려라. 그 단어를.
리듬 체조. 러시아. 그리고 우크라이나!!
"출발!"
"훅!"
나는 달리기를 쉽고 간단하지만 인간을 가장 용감하게 만들어 주는 행위라고 본다.
힘차게 흔들리는 두 팔은 몸에 탄력을 주고 단단한 복근과 등근육은 팔에서 생성된 파워를 하체로 실어 나른다.
터질 것 같은 허벅지와 스프링이라도 달린듯한 두 다리가 번갈아 지면을 박차고 뛰어오르면 몸이 속도를 내며 땅과 배경이 빠르게 뒤로 지나쳐 갔다.
어둠 속에 있던 친구들의 모습이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움직임에 맞춰 또 한번 숨을 들이키니 심장이 또 한번 박동질을 하며 두 팔과 다리가 리듬있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땀이 이마를 흘러 바람으로 사라져 갔다.
친구들이 있는 곳 까지 20M. 다시 10M.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는 거리를 몇 걸음만에 좁혀 들어가며.
비공식적인 첫 번째 100M기록이 나왔다.
"골!!"
"헉! 허억 허억! 기록은?"
"..."
"와 마하 너 이 새끼 제법 빠른데?"
"훅. 후욱. 그래서 몇 촌데?"
조용한 남수와 격정적인 정석이를 보고 있자면 충분히 좋은 기록이 나온 건가 싶지만.
"14초..."
"느린 건 아닌데. 마하야. 이래가지곤 올림픽은 무리야..."
14초. 14초라...
"후우 후욱... 근데 나 운동 시작한지 이틀 밖에 안 됐고."
"..."
"..."
"그리고 정말 몇 년만에 뛰었는데 그 정도면 잘 하는 거 아니냐?"
***
며칠 뒤. 동네 모처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구마하의 형 마윤이 오랜만에 동생 친구들을 가게로 불렀다.
"마윤이 형. 저희 왔어요."
"어. 왔구나. 들어와서들 앉어."
중학교부터 친했던 김태윤이 앞장서 들어오고 이정석과 박남수는 아직은 낯설다는 듯 뒤따라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너네가 정석이랑 남수구나."
"네. 안녕하세요."
"아직 밥 안 먹었지? 뭐 먹을래."
"저희 급식 먹은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어. 니들 나이 땐 돌아서면 배 고픈데. 있어 봐. 형이 간단하게 고기랑 밥 차려줄게. 먹고 가."
구마윤은 동생 친구들을 극진히 대접해주며 자리에 앉았다.
"마하는 오늘도 운동해요?"
"어.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내가 너네 좀 보자고 한 거야."
"네."
"마하 학교에서 무슨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아. 그게..."
갑자기 운동을 시작한 동생.
훈련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니 보호자 된 입장에서 구마윤은 걱정이 앞선다.
태윤과 정석 그리고 남수는 서로를 돌아보며 뜻을 모았다.
마하가 꿈이 생겼어요.
올림픽에 나가서 섹스를 하겠다는 원대한 꿈이...
라고는 차마 10대 청소년들이 꺼낼 수 없는 이야기라 소년들은 적당히 둘러대어 말했다.
"누가 괴롭히거나 그러는 건 없어요."
"네. 마하 그래도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 좋아요."
"그래..."
"그냥. 운동하고 싶다고. 학교에서도 쉬는 시간마다 근육 키운다고 그러고 있어요."
"아니 하는 건 좋은데. 갑자기 왜 그러나 싶어서."
구마윤이 고기 더 먹으라며 부엌으로 건너간 사이 이정석과 박남수가 물었다.
"야. 진짜 마하네 형이야?"
"어."
"친형?"
"응."
"근데 왜 생긴 게 달라?"
구마하와 다르게 구마윤은 훤칠한 키와 훈훈한 외모로 지역에서도 이름난 청년이었다.
친구들은 대체 이놈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그렇게 태어난 거냐며 마음속으로 쓴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자. 더 먹어."
"고맙습니다."
"태윤아. 진짜 그런 거 없지?"
"네. 없어요. 그리고 마하가 누가 괴롭힌다고 당할 만큼 애가 만만하지도 않아요."
구마윤은 동생을 생각하며 애가 외모자존감이 너무 낮다보니 그런 문제로 왕따라도 당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친구들이라 둘러대는 건가 다시 한번 물어본다.
"진짜 아니지?"
진심으로 걱정하는 마윤이 형 때문에라도 아이들은 적당히 진실을 털어놓아야 했다.
"그게, 실은 마하가 꿈이 생겨서..."
"꿈? 뭔데?"
"올림픽에 나가겠다고..."
"올림픽?"
"저희도 말려 봤어요. 근데 애가 진지해요."
"꽤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날 밤도 혼자 운동을 나간 동생을 기다리며 구마윤은 조용히 팔짱을 끼우고 앉아 있었다.
"..."
그래. 진심이구나.
동생한테 꿈이 생긴거야.
그렇다면...
"후우. 부모님.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다 마하 위해서 하는 거니까..."
밤 11시. 선선한 봄 기운이 무색할 정도로 땀에 흠뻑 젖은 동생 구마하가 들어왔다.
"어... 으어어... 형 나 왔어..."
"마하야. 너 이리와서 앉아 봐."
"어? 좀 씻고."
"앉아."
운동에 지쳐버린 구마하는 앉지도 못 하고 바닥에 철푸턱 엎어져 이야기를 들었다.
"왜?"
"너. 올림픽 나가고 싶다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어?"
"친구들한테 물어봤지."
"아 뭐야. 나 몰래 내 친구들 부르지 말라니까."
"됐고. 너 진심이냐?"
"뭐가. 올림픽?"
"어."
"그럼 당연하지."
"구마하. 올림픽 동네 운동회 아니야. 선수들 중에서도 제일 잘 하는 사람들만 나가는 거 알고 있지?"
"알어. 나도 진지하게 하고있어."
"..."
"아 왜?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잖아."
"진짜 나가고 싶은 거 맞지?"
"맞다니까!"
"목숨을 걸어서라도?"
형이 이렇게 나올 때는 뭔가가 있다.
각오를 묻는 것인가.
구마하는 머릿 속에서 영광의 그날(올림픽 선수촌과 외국인 선수들 *여성*)을 떠올리며 가슴에 주먹을 올렸다.
"진심이야. 죽어도 좋아."
"좋아. 그럼 우리 집안의 비밀을 알려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