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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8화 (8/401)

〈 8화 〉 땀은 노폐물을 배출해 피부를 맑게 해준다. (4)

스르륵.

"..."

"..."

어제 잠깐 멀리서 보긴 했지만 얘도 오랜만에 보는구나.

여름이라고 머리 짤랐나보네. 예쁜 애는 뭘 해도 잘 어울린다.

거기까지가 간만에 혜정이를 본 감상이고. 다음은 그냥 평상시와 다를 바 없이 쟤는 저쪽 나는 이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무심하게 닫힘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오랜만이네."

뭐지? 귀신이 말을 거나? 설마?

"어? 나?"

"응."

"어... 그러게."

쟤가 먼저 나한테 말을 걸었어?

10년 간 말 한 마디 없던 애가? 인사도 나누지 않은 애가?

그나저나 오랜만이라니? 그건 또 무슨 뜻이지?

1번. 나를 보고 싶었다.

2번. 알고보면 나를 그리워 했다.

3번. 그냥 눈 마주친 김에 뻘쭘해서 인사 한번 걸어봤다.

정답은...

.

.

.

2번인가?

"오빠가 그러던데 아팠다며."

"오빠? 무슨 오빠?"

"너네 형."

거기다 형을 알어? 혜정이가 나한테 관심을?

"어. 조금..."

"으음."

하염없이 지상으로 끌어당기는 중력이 애석하게만 느껴진다.

엘리베이터의 붉은 숫자를 멈추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하는걸까.

지진 안 나나? 그럼 이 시간도 멈추지 않을까?

띵.

1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주차장으로 걸어 나왔다.

이른 시각 그녀는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 햇살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나는 뒤에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

그래서? 대화는 끝이야? 왜 나한테 말 걸었냐고 물어볼까? 혹시 걱정했나? 늘 곁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이지 않으니 그 사람의 소중함이 생각났다는 그런 패턴?

"아 햇빛. 모자 쓰고 나올 걸."

"아침에 보니까 오 오늘 30도 넘을 거라고 그러던데."

"정말? 덥겠는데."

"어. 나오는데 일기예보 잠깐 봤어."

좋아. 자연스러웠어. 무엇보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기상정보를 나누는 법이라고 그러잖아.

"근데, 너 운동해?"

"어??"

이건 또 뭐냐. 와 진짜 오늘 뭐지? 형이 하늘을 날 때 보다 얘가 말 거는 게 왜 더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어. 최근 시작했어."

"육상?"

"..."

난 운동하는 남자 멋있더라.  남자는 역시 땀이지. 마하야 힘내.

젠장 아니야! 왜 자꾸 환청이 들리는 거야! 난 아직 미치지 않았어!

뚜벅뚜벅 무심하게 걷는 가운데 왜 그렇게 혼잣말이 떠오르는지...

겨우내 정신을 붙잡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어. 육상. 단거리."

"그렇구나. 더운데 힘들겠다."

"..."

"나 갈게."

우리는 아파트 세 개 동을 걸어 정문에 다다랐다.

오늘도 자전거를 탄 소년이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혜정이는 먼저와 똑같이 도도도 달려가 자전거 뒷좌석에 털썩 앉아 저 멀리 가버렸지만.

"..."

더운데 힘들겠다? 분명 그렇게 말했어.

혜정이는 내가 아팠던 걸 안다.

그럼에도 걱정 어린 말을 남겼다.

수능도 맨날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라고 하지 않던가.

힘듦을 알아준다는 건 다른 말로 힘내라는 뜻이 될 거고.

그 말은 즉?

"나를 보고 싶었다는 뜻 아닐까...?"

"..."

"..."

"..."

"아냐? 아닌 거 같애?"

학교에 도착.

친구들한테 오늘 아침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들려주었다.

애들은 한참을 서로를 쳐다보며 답을 못 했다.

"아니. 나도 조금 갑작스러운 감이 없진 않은데..."

"구마하. 그냥 올림픽에 집중하자."

"그래. 그래도 니가 운동에 재주가 없는 건 아니니까."

"남수야. 아니냐? 진짜 아냐? 내가 오버하는 거냐?"

"후우우..."

뒷담은 깔지언정 그래도 앞에선 늘 이성적으로 구는 박남수가 아니던가.

초롱초롱 맑은 눈동자로 보고 있으니. 녀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구마하. 진짜 이러지 마. 이러면 우리도 너무 힘들어..."

"뭘? 뭐가?"

"우리가 널 놀리는 건 그래도 니가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서 그러는 거지."

"이 새끼 말이 뭔가 좀 이상한데."

태윤이와 정석이도 각각 어깨에 손을 기대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하야. 이건 남수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너가 지금 너무 병신 같아서 그래..."

"구마하. 너와 친구가 된 그날 이후로 오늘 처음으로 슬픔이 뭔지 알았다."

망할 놈의 새끼들. 차라리 욕을 하지.

"아니! 내가 뭐랬냐고. 갑자기 걔가 말을 거니까! 나도 그게 뭔가 하고. 그냥 한번 물어 본 거지."

"걔도 오랜만에 보니까 그랬겠지..."

"10년이야 새끼야. 지나가는 아줌마도 이모라고 불렀을 거다."

역시 그런가...? 에잇 젠장.

"그래도 이제 아는 척은 했네. 그것만 해도 전보다는."

"박남수 입 안 닥쳐. 너의 그 뻔한 친절이 마하를 더 아프게 만든다."

"야 이 개새끼야. 내 친구 괴롭히지 말라고 했지. 이 새끼 생긴 건 좆같아도 얼마나 착한 놈인데."

원래 김치국을 좋아한다. 형이 해주는 돼지고기 듬뿍 들어간 김치찌개는 나의 정체성이 곤륜이 아닌 한반도에 있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너무 성급했구나... 너무 생각이 짧았어.

나는 오늘 굷주린 늑대들한테 너무 커다란 떡밥을 던져주고 말았구나...

"얘들아 부탁 하나만 하자."

"뭔데?"

"뭐?"

"이걸로 놀려도 좋은데. 대신 반년 만 기다려주라. 정말로."

"흐음."

"어렵겠는데. 너무 병신 같아서... 당장 오늘 밤에 나 너한테 전화해서 지랄 할 거 같은데."

"제발. 이거 아니어도 놀릴 거 많잖아. 지금 나도 현실적인 쪽팔림이 밀려오고 있어서 고개를 못 들겠거든."

"남수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

"가을까지는 봐주자. 어쨌든 마하 입장에선 충분히 들뜰 수 있는 일이기도 했고."

"오케이 가을까지. 그때까진 포경으로 간다."

"그래. 포경은 두 새끼 다 엮을 수 있으니."

"아 씨발놈들 진짜!"

결국 오늘 아침은 우연찮은 헤프닝으로 넘기는 걸로 친구들과 다 같이 합의를 보고 끝내기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어!! 야! 씨발! 구마하!!"

"뭐야? 어떤 새끼야?"

"누가 너 찾아왔는데!!"

"어?"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지만, 반은 남자반과 여자반으로 나뉘어져 있다.

'누가 너 찾아왔는데'는 주로 여자애가 만나러 올 때 이야기.

그렇기에 나에겐 졸업하는 그날까지 절대 들릴 리 없을 거라 여겼던 문장이 어째서 지금?

애들과 쑥덕쑥덕 청춘을 낭비하는 가운데 멀리 반 친구 하나가 목소리를 높여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곳에 우리 영군 고등학교의 여왕이자 이 지역 수컷들의 아이콘. 나와는 이웃사촌이기도 한 이혜정 양이 친구 두 어명과 함께 난처한 미소로 교실 뒷문에 서 있었다.

"오오오!"

"뭐야? 지금 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마하한테 왜? 왜?? 왜냐고! 대체 왜!!"

그냥 사람이 사람을 찾아왔다는 이유로 이렇게 비아냥과 원망이 섞인 반응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대체 왜? 그녀는 예쁘고 나는 못 생겨서?

아무튼 부럽지 새끼들아.

혜정이가 찾아왔기에 나는 개선 장군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적당히 겸손을 섞어 최대한 점잖은 자세로 교실 뒷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하. 미안... 왜?"

"아니.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어. 뭔데?"

"..."

두근두근 심장이 뛰고 있는데.

좌 우 머리 위로 턱! 턱! 태윤이와 정석이 그리고 남수가 매달리고. 뒤이어 뭔가가 더 들러붙기 시작해 점점 무게가 더해지기 시작했다.

"아 뭐냐고 왜 이렇게 밀어!"

고개를 돌려보니 내 친구만 모자른 게 아니라, 우리 반 놈들이 죄 붙들려 뭔 얘기들을 하는지 싱글벙글 하회탈 같은 얼굴로 사생활을 침범하고 있다.

"좀 비켜 봐!!"

"뭔데? 혜정아 뭐야?"

"왜? 마하 왜 찾어?"

"어... 아니. 우리 체육이 교무실로 오라고 그래서."

내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친구들이 먼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치? 그렇지? 그게 전부지?!"

"다른 거 없지? 맞지!!"

"정말 그냥 심부름만 온 거야?"

"으응. 그. 그럼... 나 갈게."

학주도 부담스러울 반응에, 혜정이와 친구들이 난처하고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복도 저편으로 사라지고.

나는 최측근이라는 놈들을 필두로 이유모를 주먹 세례를 받아야 했다.

"하하! 이 새끼! 것 봐! 별 거 없잖아."

"아니! 내가 뭐라고 했냐고!"

"야. 씨발 너 뭔데? 니가 뭔데 혜정이를 오라가라 하고 있냐?!"

"내가 그랬어! 왜 때려 미친 놈들아!!"

여자애들이 다녀가며 반 애들이 이성을 잃고 있었다.

맞고 있지만 그래도 왜 일까. 그냥 기분이 좋다.

"야! 다 비켜! 나도 오늘부터 운동한다."

"난 원래 체대가 목표였어!!"

태윤이와 반 친구들이 흥분을 주체 못하고 폭주하고 있을 때 정석이와 남수가 물었다.

"근데 진짜 왜 쟤가 심부름을 와?"

"아직 뭔가 말 안 하게 있는 거야?"

"뭐. 그냥 심부름 왔다잖아."

"그니까 심부름을 왜 쟤가 오냐고. 선생님이 시켜도 거절했겠지."

"니들 말대로 십년 인연이 있나보지."

십년 인연이란 말이 다른 놈들 귀에 흘러가고, 저기 한쪽 구석에서 내가 원래 혜정이와 소꿉친구가 아니었냐는 의혹이 번져 나오는데, 그곳엔 태윤이가 있었다.

"구마하 저 새끼 혜정이랑 같은 집 살어."

"진짜!?"

"와! 저 새끼 뭐지? 야. 구마하! 너 일로 와 봐."

정말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말을 저렇게 지어내는지...

카오스를 피해서라도 교무실로 찾아갔다.

혜정이가 체육이라고 했으니까, 한 쌤이겠지.

*   *   *

"합동 훈련요?"

"어. 옆 동네 한주 고가 육상으로 이름 있는 거 알지?"

"아니요."

"학교 안 가봤어?"

"남고를 제가 굳이 뭐하러..."

"하하하!!"

한주 고등학교야 진작부터 알고는 있지만. 남고라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학교에 육상부도 있고 매년 체육특기생도 배출할 정도로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단다.

"거긴 전문 트랙이 있어."

"진짜요? 우와."

"마하 너 진짜 운동에 아무런 관심 없었구나..."

선생님도 내 재능을 키워주고 싶지만 전문 코칭은 경험이 너무 없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훈련 시스템을 갖춘 공간과 아닌 곳에서의 발전은 하늘과 땅 차이라 일단 합동훈련을 경험해 보는 게 좋다고 하셨다.

"내 친구가 거기 교사로 가 있거든."

"아. 그래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그럼 하는 걸로 알고 전화한다?"

"네. 고맙습니다."

"모레니까, 그때까지 가벼운 운동복이랑 스파이크랑 챙겨서 보자."

용건 끝났으니 인제 그만 가보라는 선생님을 보면서 우물쭈물 엉덩이를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왜?"

아. 물어볼까 말까...

당연히 별거 아니겠지만, 그래도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들개들을 생각하면 확실히 하는 게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저 선생님. 혜정이요."

"어. 혜정이 왜?"

"...왜 걔한테 저 오라고 하셨어요?"

"하하하하~!"

한 선생님 뿐만 아니라 주변 다른 선생님들까지 껄껄 웃으며 고개를 돌려 보셨다.

동갑내기 친구들한테 쪽팔린 건 일도 아니구나...

"그냥 교무실 왔길래 아무나 심부름 시켰는데 왜?"

"아... 네. 하하. 그렇군요..."

"혜정이 좋아해?"

"아니요."

"하하하! 그래. 가 봐."

*   *   *

"그래서 어제 그거 샀냐?"

"어. 내가 같이 골라줬어."

"이런 건 얼마나 하냐? 비싸지?"

"얼마 안 했지? 그치 마하야?"

"비싼 것도 있는데, 일단 싼 거 샀어. 몇 만 원 안 해."

처음으로 훈련 다운 훈련을 가는 길.

오늘도 할 일 없는 세 녀석이 따라 나섰다.

"진짜 구경만 하는 거다."

"당연하지. 우리도 운동하는 거 신기해서 그래."

"맞어. 나도 대충 보고 학원 갈 거야."

"우리가 그 학교 접수라도 할 거 같냐. 신경 꺼."

얘들은 내가 운동하는 게 재밌나 보다.

말로는 신기해서 보러 간다는데 그저 놀릴 거리 찾으려고 혈안이 된 놈들 같다.

아무튼, 한주 고등학교에 도착.

한 쌤은 일 마무리 짓고 오신다고 하셔서 멀뚱멀뚱 넷이서 운동장 구석에 서 있었다.

"와 학교 존나 크다."

"너도 안 와 봤냐?"

"굳이 여기까지 올 거 있나. 마하나 나나 이쪽으로 배정 받을 것도 아니고."

"야. 너도 이런 데서는 안 뛰어봤지?"

"처음이지.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다."

한주 고등학교 운동장은 우리 학교의 2배는 되는 것 같았다.

가운데 축구장엔 흙이 깔려있고 자줏빛 육상트랙이 넓게 배치되어 있었다.

실제 선수들이 뛰고 훈련하는 정식 트랙이라 하시더니 이게 400M구나. 생각보다 훨씬 크네.

바닥을 밟으며 걸어보았다.

우레탄이라 그런가 푹신푹신하고 탄성이 달랐다.

부드러운 촉감에 와 내가 진짜 운동을 시작하나? 같은 기대감이 생기고 있었다.

"여기는 선도 그러져 있다. 멋있다."

"뛰면 몇 초 나올 거 같냐?"

"모르지. 뛰어봐야 알겠지."

"어이 구마하."

정석이가 불러 돌아보니 녀석이 집에서 카메라를 갖고 왔다며 자세 좀 잡아보란다.

"됐어 뭐하는 거야."

"아 씨발 서보라고."

"쪽팔리게..."

"올림픽 금메달 리스트 구마하가 처음 트랙에 발을 올린 순간이다. 너 새끼야 나중에 이거 존나 비싸게 팔 거야."

정말 그런 날이 올까?

그때의 나는 지금을 어떤 기분으로 떠올리고 있을까.

"오~ 새끼. 생긴 건 좆같아도 사진 좀 받는데."

"진짜? 봐 봐."

"그러게. 생각보단 비율이 괜찮은데."

선생님도 안 계신 상황에서 낯선 곳 혼자 뻘쭘할 뻔 했는데, 우리끼리 낄낄거리고 있으니 긴장감도 사라지는 것 같다.

"근데, 여기 신기하지 않냐?"

"왜? 뭐가?"

"너는 몰라도 우린 교복 입고 있잖아. 다른 학교 애들인데. 어떻게 관심도 없냐?"

"원래 다른 학교에서 원정도 많이 오고 훈련도 하고 그러거든."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에 넷이서 고개를 돌리니.

어? 이 사람?

"어서 와. 영고에서 왔지?"

"네."

"누가 마하야?"

"얘요."

"저... 저요."

"그렇구나. 선생님이 데리고 오래. 난 3학년 안지민. 선수야."

아이고... 자전거를 탄 소년이 왜 또 여기서 나오냐...

제발 모르는 척 해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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