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 땀은 노폐물을 배출해 피부를 맑게 해준다. (5)
안지민이라. 인물이 잘나니 이름도 잘 난 거 같다.
나만 알고 다들 모르는 지민이 형의 정체.
우리는 혜정이 남자친구를 따라 선생님을 찾아가고 있었다.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 가운데 친구들이 모기 소리로 속닥거렸다.
"존나 잘 생겼네."
"역시. 키도 크고 몸도 딴딴하고. 이게 바로 육상 선수지. 그렇지."
"진짜 우리 학교였으면 여자애들 난리 났을 건데."
"..."
니들이 안 그래도 이미 우리 학교 심장은 가져갔어.
그나저나 저 사람을 또 어떻게 여기서 만나냐...
진짜 아는 척 안 하면 좋겠는데...
지민이 형은 긴 복도를 지나 체육실로 보이는 곳의 문을 열었다.
"선생님. 애들 데려 왔어요."
"어. 들어와."
"안녕하세요!"
"왔구나. 그래서? 너희 중 누가 음속을 달리는 사나이냐?"
"네?"
"하하하! 구마하가 누구냐고."
"저... 저요."
"반갑다. 이주영이라고 한다."
한 쌤과 대학 시절 선수 생활을 하셨다는 이주영 선생님을 만났다.
멀뚱멀뚱 어색함에 눈치나 보고 있으니, 선생님이 위 아래로 쭉 훑어보며 지민이 형을 향해 말했다.
"11초란다."
"오 진짜요?"
"하... 한번 그랬어요..."
"그것도 흙바닥에서 맨발로. 장난 아니지?"
"와... 네."
"너 이 새끼들 대회 앞두고 긴장하라고 부른 용병이야. 오늘 각오들 해."
"하하. 네!"
당사자 속마음은 생각도 않고 뭐 저리 쉽게들 말하는지...
그런데, 이런 상황과 대화에 주책머리들이 나서고 마는데.
"선생님. 우리 마하 운동 시작한지 한달도 안 돼요."
"그리고 엄밀히 수술하고 회복기간이라는 것도 잊으시면 안됩니다."
"수술? 무슨 수술? 어디 다쳤어?"
"아. 벼... 별 거 아니에요..."
"운동하는덴 지장 없고?"
"그. 그럼요."
가만 뒀다간 포경이니 뭐니 또 헛소리 날릴까, 서둘러 두 녀석 어깨에 주먹을 갈겨 입을 막았다. 당연히 남수도 동참하는 걸 보면 같은 마음이었던 거 같다.
"갑자기 왜 때려?"
"우리가 뭐 틀린 말 했어??"
"아 좀 조용히 하라고..."
"가만 좀 있어 새끼들아."
"하하! 친구들이 보기에도 자랑할 게 많은가 보네. 안 그러냐 지민아?"
"그러게요. 뭐가 더 있어?"
"있긴 한데요. 이 새끼 정색해서."
"아이고 맞을까 무서워서 말을 하겠나요 이거."
"뭔데? 말해 봐."
올라오는 한숨을 막지 못하고 있으니 두 놈은 다시 주책없이 떠들었다.
"마하는요. 얼마를 뛰어도 지치질 않아요."
"체력 끝판왕이죠. 800미터 전력질주도 가능합니다."
"와... 진짜라면 이건 꽤 큰데."
"100미터를 11초로 끊으면서 800을 뛴다고...?"
모르겠다... 맘대로들 해라...
"아니요. 얘들이 생각 없이 떠드는 거고, 100도 그냥 학교에서 뛴 게 전부에요."
"그래. 보면 알겠지. 상률이가 생각보다 일이 늦어진다고 연락 왔어. 먼저 훈련하고 있으라고 했거든. 지민아. 데리고 가서 몸 풀고 있어라."
"네. 근데, 네 명 다 운동하는 건가요?"
"글쎄. 그런 얘기는 없었는데."
"저희는 그냥 평범한 애들입니다."
"저도 전문대 나와서 중소기업 취직하는 게 꿈입니다."
"그냥 친구 응원 왔어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하하하! 가 있어. 나도 이것만 정리하고 나갈게."
"네. 나가자."
* * *
"왜 새끼야??"
"아 씨. 또 뭐?"
"진짜!! 제발! 좀!!!"
선수들이 하나 둘 운동장으로 모이는 가운데, 구석에서 애들한테 지랄지랄 하고 있었다.
"쪽팔리게 좀 하지 말라고!!"
"병신아. 우리가 괜히 그러냐?"
"그럼? 대가리에 벌레라도 들어가서 그러냐? 어?"
"니가 쫄아있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야. 구마하. 적지야. 정신 차려야지."
"적지고 나발이고 니들만 조용히 있으면 아무 문제 될 거 없어!"
그 와중에 정석이가 디카 건전지 다 된 거 같다며 태윤이를 데리고 편의점으로 갔다.
혼자 신경질 벅벅내며 신발끈이나 묶고 있는데 남수가 옆에 앉아 말했다.
"애들이 병신 짓 한 것도 맞는데. 근데, 내가 봐도 니가 좀 뭔가 위축되어 보이긴 했어."
"후우..."
"그렇게 긴장 되냐?"
"아. 그런 거 아냐..."
지민이 형이 사람들을 모아 우리 쪽을 가리키며 뭐라뭐라 말하고 있었다.
"저 형 혜정이 남자친구야..."
"뭐? 진짜??"
사람들을 대하는 행동이나 아까 선생님이랑 이야기 하는 걸 보면 지민이 형이 한주 고 육상부 주장인 거 같다.
아침마다 얘 데리고 자전거 타는 것도 두 사람 꽁냥거리는 게 아닌 훈련의 일환 아니었을까? 보니까 허벅지도 장난 아니던데.
뭔가 그냥 멀리서 양아치야 노는 놈이야 했던 때가 편한 기분이다.
말이나 행동이나 저 사람은 내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인 거 같다...
"남수야. 애들한테 얘기하지 말고."
"야! 빨리 와! 아까 그 형이 이혜정 남자친구래!"
"..."
미치겠다. 정말로 돌아버릴 거 같애...
"진짜?"
"어디? 역시. 그럼 그렇지. 지민이 형 배필이면 이혜정 정도는 되야지.."
이놈들은 또 언제 돌아왔어?
정신병을 야기시키는 놈들을 피해 선수들에게 다가갔다.
가는 동안도 뒷통수에다 대놓고, 숙명이라느니 이건 너의 운명이라느니 하는 개소리를 떠드는 친구들이다.
"인사들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선수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여전히 뻘쭘뻘쭘 거리고 있으니 훈련하는 걸 보며 따라하라고 들었다.
"보다 보면 알게 될 거야."
"네."
기본적인 몸풀기는 한 선생님과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신 2인 1조로 조를 짜 스트레칭을 하고 어깨를 잡아주거나 하는 게 있었는데.
"마하는 나랑 하자."
"네."
그나마 안면을 텄다고 지민이 형과 서로 어깨를 붙잡고 허리를 펴고 있었다.
"몇 초야?"
"뭐가요?"
"기록. 11초라고는 들었는데. 정확하게 얼마 나와?"
"아. 11.08 나오긴 했는데요..."
"허허. 진짜??"
주변에서도 하나 둘 하나 둘! 하면서 얼굴이 마주칠 때마다 질문을 던졌다.
"운동 했었어?"
"몇 학년이냐?"
"기록 어디서 잰 거야?"
우리 학교 운동장은 여기같이 체계적이지 않다.
100미터도 정식이라 말하기 어렵고, 맨땅에서 한 거라 아마 좀 다를 것이다.
두 번째 쟀을 땐 13초 나왔으니까 그 기록도 정확하다고 볼 순 없다.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그래도 11초 08이면 빠른 거지."
"지민아. 너보다 빠른 거 아니냐?"
"그러니까."
친절한 잘생김을 보여주는 얼굴에서 순간적인 무표정이 스쳐갔다.
경계하는 건가...? 불편한 건 싫은데.
"근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
"네? 아니요."
"너네 영군 고등학교랬지. 혜정이 몰라?"
알죠. 너무 잘 알죠.
"모르겠는데요."
"진짜? 니네 학교 애들 다 안다고 하던데."
"아... 그래요?"
"으음. 친구들 계속 있네. 쟤들한테 물어볼까?"
"쟤들도 모를걸요. 병신들이라."
"하하! 되게 친한가 보다."
"제가 왕따라서 그래요. 괴롭히려고 저러는 거에요. 개새끼들. 저 대신 경찰에 신고 좀 해주세요."
"하하하하!"
준비운동을 끝내자 1학년으로 보이는 애들이 장비를 놓기도 하고 이것저것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도 가만 있을 수 없어 뭐라도 하려는데 형들이 말렸다.
"있어. 손님인데."
"아. 네."
"그나저나 800은 뭐야?"
"진짜 별 거 아니에요. 애들이 개소리 한 거에요."
개소리라고 넘겨버리고 싶지만, 지민이 형이 친구들로 보이는 사람들한테 단거리 중거리까지 다 소화 가능하다는 말을 건네고 있었다.
"어이. 너 주종이 뭔데?"
"100m요. 근데 정확히는 아직 정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그러는데, 운동시작한지 한달도 안 됐대."
"진짜? 말도 안 돼."
"야. 너 이 새끼 구라면 뒤진다."
"..."
"하하. 신경 쓰지 마. 괜히들 저러는 거니까."
괜히 그러는 것 치고는 형들의 질문은 계속 되었다.
스쿼트는 얼마를 드냐느니, 대회는 나가 봤냐느니. 운동은 갑자기 왜 시작하냐느니.
머릿속 벌거벗은 여인들이 오륜기를 펄럭이는 가운데, 이것저것 아는대로 떠들고 있으니, 이주영 선생님과 우리 학교 한쌤이 같이 나오셨다.
"친하게 지내고 있었어?"
"네!"
"인사들 해라. 여기 내 친구. 한때 한국 육상계의 가능성."
"하하. 빌어먹을 놈. 반갑다 모두들. 한상률이라고 한다."
곧 주니어 선수권 대회가 있어 오늘은 스타트 훈련에 집중하는 날이라고 했다.
뻘쭘뻘쭘 분위기를 살피고 있으니 한 쌤이 다가와 물으셨다.
"몸은 다 풀었어?"
"네. 근데 애들이 이상한 소리를 해가지고..."
"안 그래도 들었다. 설레발 엄청 쳐 놨더만."
"후우우... 그러니까요..."
한 쌤이 멀리서 구경하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신다.
선생님이 인사를 건네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꾸벅 웃는 얼간이들이다.
망할놈들. 아이스크림 또 언제 사서 물고 있는거야?
"덕분에 기대감 장난 아니던데."
"미치겠어요. 진짜 왜 따라와서 지랄들인지..."
"근데, 솔직히 기대감은 나도 가지고 있는지라."
"선생님 저 근데 어떻게 보면 되게 단순하게 올림픽 나가고 싶다고 한 건데요."
욕망이 사라진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머릿속엔 리듬체조와 러시아 우크라이나란 주문이 자동으로 돌고 있고. 타이트한 운동복에 반짝이를 붙인 미녀들이 건강한 신체를 자랑하며 체조 마루 위에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다만, 그런 내 욕망과 다르게, 막상 대회를 앞두고 있는, 목적의식이 있는 선수들을 마주하니 내가 얼마나 운동을 안일하게 생각 했는지 뒤늦게 깨닫는 중이다.
"그래. 마하야. 바로 그거야. 올림픽."
"올림픽이 왜요...?"
"보통 니 나이 대 선수들은 전국체전이나 대입을 목적으로 두지. 쉽게 올림픽을 입에 담진 않거든."
"..."
선생님 죄송해요... 실제론 섹스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까 이주영 선생님 하는 말 들었지? 나도 한땐 대한민국 육상의 가능성이었다고."
"네."
"그땐 나도 올림픽이란 무대를 꿈꿨었다."
한 쌤이 우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자줏빛 육상 트랙을 쭉 훑어 보신다.
8번도 아닌 훈련용으로 3번 까지만 있는 트랙.
그럼에도 선생님은 두 눈 저편 무언가 더 큰 것을 보고 계시는 것 같다.
"올림픽이라... 세계 육상 선수권도 큰 대회지만. 올림픽은 정말 얼마나 멋질까 상상이나 해봤니?"
"저 선생님..."
"예선만 뛰더라도. 그곳을 갔다는 자체가 꿈의 무대에 섰다는 뜻이니까. 난 언젠가 내 제자가"
올림픽이란 세계인의 축제에 참가하여 대한민국 육상의 작은 족적이라도 남기는 모습을 보고 싶으시단다.
"그게 내 지도자로서의 꿈이야."
"..."
"그리고 넌 그렇게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분명하게 가지고 있고."
여전히 트랙 저 편 어딘가를 바라보는 한 쌤이 그 말씀을 하며 어깨를 툭 툭 두드려 주셨다.
선생님의 몸이 작게 떨리는 것 같다.
이런 건 뭐라 해야하는 거지? 기쁨? 아니면 기대? 기쁨의 더 큰 감정을 뭐라고 했었지? 희열이라고 하던가?
그래. 희열이다.
지금 선생님은 상상만으로 희열에 넘치는 감정에 빠져 계시는 것 같다. 일종의 오르가즘이라고나 할까.
대체 올림픽이 뭐길래. 그냥 메달 따고 연금 받고 프리 섹스가 가능한 게 전부가 아니란 말인가?
상상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부들부들 떨게 만드는 힘은 대체 뭐지?
"어이 상렬아."
"그래. 가자 마하야. 훈련해야지."
"네."
며칠 전 정석이가 혜정이를 보며 설레발 치는 나에게 슬픔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했었다.
녀석은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나도 지금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
부끄러움이었다.
누군가의 꿈의 무대를 그저 정액을 분출할 딸감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정말 너무 부끄러워... 훈련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애들이랑 집에 가고 싶은 기분에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지만.
"자! 다리 더 높이 들고! 기합 크게!"
"하! 하앗!"
그럼에도 여기까지 왔다.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형이나 친구가 아닌 완전 타인에게서 가능성이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하나! 둘!"
"그렇지. 마하 기합 좋다."
처음으로 머릿 속 금발 미녀나 브라끈 같은 멍청한 생각을 지우고 오직 트랙만을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