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땀은 노폐물을 배출해 피부를 맑게 해준다. (6)
"와 선수들 훈련은 저런 것도 하는 구나."
"은근 체계적이다."
"우리도 체육 할 때 저렇게 하지. 재밌을 거 같은데."
친구 구마하를 응원(?)하러 온 김태윤 이정석 그리고 박남수.
운동장 저 편 노을이 떠오르는 가운데, 세 친구는 여전히 한주 고등학교 벤치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오. 총 꺼냈어. 스타트 훈련인가 보다."
"총 소리 리얼하다. 운동회 때 들은 거랑 다르네."
"아까 들으니까. 시합 앞두고는 일부러 저렇게 한다는 거 같더라. 봐. 떠드는 사람들도 없어. 집중력 강화 뭐 이런 것도 있나보네."
세 친구는 주거니 받거니 평범한 교실에선 보기 어려운 광경에 대화가 많아졌다.
그러는 가운데, 선수들 뒤에서 어정쩡하게 줄 서 있던 구마하의 차례가 다가왔다.
"마하다."
"새끼. 어리버리 떨면서 할 땐 은근 잘한다니까."
"근데 태윤아. 너 학원 간다고 안 했냐?"
"가야지. 가야 되는데."
김태윤은 시계를 보더니 애써 덤덤한 표정으로 바뀌고, 이정석은 카메라를 꺼내들어 구마하를 찍었다.
"오늘은 그냥 재끼고 마하 뛰는 거나 보고 있을란다."
"그래도 돼?"
"뭐 어때. 하루 정돈 빠져도 돼."
"남수야 너는? 넌 집에 안 가냐?"
"나도 가긴 가야 되는데..."
박남수도 말끝을 흐리며 출발 총성에 맞춰 30여미터를 잽싸게 뛰고 돌아서는 구마하에게 시선을 돌린다.
"너네도 있는데, 그냥 있지 뭐."
"태윤아. 너 마하 중학교 때 알았다고 했지."
"그치."
"저 새끼 저렇게 웃는 거 본 적 있냐?"
"없어. 못 생겨도 웃으니까 보기는 좋네."
세 친구는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구마하를 응원하기로 한다.
지난 한 달. 방학이 아닌 긴 시간을 떨어져 있으니 그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알았다.
마하가 없는 시간은 지루하다.
이렇게 놀릴 거리가 끊이지 않는 친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또 이렇게 리액션이 좋은 친구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이렇게 성격 좋은 친구가 정말 어디 있단 말인가.
우정을 떠나 구마하라는 존재는 충분히 매력이 넘치는 인물이었다.
거기에 상상도 못 할 엉뚱함까지.
세상 말도 안 되는 짝사랑을 더 말도 안 되는 욕정으로 승화해 버리더니, 그 결과 운동이라는 희대의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 친구 구마하.
근데 또 잘한다. 그게 보는 이로 하여금 즐거운 미소를 짓게 만들고 있다.
세 친구는 그가 어떤 의미든 좋은 결과를 이루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볼품없는 외모를 떠나 진심으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다만, 마음은 그렇게 품고 있더라도.
고등학교 2학년 청소년의 입에선 좋은 말들이 흘러 나오질 않는다.
"얼씨고 얼씨고? 븅신. 아까는 잘하더만 지민이 형이랑 같이 하니까 저 꼬라지 봐라."
"따먹어. 따먹으라고 씨발놈아. 안지민도 니가 따먹어 그냥."
"하하! 미친새끼들."
"애인 있던 거 모르는 것도 아니고 왜 저 지랄이냐 한심하게..."
"아 진짜로. 나는 마하가 어떤 종목이든 금메달 하나 따서 여자들 존나 따먹으면 여한이 없겠다."
"누가 들을까 겁난다고 미친놈들아. 제발 말 좀 조심해."
"뭐 들으라 그래. 어쩔 건데."
"육상부라고. 니네 저 사람들보다 빠르게 도망칠 수 있어?"
"정석아. 이 새끼 또 선비질 하는데?"
"하여튼 박남수 개새끼. 지는 여자친구 있다 이거지."
"혜정이가 더 예뻐. 너도 안지민한테 졌어. 루저 새끼야."
"지민이 형은 포경 했을까?"
"그럼 남수는 두 번 지는 건가? 2연패네."
"아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다..."
* * *
"마하야. 친구들 되게 의리있다. 끝까지 기다리는데."
"하하... 네..."
운동을 계속하다보니 먼저같이 청각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놈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굳이 뭐 알릴 필요 없겠지... 미친놈들 진짜...
그나저나 은근 힘드네. 체력은 자신 있다고 봤는데, 그게 아니었나.
실제 선수들이 하는 운동은 생각보다 더 많은 근력과 파워를 요구하고 있었다.
나 혼자 뛰던 건 진짜 애들 놀이구나.
코치님들이 시키는 대로 팔과 다리를 흔들고 몸을 고정시키는 건 안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어렵다. 무엇보다 힘들다.
스타트 훈련 30m를 반복하는데도 반응 속도는 나아지지 않고 느려지는 것만 같다.
"후우우... 후우."
"헉. 허억. 힘들어?"
"네. 와... 진짜 다르네요."
이게 스포츠구나.
내공이 어쨌든지간에 쉽게 되는 게 아니야.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부터 이런 걸 반복하고 있던 거지?
"저. 지민이 형."
"훅- 후우. 왜?"
"형은 운동 몇 살 때 시작하셨어요?"
조금 늦게 시작해 중학교 1학년이란다.
그게 늦어?? 중1이면 벌써 6년째 이 짓을 반복하고 있다는 소리잖아??
앞서 뛰고 돌아오는 사람이 땀을 닦기위해 티셔츠로 이마를 훔쳐낸다.
복근이 어우야... 싸움 되게 잘하겠네.
주변을 둘러보며 선수들을 보았다.
2, 3학년은 말 할 것도 없고, 선배들한테 혼나고 있는 1학년들도 종아리에 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진짜 미친놈들 왜 그런 이상한 소리를 꺼내 가지고...
내가 무슨 육상 천재라고 800m를 전력질주를 할 것이며, 운동 시작한지 한 달도 안 됐다는 소리는 왜 한 거야...
아니야 진정해. 이런 마이너스 사고는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어.
할 수 있어. 아니 해내야만 해. 원래 섹스는 어려운 거니까.
그래! 여자들의 반응을 생각하자.
저기 니 남자친구 지나간다던 그 무수히 많은 빈정거림을 잊은 거냐?
마하야. 이성에 눈을 뜬 그날 이후 너는 얼마나 슬펐던가?
부모님이 없는 것보다 여자들이 상대해주지 않는 게 더 눈물나지 않았던가.
"후우. 후우우."
긴 호흡으로 가슴에 열정을 담아라.
가슴이 뜨거워야 돼. 불태워. 달구라고.
분노를 불끈 세워.
널 업신여기고 비웃던 망할 것들을 납작하게 엎드리게 만들어서.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아 그런 게 아니라!
"화이팅!!!"
"그렇지! 마하 목소리 좋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도 이 사람이었다.
작년 6월 열정의 스페인 전. 우리 아파트 14층에서 사랑을 나눈 그 어떤 남자.
이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
정말 나도 나를 알면서도 모르겠다.
이런 찌질함이 존나 싫으면서도 또 그게 뭔가 승부욕을 불러일으킨다.
지고 싶지 않다.
지민이 형한테. 아니. 그냥 누구든 물러서고 싶지 않어.
"오케이. 마지막. 지민이랑 마하."
"선생님."
"왜?"
"저. 오늘 스파이크 새 거로 신었고, 몸도 풀린 거 같은데."
기록 한번만 재봐도 되지 않겠냐고 먼저 손을 들어 도전장을 던졌다.
으쌰으쌰! 하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 붙는다.
한 쌤과 이 쌤도 서로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어떡할래?"
"뭘 어떡해. 니네 학생이 묻는데 너가 결정해야지."
"지민이 곧 대회 나간다며?"
"하하하!! 이긴다 이거냐?"
코치들의 자존심 싸움도 살짝 겸비되어 바로 시합이 결정되었다.
* * *
"이 선생 말에 의하면, 지민이란 저 친구 최고 기록은 11초 58이라고 하더라."
"빠르네요."
"공식이라 봐야겠지. 평균으로도 12초는 뛴다고 봐야 해."
한 쌤은 육상은 개인 종목이지만 또한 경쟁 종목이라 하셨다.
"너도 선수가 되겠다면 투쟁심을 무시하면 안된다."
"네."
"같이 뛰는 선수가 빠르면 빠를수록 더 좋은 성과를 내는 법이야. 그렇다고 너무 욕심 부리지 말고. 오늘 배운 스타팅 감각을 익힌다 생각하면서"
여러 가지 조언을 듣고 출발대로 이동했다.
지민이 형은 먼저 자리에 서서 까딱 까닥 손을 흔들고 다리근육을 풀고 있었다.
"죄송해요. 형."
"아니야. 나도 궁금했어."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우리 둘 다 최고기록 한번 뽑아 보자."
역시 멋진 인간이다.
한편으론 당신 같은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와 사귀어서 정말 다행이라 생각들지만.
그렇게 쿨하게 인정하기엔... 나라는 놈이 아직 너무 찌질할 뿐이다.
"..."
시합만 집중하고 싶다.
이런 저런 감정을 떠나서 오직 이기는 것 하나만 보고 싶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를 않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순간 갑자기 마음 저 깊은 곳에서 형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마하야. 명경지수(明鏡止水)다.
티 없이 맑고 순수한 마음이 되어야 너의 힘을 깨우칠 수 있어.
"..."
그런가. 명경지수인가.
"선수들 준비."
이미 떠난 배는 떠난 배다.
내가 달릴 트랙만 눈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후우."
"Get set."
한 쌤이 옆에서 총을 들어 올리고 우리는 스타팅 블록에 발을 올리며 자세를 갖췄다.
"..."
더없이 조용하다.
마치 잠이 들 듯 정적에 빠져들 것만 같다.
뭔가를 생각하고 싶어도 가슴이 눌러 막은 듯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이 평화로웠다.
탕!
그리고 출발 신호에 맞춰 몸을 던졌다.
뛰고 싶다. 이기고 싶어. 그런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본능에 모든 것을 맡긴 채 한 시간여 반복한 훈련을 몸으로 수행했다.
"우와아!!"
"마하야 달려!!"
바람이 느껴져. 몸이 가볍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야.
섹스고 올림픽이고 상관없어.
더 더! 아무 생각 없이 계속 뛰고 또 뛰고 싶은 기분이 전신을 지배하는 것 같다.
* * *
"후우."
"많이 먹어 주영아. 오늘 고맙다."
"허우우..."
"왜 이렇게 한숨이야. 밥 먹는 자리에서."
"히우우우..."
오후 훈련을 마치고 학생들을 돌려보낸 뒤 한상률과 이주영은 오랜만에 회포도 풀겸. 아까 있었던 기념적인 일을 되집어 보고 있었다.
"...진짜냐?"
"나한테 그래. 초시계 들고 있던 건 너였으면서."
"아니. 뭔가 좀 이상하잖아."
재능있는 선수의 출연이야 육상인으로선 반가운 일이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이주영이 목격한 구마하는 분명 초심자의 몸놀림.
아무리 봐도 11초 대 기록이 나올 애가 아닌데. 상률이가 뭘 잘 못 먹었나 싶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정확하지 않다. 하물며, 친구는 육상을 떠나 교직에 몸을 담근지 몇 해를 보냈다.
실수는 충분히 벌어질 수 있었다.
마하도 본인 입으로 13초 기록이라고 했고, 잘 하면 12초 후반이거나 13초 초반으로 봤거늘. 물론 그 정도도 대단한 재능이지만.
"지민이가 자신감을 잃을까 걱정이다."
"800m는 뭐야?"
"몰라. 그건 나도 아직 못 봤어."
"야. 진짜면 이건 우리가 아니라 태릉에서 와야 돼."
"..."
단거리와 중거리는 쓰이는 근육이 다르다.
호흡법도 다르고 체격도 남다르다.
그렇기에 두 종목에서 균일하게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
스포츠 역사상 96년 아틀랜타 올림픽 미국의 육상영웅 마이클 존슨이 200m와 400m를 동시에 석권한 것은 그래서 모든 체육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대목이다.
"일단, 먹자. 어? 먹고."
"상률아. 전학 보내."
"..."
"널 무시하는 게 아니라, 걔는 지금 너희 학교에 있을 애가 아니야."
이주영이 지켜 본 고 3학년 안지민도 어려서 육상에 재능이 있고 꾸준한 노력을 해온 선수였다.
하지만 스포츠는 결과로 말한다.
재능이든 노력이든 기록 앞에 평가는 냉정하다.
11.97.
그의 최고 기록보다는 조금 미치지 못하지만, 인간인 이상 기복은 있는 법. 충분히 잘한 성과였다.
그러나 정식 트랙에서 처음 훈련을 거친 제대로 된 스프린트를 오늘 처음 신었다고 말하는 구마하의 기록은.
"11초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11.00이 나왔어."
"알어."
"9초대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감당할 수 있겠어?"
격정적으로 말하는 친구 이주영을 보며, 한상률은 차분히 집게를 들어 올렸다.
"일단 먹어. 고기 타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