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남자는 허리가 생명 (2)
"넌 운동 한다는 놈이 뭐 이렇게 살 게 많냐?"
"많지. 내가 그동안 뭐 신발 하나 제대로 가지고 있었냐."
"그래서? 다 샀어?"
"아직. 양말 사야 돼."
"양말도 없어?"
"스포츠 양말은 없어."
"씨발 운동은 뭐 양말까지 따로 신어?"
"미친놈아. 땀이 얼마나 나는데. 발목 양말 이런 건 그냥 찢어져."
"아 좀 대충하고 집에 가자."
"가면 할 것도 없는 놈이 지랄이야."
"배고파. 마하야. 떡볶이 사줘."
"이것만 사고. 좀 그만 투덜거리고 와."
태윤이는 그래 보여도 나름 지 성적을 챙기는 놈이다.
남수도 어찌됐든 여자친구가 있어 독서실을 빼먹지는 않는다.
다들 공부에 매진하는 시험기간. 정석이를 불러 쇼핑을 나왔다.
이 녀석은 불러도 된다.
애당초 공부든 뭐든 관심이 없는 놈이라 오히려 언제 어느 때고 불러주면 좋아하니까.
"운동하면 돈 많이 깨진다더니, 육상도 돈을 쓰네."
"그래도 육상은 좀 낫지. 다른 종목은 어마어마 하더만."
"야. 그럼 너도 한상열한테 뭐 주냐?"
"안 줘. 선생님도 그런 거 신경쓰지 말래. 어차피 학교 차원에서 다 움직이는 거라고."
"야. 씨발 그런 게 어딨어. 엄밀히 학교 끝나면 선생들도 업무 끝나는 거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선생님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억울하면 너도 같이 운동하든가."
"그럴까?"
쩝쩝 정신없이 떡볶이를 먹던 가운데 나온 이야기였다.
가만히 정석이를 보며 물었다.
"진짜 운동하고 싶어?"
"아니. 딱히 운동이라기 보다는. 그냥 슬슬 뭐라도 해야되지 않을까 싶어서."
보기엔 별 생각 없이 사는 놈 같아 보여도, 속에는 나름 어떤 고민이 있었나보다.
다른 친구들이 없어 그런가, 어쩐일로 정석이가 진지한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마하야. 운동 재밌냐?"
"나는 재밌지. 적성에도 맞고."
"지금 시작하면 좀 늦겠지?"
"뭘 하고 싶냐에 따라 다르지. 우리가 무슨 20대 후반도 아니고.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리고 나도 뭐 시작한 지 얼마 되기나 했나."
"그래도 넌 잘하잖아. 재능도 있고. 생긴 건 좆같애도."
"미친 새끼. 왜 시비야?"
태윤이는 외동이고, 남수는 누나가 있다.
나도 형이 있어 우리 셋은 어느정도 성향이 비슷한 반면, 정석이는 우리와 다르게 세 살 어린 동생이 있었다. 유일한 형이었다.
"뭔 일 있어? 갑자기 왜 안 하던 고민을 하고 그래?"
"아니. 어제. 집에서 멍하니 있는데, 이번이 우리 마지막으로 즐길 수 있는 여름이겠구나 싶더라고. 내년엔 고3이니까."
겨울은 겨울이라고 고3 앞둔 긴장감이 있고, 내년 여름 겨울은 다들 모의고사다 원서다 바쁘게 뛰어다닐 시기라 정석이는 올 해가 마지막 여름이다 생각하고 우리와 어딜 갈 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숙박 이런 거 인터넷 보고 있는데 엄마가 갑자기 존나 뭐라고 하는거야."
"아이고 이 등신아... 혼나도 싸지. 시험기간에 뭔..."
"엄마한테 혼나는 건 그러려니 하겠어. 근데 정수 이 새끼가 형을 씨발."
동생 앞에서 혼난 게 쪽팔려 괜한 반항심이 생기고 만 착한 아들 이정석. 이 녀석이 자랑스런 내 친구 중 한 사람이다.
"그나마 믿던 게 넌데. 너도 이제 운동한다고 정신 차리고 있는 걸 보니까 위기감이 확 들어서."
"그래서? 운동이라도 해보겠다?"
"야. 많이 어렵냐?"
"몰라 병신아. 니 몸이 버티면 쉽고, 아니면 어렵겠지."
아무튼, 정석이는 적당히 공부하면서 꿈에 진지하게 임하는 내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 않았나 보다.
갑자기 새벽이나 저녁 운동을 따라나서겠다길래 그러라고 했다.
"정말 가도 돼? 방해되는 거 아냐?"
"괜찮아. 나도 뭐 아직 정식으로 훈련하는 것도 아닌데."
"그래? 그럼. 나 진짜 간다."
"와. 옷 잘 챙겨입고. 새벽 은근 쌀쌀하니까 바람막이 하나 챙겨라."
오늘은 쇼핑으로 시간을 보냈으니 내일 새벽 6시 반에 나오라고 했다.
"내일은 시험 마지막 날인데?"
"오늘은 시험 아니었냐?"
"하긴 그렇구나. 별 상관 없네. 어차피 공부 안 할 거니까. 하하하!"
하하하! 하여튼간 대책 없는 자식.
딱히, 운동을 하자는 건 아니고. 그냥 간단히 바람이나 쐬자는 의미로 불렀다.
정석이네 집은 우리보다 남한산성에서 더 가깝기도 하고, 가슴 답답할 땐, 땀 한 바가지 쭉 빼는 것도 좋은 기분전환이 되니까.
"어? 이 새끼 진짜 나왔네."
"그럼. 내가 안 올 줄 알았냐?"
"밤에 딸 치다 기절한 줄 알았지."
"미친놈. 내가 너냐!"
새벽 운동은 늘 뭔가 말로 표현 못 할 쓸쓸함이 느껴졌는데, 친구가 있으니 이건 이거대로 좋구나.
"진짜 쌀쌀하네. 여름인데."
"내가 춥다고 했잖아."
"훅! 훅! 아무튼, 마하야. 이제 뭐하냐? 준비운동?"
"난 여기까지 오는 시간에 몸 다 풀려서 따로 준비운동은 없고. 이제 서문 찍고 집에가지."
"서문? 진짜? 저 위에??"
"어."
"미친 새끼. 거기 존나 멀건데?"
"하하! 처음은 힘들었는데, 하다보니까 조금씩 눈에 익더라고."
"와... 서문이라. 빡센데..."
그럼 처음이니 뛰지 말고 적당히 회복 차원에서 등산이나 하자는 마음으로 산을 올랐다.
처음은 수다도 떨고 잡담도 나누고 하던 정석이지만, 어느정도 산을 오르자, 금방 숨이 차면서 말수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힘드냐?"
"헉... 허억... 넌 안 힘드냐?"
"나도 숨 차는데 참는 거지."
"왜? 씨발. 숨이 차면 쉬어야지. 사람이 새끼야 맑은 공기를 무시하고 있어... 나무한테 미안한 줄도 모르고."
"하하하! 그런 게 아니라, 그래야 속근이 발달한데."
"속근은 또 뭐여? 딸근은 들어봤어도."
육상은 단거리와 장거리에 따라 쓰이는 근육이 다르다.
단거리는 속근. 장거리는 지근.
속근은 흰 근육으로 폭발적인 힘을 내는 반면, 지근은 빨간 근육으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이 풍부해 유산소 운동에 적합하다.
나는 단거리를 뛰고 싶으니 가급적 호흡을 조절하며 최대 파워를 내줄 수 있게 속근을 키우고 있었다.
"이 새끼. 그런 건 어디서 배웠어?"
"한 쌤이지. 나 학교 끝나고 육상 이론 공부도 같이 해."
"오..."
"왜?"
"그냥 갑자기 너 좀 못 생겨 보여서."
"병신. 빨리 와! 더 늦으면 학교 늦어."
"그렇네. 여긴 늦으면 그대로 학교도 지각이구만. 스릴있네."
"아침에 운동하고 가면, 수업시간에 잠도 잘 와.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점심이야."
"하하. 또라이 새끼."
떠들다 보니 어느새 약수터에 도착했다.
둘이서 물 한 바가지 떠먹고 다시 빠르게 가보자 하고 있는데.
"아아~ 시원하다. 마하야. 한잔 더."
먼저 어떤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던 모래주머니가 옆에 보인다.
"야. 뭐해? 물 달라니까?"
"니가 가서 떠먹어 새끼야! 지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아 힘들다고."
"진짜 니 동생이 불쌍하다. 형이라는 새끼가 어리광이 심해."
저벅저벅 모래주머니를 챙겼들자 정석이가 그건 갑자기 왜 들고 지랄이냐고 뭐라고 한다.
"어떤 할아버지가 갖다 달래."
"할아버지? 뭐하는 사람인데?"
"몰라. 며칠 전에 봤을 때 올라가면 이거 하나씩 챙겨 오라고 그랬어."
"이상한 사람 아냐?"
"모르지. 눈 올 때 그런 날 쓰려고 그러겠지. 가자."
"좋아. 나도 하나 들자."
"놔. 지 몸 챙기기도 버거운 놈이"
"꺼져! 니가 나보다 빠른 건 용서해도, 키 커지고 힘 쌘 건 용서 할 수 없어!"
의욕 넘치게 소리치던 놈은 불과 100m도 못 가 찡찡거리고 난리가 났다.
"마하야... 같이 가..."
"어우. 저 진상 진짜..."
더 지체되다간 시험을 늦을 거 같아, 하는 수 없이 정석이 모래주머니까지 내가 챙겨들게 됐다.
"안 무겁냐...?"
"후우. 후우. 닥쳐. 확 밑으로 던져버리기 전에..."
"숨 몰아쉬지 마. 훈련이라며..."
불만은 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양손으로 모래주머니를 들고 산을 오르는 건 뛰는 것과는 또 다른 자극이었다.
나는 운동을 시작한 뒤로 근육통에 시달릴 때마다 뭐라 말하기 어려운 설레임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의 통증은 고통이 아니니까. 이건 나의 힘이 더 강해지고 몸이 아름답게 변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야. 여긴가 보다."
"헉. 허억. 뭐? 어디?"
"여기. 모래주머니 놔 달라고 써 있는데."
"진짜?"
매번 가파른 산길을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팔려 몰랐는데, 모래주머니 여기다 놔주세요 라는 안내판이 있었다.
주머니를 놓고 숨을 몰아쉬고 있으니, 그때 그 할아버지가 나타나셨다.
"어이고. 고생 많았구만. 진짜 가져와 줄 줄이야."
"허억. 헉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많이 무거웠지?"
"하하. 네!"
아니요라고 하실 줄 알았는가, 할아버지가 멎쩍은 미소를 지어보이신다.
어르신 요즘 애들은 솔직하다고요.
얼마나 솔직하냐면.
"근데 할아버지. 왜 모르는 사람들한테 이런 걸 시키세요?"
하하~ 보셨죠? 제 친구입니다...
"하하하... 아니에요. 괜찮았어요."
"미안하네. 보다시피 난 몸이 이래서."
할아버지 뒤편으로 작은 망치와 양동이가 보였다.
아. 혹시?
"할아버지. 혹시 여기 위에 계단 만들고 계시는 거세요?"
"응."
"와... 혼자서요?"
"왜요? 구에서 하래요?"
"아니. 할 것도 없고. 길도 험하고. 무엇보다 심심해서"
남한산성은 본래 군사기지의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 진 곳이다.
적들을 막기 위해 높은 산 정상에 더 높은 산성을 쌓아 올린 곳이라 큰 공사나 인부들이 작업을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산 중턱 어딘가에 조악해 보이는 계단과 다리가 있었다.
구청이나 산 관계자가 아닌 이 할아버지가 혼자 만드셨단다.
단지, 하고 싶어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섹스에 미쳐 운동을 시작한 나 같은 놈이나, 사지육신 멀쩡해 뭘 하고 살아야 할 지 모르는 정석이 같은 놈한테 산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은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진짜 혼자 그냥 만들고 있는 거라고요?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왜 도와주는 사람이 없나. 자네같은 젊은 친구들도 돕고, 다른 등산객들이 재료도 사주고"
"할아버지. 돈 받고 하는 일 아니죠?"
"후후후. 돈이 뭐 그리 중하다고."
아직 충분히 정상을 찍고 올 시간이 있지만, 우리는 자리에 앉아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 나무도 할아버지가 심으셨다고요?"
"그렇지. 여기 이 나무도 심고, 저기 꽃도 심고."
"왜요? 여기가 고향이세요? 뭐하러 그렇게 정성을 쏟으세요?"
"후후후. 고향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보기 좋고 걷기 좋으면 그만이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는 그날까지 산을 가꾸고 길을 닦으시겠다는 산 할아버지.
그저 하고 싶으니까. 그것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되니까.
할아버지는 그리 말씀하시면서도 어디선가 일을 하고 오셨는가 수건을 들어 이마와 목줄기의 땀을 닦아내고 계셨다.
"..."
와... 이제보니까 팔 근육이...
"학생. 운동하는 학생이라고 했었지?"
"네? 어 네."
"다음에도 부탁해도 될까?"
"그럼요. 물론이죠."
슬슬 학교 갈 시간이라 할아버지껜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산을 내려왔다.
"진짜로 저런 사람이 있구나."
"몰랐냐? 따져보면 여기 니네 동네잖아."
"몰라. 나 여기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왔어."
"길을 놓다니. 혼자서... 이 다리도 그럼 저 할아버지가 만든 걸 거 아냐?"
"할 일 없어서 하고 있다잖아. 뭘 그렇게 감탄을 해."
"정석아. 내가 그래도 짧게 운동을 해봤잖아."
땀을 닦아내던 할아버지의 팔 근육을 보았다.
그건 절대 할 일 없어 소일 거리 하는 영감님의 팔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세월을 노동으로 다져진 실전근육.
진정한 고수들이 풍기는 아우라가 이런 것인가...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자겠지. 노인정에 가서 고스톱을 치든가. 저런 분은 할 일을 만드는 사람이야. 그것도 숭고한 일을."
"하긴, 나라에서 뭐 주는 것도 아닌데. 대단한 영감님이긴 하지."
"리스펙이다. 진짜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노력.
기뻐해 줄 누군가를 위한 헌신.
얼마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가고야 말겠다는 성실.
나는 섹스를 위해서 운동을 시작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산 할아버지 같은 자세를 본받고 싶어졌다.
* * *
운동하는 놈이라도 일단은 학생인지라, 기말고사를 마쳤다는 해방감에 며칠간은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할 땐 하더라도 놀 땐 노는 것도 중요하니까.
"후우. 후욱!"
그리고 일주일 뒤. 다시 산을 찾았다.
오늘도 두 개의 모래주머니를 챙겨 올라가고 있다.
다음은 네 개를 들어봐야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먼저 할아버지를 만났던 지점에 도착했다.
"헉. 헉. 할아버지~~"
"어이~!"
"어디 계세요? 모래 주머니 가져왔어요."
"거기 놔두고, 잠깐만 이쪽으로 와 봐."
물 소리가 나는 계곡 어딘가에서 산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선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풀 숲을 해쳐가니. 영감님이 생각지도 못 한 선물을 만들어 두셨다.
"이게 뭐에요?"
"운동한다며. 재료가 남길래 만들어 봤어."
합판을 잘라만든 등판에 공사장 쇠봉 양쪽으로 10kg 공구리 바벨이 달린 역기였다.
공구리 감성 푸근한다.
쇠봉도 너무 두꺼워 손에 잡기 어렵지만 묵직한 맛은 있다.
무엇보다 슬슬 웨이트를 병행해야 할 시간이었다.
"와... 할아버지 진짜 써도 돼요?"
"써 봐. 우리 젊을 땐 다 이렇게 운동 했었어."
"하하하! 고맙습니다!"
"열심히 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