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천일의 밤 (1)
"형 이 말라 비틀어진 바나나 같은 건 뭐야?"
"그거 바나나 맞어."
"뭐야? 샀어? 이런 걸 왜 사?"
"윗층에서 주셨어."
"윗층 누구? 사람들 많이 안다."
"혜정이네 어머니가 우리가게 단골이잖아. 방학동안 해외여행 다녀오셨다 그러더라고."
상점가 공인중개사를 운영하는 혜정이네 아줌마가 형네 단골이었단다.
둘이 어떻게 잘 아나 했더니 그런 관계로 이어졌구나.
"어어~ 어쩐지 맛있더라."
"하하하! 말라 비틀어 졌다며. 먹지마 인마."
"왜? 나 바나나 좋아해. 근육에도 좋아 이거."
"어이구... 이제 혜정이랑은 인사하냐?"
"늦겠다. 나 갔다올게."
"하하! 이 자식. 잘하고 와."
이웃간 인사가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냥 서로서로 얼굴 보면서 무탈하게 살고 있구나 하면 되는 거지...
합숙중에도 지민이 형이 누구(?)와 그렇게 통화하는 걸 봤었다.
다정다감한 말투나 장난스런 이야기로 따져봄 분명 혜정이겠지. 둘이 사귀니까.
늘 곁에 있으면서도 멀리있는 존재.
이상한 게 아냐. 지구랑 달도 그렇게 있잖아.
산과 산. 제주도와 마라도.
자연스런 거라고. 걔들이 인사하는 거 봤어?
키가 크고 몸도 단단해진 나였다.
반 친구들까지 대체 뭘 먹었길래 그렇게 컸냐 물어보지만 몸만 변했지 세상은 바뀐 게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인기 없고 지루한 학교 생활은 친구들과의 잡담으로 채워지고 있다.
"마하야. 아까 여자애들이 너 보고 지나갔다."
"꺼져 병신아."
"진짜라고. 아 왜 말을 안 믿어."
"닥쳐. 이 새끼들 키 컸다고 이상한 걸로 놀리고 있어."
"새끼야 원래 여자는 남자 얼굴 안 따지는 거라니까. 너 이제 자신감 가져도 돼."
"진짜 존나 어이없네. 아다새끼들이 뭘 안다고 떠드는지."
한 달여 떨어져 있던만큼 애들과의 시시껄렁한 잡담은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진짜 바다에서 여자들 보는데 비키니 장난 아니고. 허벅지에 침 한번 뭍혀보면 소원이 없겠더라."
"돌았네. 미쳤어. 제정신 아니지. 약 먹었냐? 그랬다간 바로 구속이지 새끼야."
"꺼져. 무식하게 타이어만 끌고 다니던 놈이 뭘 안다고."
"태윤이가 맞어. 존나 꼴렸어. 장난 아니었다고. 아마 넌 봤으면 그 자리에서 쌌을 걸?"
"야. 우리도 바다에 해수욕하는 사람들 많았거든."
친구들의 여름 바다 추억을 듣고 있었다.
남수는 요즘 얼굴을 잘 안 비추고 있는 상태다.
우리와 반이 다르기도 했지만, 지난 여름 애들 앞에서 추태를 부린 게 있어 더 안 찾아오는 거 같다''.
"가보자니까."
"둬 그냥. 걔도 지 생각할 게 있으니까 그러겠지."
"너네들 남수 여자친구랑 끝났을 때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냐?"
"안 했어 우리가 미쳤냐? 오히려 데리고 나가서 기분 풀어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태윤이와 진실의 퍼즐을 맞추고 있는데 정석이가 말했다.
"패배감이 들었겠지... 난 걔 심정 이해해."
"뭘 이해하는데?"
"패배감은 또 뭐냐?"
"봐 봐. 숙소도 없이 떠나간 여자애들. 막 헤어진 상태. 남수는 아다고, 여자친구는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고."
"그래서?"
"그만해 병신아. 친구 여자친구로 그러는 거 아냐."
"해운대. 그곳엔 전국에서 몰려든 멋진 오빠야들이 폭죽을 들고서 너도 한번 쏴볼래 다가오고. 마음은 공허해 아 오늘 밤 이 남자와"
태윤이의 눈빛이 때려도 좋다는 뜻을 전해주고 있다.
주저없이 정석이한테 주먹을 날렸다.
"아! 왜 때리냐? 이제 크다고 막 줘팬다 이거지? 물 떠다 줘? 빵 사다줄까 개새끼야!"
"미친 거 같애. 진짜 어쩔 땐 너랑 있다보면 정신 나가는 거 같다고."
"꺼져 지야말로 학교 여자애 보면서 상딸이나 치는 새끼가."
"닥쳐! 누가 상딸을 치는데."
누가 들을까 겁난다며, 태윤이가 남수 없는 상황에 남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분위기가 진정되고 우리는 꽤 심도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학생이라 그러나? 여자친구 있어도 못 하는 거야?"
"남수도 분위기는 몇 번 있었는데 공간이 없었다고 그러데. 집에는 다 부모님들 계시고. 어딜 갈 수도 없고."
"다들 어디서 하는 거지?"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에서 어떻게 해?"
"몰라. 나도 들었어. 비디오 방도 존나 한다 그러고."
심도깊은 대화는 섹스로 이어진다.
청명한 가을 하늘에 구름이 떠가도 섹스다.
2학기 중간고사 기간에 추석이 겹칠 수 있어도 섹스다.
파리 두 마리가 눈 앞에서 짝짓기를 하고 있어도 아 이건 그냥 섹스가 맞구나.
애들과 있으니 재밌고 즐겁긴 하지만, 모든 것이 섹스로 통용되는 세상 속을 살아가는 것 같다.
공허한 기분이었다. 허무한 외침이 가질 수 없는 부를 열망하는 노동자들의 마음같다.
한편으론 섹스고 뭐고 정신없이 운동만 하던 시간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감독님. 이제와서 전학은 좀 그렇죠?"
"왜?"
한 감독님을 찾아와 고민상담 시간을 가졌다.
"아니. 친구들도 좋고. 다 좋은데... 뭔가 운동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후후. 내가 너 운동 시작하면 그럴 줄 알았지."
"안 되요? 오히려 그게 더 낫지 않나요?"
"마하야. 운동 재밌지."
"네."
"많이 못 하니까 재밌는 거야. 가지지 못하는 열망이라고 들어봤어? 막상 너 같은 애들이 운동만 집중하라면 오래 못 가."
합숙 훈련을 떠올려 보라신다. 엘리트 체육은 그 못지않은 과정을 매일같이 반복하는 짓이라 하셨다.
확실히. 그걸 매일 하라는 건 무리지만...
그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갈증이 쌓이고 있으니. 그건 그거대로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그렇게 갑갑해?"
"모르겠어요. 애들이랑 있는 건 나쁘지 않은데, 자꾸 운동은 멀어지는 거 같고."
"역시. 현직에 있는 사람이 나보단 낫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 감독. 주영이가 너 꼭 대회 참가시키라고 했었거든, 이런 문제가 생기네."
목적지 없이 출발하는 차량은 없다. 훈련도 골인 지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올림픽은 결과지 과정이 부족한 상황.
한상률 감독님이 전국체전 참가를 말씀하셨다.
"안 그래도 요즘 전국체전 참가 신청기간이라 한번 이야기를 해볼까 싶었는데."
"진짜요? 저 나가도 되요? 올해는 대회 없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그런데. 이 감독 말 듣고 너 지금 상황 보면,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
요즘도 방과 후 일주일에 두세 번은 한주고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고 있다.
"아. 그래서 그렇게 나만 계속 운동장 뛰라고 하셨구나..."
"목소리 톤이 뭔가 불만이 있는 거 같은데?"
"아니. 저는 그냥 감독님 안 계시니까 귀찮다고 내버리셨나 싶었죠. 저만 계속 뛰거든요."
"하하하! 한고에 중거리 선수가 없긴하지."
이주영 감독님의 중거리 제안은 합숙 첫날부터 나왔던 이야기였다.
단거리와 중거리. 같은 듯 다른 종목.
전력을 다 해 냅다 뛰고 보는 단거리와 달리, 중거리는 호흡이나 밸런스 조절이 어려워 쉬운 종목이 아니다.
"그래도 주영이가 잘하고 있다고 하더만."
"페이스 조절이 진짜 어려워요. 속도를 조금만 높여도 숨이 차서 못 뛰겠고, 늦추면 기록이 떨어지는데."
"잘하고 있어. 마침. 이야기 나온 김에 대회 신청서 같이 쓰자."
감독님이 프린트를 뽑아 오셨다.
"오~ 구(具)씨를 한자로 그렇게 쓰는 구나."
"아홉 구 쓰는 줄 아셨어요?"
"아무튼, 100미터 200미터는 나가는 거지?"
"당연하죠."
"그리고 400까지. 이야~ 너 훈련 많이 해야 되겠다."
"으음..."
"왜?"
"저 감독님. 만약에요"
세 종목을 다 우수한 성과를 얻게 된다면 어떻게 되느지 여쭤보자, 감독님의 여유롭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진다.
"큰일 나는 거지."
"좋은 의미죠?"
"대단한 의미지. 마이클 존슨이 왜 위대한 선수인지 말해줬잖아."
"네."
"한국 땅에서 그런 기량을 갖춘 선수가 나온다? 그럼 당장 내일이라도 태릉에서 오라고 할 걸."
"국가대표가 된다고요? 고등학생인데요?"
"고등학생 선수들 많어. 일찌감치 병역 딴 애들도 얼마나 많은데."
"우와..."
"아시안게임도 있고. 아무튼, 국가대표는 나중 이야기고 일단은 학교 생활에 집중해라. 알겠지?"
"네."
학교 생활에 집중하라고 하셨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집중이 되나.
병역 특례면 메달을 땄다는 말이잖아. 올림픽 선수촌을 갔다는 거 아냐.
걔들은 해봤을까? 아시안게임도 선수촌을 운영하나? 거기서도 할까?
솔직히 슬라브 여성들 볼 거 뭐 있어. 같은 동양계에 일본이 있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잠잠하던 열정이 살아나는 이야기였다.
전국체전을 나갈 수 있다.
경험 삼아 뛰어본다지만, 실력만 입증되면 태릉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내년은 아테네가 있지..."
그리스 신전은 예로부터 순결한 처녀들이 불을 지켜왔다. 그것이 지금의 올림픽 성화.
요즘도 성화행사를 하면 야들야들한 옷을 입은 여신같은 사람들이 태양열을 받아 불을 지핀다.
아테네 올림픽...
와 진짜 가고싶다.
이번 전국체전에서 우승만 한다면...
"후우. 안되겠다. 역시 운동해야지."
가을 태풍이 몰려온다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아테네 여신을 떠올렸더니 비너스고 뭐고 막 생각나서 가만 있다간 단백질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손을 움직일 것 같았다.
그래서 맨몸 운동을 시작했다.
"475. 후욱! 476!"
허벅지는 제2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특히 스쿼트는 육상은 물론이고 축구 태권도 수영 배드민턴 테니스 등. 모든 종목의 기본 중의 기본 운동이었다.
근육이 찢어진다. 내일이면 더 단단한 허벅지가 되어있을 것이다.
"오케이! 천 개 도전!!"
500개만 하자 했다가 오기가 생겨 1000개를 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600개가 넘어서자 다리가 떨려온다.
갑자기 1000개는 역시 무린가...
아니야. 참자. 참는 거야.
애들 앞에선 모르는 척 했지만 나도 요즘 사람들이 슬쩍슬쩍 쳐다보는 시선을 알고 있다.
역시, 키가 크고 어깨가 벌어지니까 그러는 거겠지.
복근이 생긴뒤부턴 동네 아줌마들도 어머? 너 1102호 맞니? 하면서 말을 거는데, 말근육같은 허벅지를 가지면 아줌마가 아니라 대학생 누나들이 말을 걸 수도 있어.
"845!!"
그래 허벅지다. 남자는 허벅지야!!
얄쌍한 기생오라비 같은 놈들은 여중생까지지, 여고생들은 대학생 언니들을 따라갈 거야. 아니고서야 왜 그렇게 여자애들이 이대 앞에 몰려 있겠어.
미래를 봐라.
중학교는 지났다.
어른의 시각으로 멀리 내다보는 거야.
"미친 씨발... 다리 떨리는 거 봐라..."
900개를 앞두고 다리에 경련이 일어난다.
이거 위험한 거 아냐? 그만두는 게 맞지 않나?
포기하고 싶다. 몸을 생각해서라도 운동은 적정 선을 넘어선 안된다.
"후욱!"
하지막 고작 100개다. 900까지 왔는데 100개 못하겠는가.
이 한계를 넘어서냐 아니냐에 따라 메달색이 바뀐다면...
"그래. 가자!"
집중해라. 자세다. 자세가 흐트러지면 안된다.
섹스도 정자세라는 말이 있지 않던가.
"후우. 후우우"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가운데 불현 듯 떠오른 정자세.
바른 자세라. 얼마나 바르면 모든 연인들이 사랑을 나누는 기본중의 기본이 되었을까.
남녀는 서로를 바라보며 여성은 편히 눕고 남자는 상대방이 무방비한 상태에서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물론 가슴을 만져도 되고 허리를 잡아도 된다.
다리를 드는 장면들도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가벼운 여인이라도 인체는 무게가 있기 마련이다.
잠깐 들어올려진 다리는 튼튼한 남자의 다리위에 놓인다.
그래. 여기서도 허벅지구나.
허벅지의 중요성이란 따로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947!!"
안돼. 그만해. 이러다 부상입어.
아니야. 포기하지 마. 넌 할 수 있어.
인격이 두개로 분리되는 거 같다.
그깟 섹스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되는데! 부르짖는 나와.
닥쳐! 악마의 말에 귀 기울이지마! 넌 할수 있어! 응원하는 나.
뭐? 왜 섹스를 원하는 쪽이 천사냐고?
당연하지. 천사는 사랑을 강조하는 법이니까.
"구... 구백 팔십... 오"
할 수 있다. 인간의 몸에 한계란 없어.
봐. 이 와중에도 정자세를 떠올렸단 이유 하나만으로 팬티가 빵빵하게 서 있잖아.
물론 발기는 근육이 아닌 혈액이라고 누가 그랬지만 중요하지 않어.
내 몸에 힘이 있다는 게 중요하다.
여력이 있는 것이다.
쥐어 짜.
열 다섯 개 남았다.
가는 거야!
"구백 팔십... 구... 구백 구십!"
라스트 열 개. 목표한 수량을 향해 달린다.
1,000개를 해내면 오늘은 상을 주자. 젤 야한 걸로 골라보는 거야. 노모를 찾아봐야지.
이 체력에 할 수 있냐고? 물론. 고생한 건 허벅지지 팔이 아니잖아?
넘치는 고양감.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
운동이 주는 매력에 또 한 번 취할 거 같다.
"천!! 씨... 씨발 헉! 허억 처... 천 개!! 했어! 해냈어!!"
천개를 해냄과 동시에 철푸덕 쓰러지고 말았다.
와 미친 말도 안돼. 진짜 천개를 할 줄이야.
"헉. 헉! 허억. 헉!"
언젠가 여자랑 하는 날이 오면 멋들어진 다리근육을 자랑하며 말해줘야지.
자기야. 나는 당신과 하기위해 고통의 시간을 걸어왔어. 그러니까 입으로 한번만 해주면 안 될까?
"큭큭큭! 크크큭! 하하하하~"
머릿속에 야한 것만 가득찬 밤.
그래도 스쿼트 천 개를 해냈다.
허벅지도 꿈틀꿈틀 함성을 질러준다.
오늘은 천개를 했으니 다음엔 천 그 이상을 해낼 수 있겠지.
나는 더 강해진다.
더 멋있어 진다.
올림픽이여. 아니 전국체전이여. 내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