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천일의 밤 (2)
"왜 그래. 기분 풀어주려고 그랬다잖아."
"기분도 분위기를 봐서 풀어줘야 될 거 아냐! 방금 여자친구랑 끝낸 놈한테 나가서 비키니 구경이나 하자는 게 할 소리냐!"
역시 그럼 그렇지. 이 또라이 새끼들...
지놈들 실수가 있지 않고서야 남수가 이렇게 벽을 칠 이유가 없지.
선선한 저녁. 몸이나 풀 겸 동네 초등학교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남수가 찾아왔다.
뭐든 양측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고, 남수는 남수대로 애들한테 불만 많은 상황이었다.
"막상 여자들 앞에가면 아무 소리도 못 하는 새끼들이."
"그걸 또 갔어? 진짜로...?"
"갔지. 어버버 거리고 있어서, 그때도 내가 같이 놀래요? 이러는데 잘 안 됐다고 또 나한테 진심 아니라고 뭐라고 하고."
"어이고... 그런 상황에서 이박 삼일 잘 보내고 왔네."
"셋이서 물장구나 치고 치킨이나 시켜먹고 그러고 왔어. 치킨도 맛없어. 부산 씨발 파라솔은 왜 돈을 받는데."
"어쨌든 다 같이 놀러갔는데 너도 어떻게 니 기분만 고집해. 풀어. 애들한텐 내가 말할게."
"하든가 말든가. 알아서 해."
남수의 첫사랑이 끝났다.
그래도 뽀뽀도 해보고 손도 잡아보고 지 말로는 할 건 다 해봤다는데, 그렇게 할 거 다 해본 녀석도 섹스라는 높은 벽은 넘지 못했다. 아니 넣지 못한 건가?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
"...연정이?"
"응. 우리랑 친해졌을 땐 이미 만나고 있었잖아."
"별거 없어. 그냥 같이 있다 보니까 얘기도 나누고 놀러가고."
연애의 시작은 거창한 이벤트나 장미꽃 백 다발 같은 게 아니란다.
중학교 때 학원 친구와 오며 가며 만났고, 이야기를 나눴고. 시간이 남길래 같이 영화도 보러 가다 보니까 여자애가 많이 웃길래 사귀자고 해 사귀게 됐단다.
"겨우...?"
"그럼. 뭐가 있는데?"
"..."
"왜? 진짜야."
"돈으로 협박 한 거 아니고?"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남수는 사귀는 건 별 거 아니라고 했다.
나도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음 충분히 할 수 있단다.
"야. 너 가라. 나 운동해야 돼."
"진짜야. 너 이제 괜찮다니까?"
"죽을라고 이 새끼가. 지 위로 해주고 있는데 속이려고 하고있어."
친구들은 지금의 나라면 충분히 서로간 호감만 생기면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단다.
충분히 멋있어 졌다고, 올 봄 외모다 능력이다 하던 때의 구마하가 아니라는데.
"꺼져. 누가 믿는다고..."
"알아서 해라. 좋은 얘기를 해줘도 니 편할대로 생각하면 그만이지."
"진짜냐? 나 좀 괜찮아 졌어?"
"아니. 좆같은데."
"너도 여자친구랑 끝나니까 입이 거칠어 지는구나."
"별 수 있냐. 친구들이 이모양인데."
슬슬 운동을 마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남수도 깊은 한숨과 함께 과거를 정리하는 것 같았다.
"아... 이럴 거 그냥 둘이서 갈 걸..."
"늦었어. 이미 끝났고."
"여름은 다 간 건가..."
학생으로서 우리의 여름이 끝났다. 고3 여름은 대입의 문턱이니까.
하지만 나에겐 아직 마지막 여름이 있다.
내년 8월엔 아테네 올림픽이 열린다.
정말 잘 되면 좋겠다.
* * *
남수랑 이야기를 나누느라 운동이 부족한 거 같아 집까지 뛰었다.
그런데도 뭔가 풀리지 않길래 아파트 단지를 다섯 바퀴 연달아 더 달렸다.
땀이 비올듯 쏟아지자 그제야 속이 개운해지는데, 갈증이 미친 듯이 올라와 근처 슈퍼를 찾아갔다.
"아이고 목 말러라... 물... 무울. 아줌마. 시원한 물 없어요?"
"방금 넣었는데. 쥬스 마시면 안 될까?"
"쥬스요?"
시원한 물이면 되는데 게토레이나 파워레이드를 고르란다. 고도의 상술이다.
그래도 운동하면 파워레이드지. 코카콜라는 올림픽 공식 후원기업이기도 하니까.
쥬스병을 들고 계산대로 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운동할 땐 귀찮아서 이것저것 안 들고 비상금 오천원만 챙겨넣고 나가는데.
얼씨구? 돈이 없네?
"카드로 할 거야?"
"네? 아니요."
어디갔지? 뛰다가 흘렸나? 애들도 아니고 칠칠맞게 뭐냐 이게...
"죄송해요. 돈이 없는 거 같아서."
"그럼 다음에 올 때 줘."
"아니요. 어떻게 그래요. 이거 그냥 갖다놓을게요."
"내가 빌려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선선한 가을 밤. 짧은 바지에 후드티를 걸치고 있는 혜정이가 개 한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그거 얼만데?"
"어? 어..."
"사장님. 이것도 같이 계산해주세요."
"둘이 아는 사이야?"
"네. 우리 아랫집 살아요."
와 얘는 어떻게 매번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오지?
"자."
"아니... 괜찮은데."
"뭐 어때. 다음에 갚어."
밤에 간식거리를 사러왔나 보다.
작은 봉투에 이것저것 챙겨들더니 개랑 같이 끌어안고 슈퍼를 나가는 혜정이였다.
얘랑 있다보면 늘 그렇듯 나도 집이 저쪽이라 같은 길을 걷는다.
"고. 고마워 집에가면 바로 줄게."
"괜찮아. 내일 아침에 줘도 돼."
"무 물론. 그래야지."
"아. 맞다. 근데 우리 모르는 사이지?"
"어?!"
"나도 이상하네. 모르는 사람한테 돈을 빌려줬지?"
"아... 아니 그게! 그... 그러니까... 그건... 그때. 갑자기 형이."
"후후후."
떠듬떠듬 당황하고 있으니 혜정이가 먼저 웃으며 말했다.
"근데 너 요즘엔 아침에 잘 안 보이던데?"
"아. 운동 끝나고 바로 움직여서..."
"그 시간에? 그럼 새벽에 운동하는 거야?"
"응... 남한산성까지..."
"진짜로? 거기 은근 멀잖아?"
오. 반응이 격한데? 서문까지 갔다 온다고 얘기해줄까?
"그렇구나. 그럼 지금도 운동하고 온 거야?"
"어."
"되게 열심히 한다."
"곧... 대회가 있어서..."
"전국체전?"
"어떻게 알어? 아. 형한테 들었겠구나."
"중요한 대회라고 들었어."
"중요하지. 고등학교 선수들한테 종별대회랑 전국체전의 중요성은 수능 저리가라니까."
아파트 입구까지 100여미터.
인사하면 끝이겠구나 싶은 그때.
"오늘 밤 되게 시원하다. 조금 더 걸을까?"
"..."
"그럴래?"
얘 지금 누구랑 있다고 이런 걸 묻지?
뭔 생각을 하는거야. 당연히 나한테 묻는 거지. 지금 누구랑 같이 있다고.
"그 그래! 좋지! 나도 조금 더 걷고 싶고"
"해피야. 우리 나온김에 운동하고 들어갈까?"
"..."
"응? 뭐?"
미친 제기랄... 개한테 하는 얘기였구나...
혜정이가 애완견을 끌어안고 난처한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아... 미안... 너한테 하는 말인 줄 알았구나."
"그게... 아니. 저기... 그러니까... 내가 착각을..."
구마하 들어가면 반성의 스쿼트 1000개다. 쪽팔려서 스스로가 용서 안 된다...
"같이 있어도 돼."
"어...?"
"아파트라고 해도, 솔직히 밤에 혼자 돌아다니는 건 조금 무서울 때 있거든. 얘도 그래서 데리고 나온 거야."
스쿼트 1000개는 패스다. 오늘 밤은 산책이다.
혜정이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초등학교 이후 쭉 지내던 곳이 이렇게 다양한 꽃이 많고 조경에 신경을 쓴다는 걸 처음 알았다. 관리실에서 그래도 돈을 제대로 쓰긴 쓰는구나.
처음은 둘 다 별 말 없었다.
그러다 원래 운동을 했었냐부터 시작해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나왔다.
"해보니까 괜찮고, 또 재밌기도 하고."
"오빠도 그랬어. 너 되게 빠르다고."
"지민이 형도 빠르지. 이번엔 대회에서 상도 받았잖아."
"으음. 우리 오빠는 운동할 때 어때?"
"잘해. 후배들 잘 챙겨주고. 애들 다 지민이 형 좋아해."
"후후. 그래?"
남자친구 칭찬이 좋은가보다.
형 이야기를 더 해줄까?
"합숙 때도 그랬어. 술 먹다가 걸려서 다들 죽었구나 하고 있는데. 형이 나서서 자기가 후배들 시켰다고 총대매고."
"넌 다른 학교 가서 지내는데 어색하지 않어?"
"별로. 이제는 다들 친해서. 그쪽 학교 선생님들도 인사하고."
"좋겠다. 남자라 확실히 그런 게 다르구나."
"나도 처음엔 노력 많이 했지. 눈치보면서 뛰고 같이 기합도 받고 그때부터 친해진 거야."
"그렇구나."
이렇게 대화가 편할 수 있나? 그것도 여자앤데? 14층 이혜정인데?
우리는 서로를 알면서도 인사 한번 없는 십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랬던 과거가 무색하게 다양한 주제 다양한 이야기 다양한 관점에 대해 정말 쉬지 않고 떠들고 있었다.
"중학교 때 학주 변태였잖아."
"맞어. 우리도 되게 싫어했어. 그런 선생이 운동하라고 했으면 절대 안 했을 거야."
"한상률 여자애들한테도 인기 좋아. 매너 있다고."
"감독님 괜찮지. 훈련 땐 장난 아니지만."
"감독이라고 불러?"
"감독님이지. 이제는 선생님이라고 하면 어색해."
두 바퀴를 돌고, 또 다섯 바퀴를 돌고.
혜정이가 밤에 잡지 보면서 먹으려고 산 과자와 젤리등은 나눠 먹으며, 갈증을 풀려고 산 파워레이드로 서로간에 목을 축였다.
밤 11시가 다 되어 혜정이네 어머니가 전화를 걸 쯤에야 우리의 산책이 끝났다.
"마하잖아. 11층 사는 애."
"뭐야? 우리를 보셨데?"
"하도 안 오길래 베란다로 봤데. 누구랑 있는 거냐고."
"와... 지민이 형인줄 안 거 아니냐?"
"엄마는 나 남자친구 있는 거 몰라."
"..."
"왜? 이상한 거 아닌데."
"어. 그렇지... 굳이 뭐 어른들이 다 아실 필요는 없지..."
이렇게 같이 있거나 또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생각지 못했는데.
맞다. 얘. 음... 맞어. 그랬었지...
처녀다 아니다를 따지는 게 아니다.
남수도 넘지 못한 저 높은 벽을 넘은 친구.
경험이 있는 애라는 걸 의식하는 순간 묘하게 혜정이의 존재감이 달라 보였다.
"넌 여자친구 있다고 얘기해?"
"야. 생긴 걸 봐라. 여자친구가 있을까..."
"왜? 너 재밌는데?"
"..."
"후. 이제는 진짜 들어가 씻어야겠다. 이렇게 걷기만 해도 땀 엄청 나는구나."
재밌는데? 재밌다고? 내가?
"마하야."
"응?"
"내일도 운동 할 거야?"
"난 뭐. 매일하지."
"그럼 너 운동하고 올 때 이렇게 같이 아파트 돌아도 될까? 오늘 해보니까 좋다."
좋다? 재밌고 좋다?
친구들아. 시공간을 초월해 곤륜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
제가 여기서 나도 너 좋다고 말하면 그 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그래."
"됐다! 해피야! 너도 오늘 산책하니까 좋았지!"
해피. 오 해피데이. 형한테 가게에서 남는 고기갈비 있으면 갖다 달라고 해야겠다.
"우와! 엘리베이터 왜케 더워..?"
"나도 땀냄새 많이 나지?"
"너야 원래 운동하고 왔으니까 그렇다쳐도. 후우. 아 더워라."
가뜩이나 그 존재감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데, 그러고보니. 얘 지금 허벅지를 다 내놓고 있잖아. 다리 길고 예쁘다...
덥다고 펄럭펄럭 목덜미를 끌어당기는 부채질이 뭔가 아련한 곡선을 드러내고 있다고.
와 진짜... 눈을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네
무공이 강해지면 눈 감고도 상대를 볼 수 있는 그런 힘이 생기려나?
에잇 젠장. 수련이 부족한 게 이럴 때 안타깝다니...
"가."
"어. 올라가. 늦겠다."
"하하하! 들어가"
11층에 내리고 잠시 뒤 14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시끌시끌 소리가 들리며 혜정이가 먼저 집으로 들어가고 나도 집으로 들어왔다.
와 이게 다 무슨 일이냐... 대체 오늘 밤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뭐하다 이렇게 늦게와?"
"후후. 형. 가을 하늘은 참 밝어. 그렇지?"
"뭐야? 뭐 좋은 일 있었어?"
"그냥. 기분 좋은 밤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