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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륜기로 가버렷-20화 (20/401)

〈 20화 〉 천일의 밤 (4)

"그래도 진짜 하늘이 정성을 알아주는구나."

"..."

"일단 친구라는 관계는 된 거 잖아. 그치?"

"......"

"마하야?"

"남수야. 진짜 여자친구 사귈 때 서로간에 호감만 있으면 되냐?"

분명히 들었다. 나한테 뭔가 물어보고 싶다고 했어.

뭘 알고 싶어서 그러지? 걔가 나한테 알아갈게 뭐가 있다고?

"어이. 너 지금 너무 급발진 하는 거 같은데?"

"야 진짜 다 얘기해 줄게. 객관적으로 들어봐."

남수에게 혜정이와 있었던 대화나 분위기 모든 것들을 정말 숨김없이 말해줬다.

"그래서 내가 운동 끝내고 올라갈 때 엘리베이터 막히겠다. 언능 가 이러니까 막 미친 듯이 웃더라고."

"하하! 확실히 재밌긴 하네."

"그치? 걔도 나한테 재밌다고 했었어."

"거 참. 애매하네."

"좋다는 말도 가끔 하고, 뭐 만 하면 고맙다고 그러고."

"야. 야. 과잉해석 하지말고."

"어! 맞어. 내가 걔 스타일 좋다고 했을 때도 좋네. 고마워 그랬었어."

어찌됐든 남수는 연애를 해본 놈이다. 이놈은 뭔가 다르다.

반면 태윤이나 정석이는 여자는 구멍이 세 개 이딴 쓰레기 같은 소리만 떠드는 놈들이다.

남수가 맞다면 맞다. 판정을 기다리는 선수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남자친구 있잖아."

"끝내고 바꾸려고 하는 걸 수도 있지."

"흐음..."

"내가 너무 설레발치나?"

"그래서. 만약 사귀자고 한다면 진짜 사귀게?"

"안 될 이유 없지 않나?"

"걔 그 잘생긴 형이랑 사겼다면서. 잤다고 하지 않았어?"

"잤으면 뭐. 세상에 처녀 총각만 만나라는 법 있어? 여기가 무슨 씨발 이슬람이야? 자유민주공화국에서 뭔 상관인데. 난 그런 거 안 따져."

"오우 이 새끼 존나 프리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지금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냐고!"

남수가 진정하라며 어깨를 다독였다.

"오케이. 근데 마하야. 정말 말도 안 되게 혜정이가 널 좋아한다고 쳐 봐."

"말도 안 될 건 뭔데?"

"그러니까. 침착하게 들으라고 이 새끼 여차하면 치겠네."

시킨대로 침착하게 들었다. 남수는 중요한 포인트라며 꼭 명심하란다.

"남자는 매너가 있어야 돼."

"매너? 어 매너. 있어."

"말로만 그러지 말고. 매너는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마음이야."

"존중 중요하지. 스포츠도 리스펙트가 중요하니까. 그래서?"

"절대 여자애가 먼저 고백하게 해선 안 된다."

"왜?"

"당연하지. 세상 아무리 변했다고 해도 그건 남자들이 먼저 해주는 게 맞어."

고백은 내 마음을 상대방에게 전하는 것이다.

용기가 필요하고 거절당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남자는 넓은 마음으로 여자를 품어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굳이? 왜? 밀레니엄이 넘었는데?"

"아 이 새끼... 그러니까 너가 연애를 못 하는 거지?"

"그런가...?"

여자애가 밑밥은 다 깔아 놓을 거란다.

그리고 자기가 들었을 때도 나는 낙시줄만 당기면 된다고 했다.

"그치? 너가 봐도 그렇지?"

"단지, 좀 걸리는 게 있다면..."

"뭐? 뭐가 걸리는데?"

"너무 급작스러운 감이 없지 않달까..."

"멋있어 졌다매. 나도 키 크고 어깨 벌어져서 괜찮다며? 혜정이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그렇겠지."

아무튼, 오늘은 한주고 연습이 있는 날. 도저히 운동 갈 기분이 아니라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왔다.

90%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들뜬 마음을 어쩌지 못해 샤워도 하고 머리도 빗고 거울앞에 서서 또 한번 나를 지켜본다.

"그래. 확실히 전보단 나아졌어."

키 크고 어깨가 벌어지며 넓대디했던 얼굴이 사람답게 보인다.

빈약하던 두 팔도 근육이 잡혀 있었다.

다리는 또 어떤가. 배는 또 어때.

울퉁불퉁했던 얼굴도 나름 각이 잡혀서 남자답게 보여.

아직 이목구비는 그저 그렇지만 충분히 자신감 가져도 돼.

능력이냐 외모냐는 자신감을 가져갈 원천이 어디에 있냐는 것.

나는 이 몸이 자신감이다.

운동과 내공을 통해 다져진 건강한 나 스스로가 자신감이 된다.

"늦었네. 엘리베이터가 너무 막혔나?"

"하하하! 그게 뭐야."

"가자."

"근데 오늘은 운동 안 했어? 한주 고 가는 날이라고 했잖아."

"아. 피곤해서. 그냥 좀 쉬었어."

"그럼 있지. 괜히 나왔네."

"괜찮아. 쉰다고 늘어지면 몸 풀어지니까. 산책 좋아."

"너 교복 츄리닝 아닌 거 처음본다."

"그래? 이상해?"

"아냐 괜찮아. 잘 어울려."

일부러 좀 멋을 내고 있었다.

청바지도 꺼내입고 작년 소풍 때 샀던 남방도 입었다.

두근두근 언제 어떻게 말을 꺼낼까. 혜정이가 먼저 말하게 기다려야 하나.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마하야. 그때 애들 몰려 있던 거 그거 나 때문이지?"

"아니. 그냥. 넌 원체 인기가 좋으니까."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괜찮아... 별 일 없었어."

와... 뭐가 이렇게 심장이 뛰냐. 미치겠네. 이정도 심박이면 나 속도 더 올려도 될 거 같은데?

"그랬구나. 근데 저기. 마하야."

"어?"

"아니... 그. 다른 게 아니라."

"응... 말 해."

"그러니까..."

왔다. 왔어. 이건 진짜다.

매너야. 남자는 매너를 가져야 된다고 남수가 그랬어.

"혜정아. 잠깐만."

"어?"

"저기. 그러니까. 어... 내가 말할 게!"

"뭐. 뭘?"

"그게 그러니까 나 예전부터..."

그래. 남수야. 이 새끼 니가 옳다. 이건 내가 해야되는 게 맞어.

이렇게 쫄리고 긴장 되는 걸 어떻게 좋아하는 애한테 시키냐. 미안해서.

"너. 그러니까. 내가 너 모른다고."

"어. 어. 자 잠깐만. 뭔가 오해가 있는 거 같은데..."

"음?"

"아니. 난 그게 아니라."

혜정이가 다급하게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지민이 형이 요즘 연락이 잘 안 된단다.

혹시 한주고 가거나 같이 운동하면 어떻게 지내는지 좀 물어봐 주면 안 되겠냐고 들었다.

"아..."

"미안... 내 남자친군데... 오빠도 대회랑 수능 있어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어. 그래. 그렇지."

"정말 미안. 내가 좀 오해를 하게 행동을 한 건가?"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

"지... 진짜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나는..."

형 얘기 였구나... 어쩐지... 하긴. 그렇지.

남수 이 새끼... 고백이 뭐? 용기가 뭐 어째?

"미안 마하야."

"아니야. 그냥. 친구들이 여자애가 고백하게 만들면 안 된다고... 그래서..."

"고마워... 근데 난 그런 거 아니었어."

"응..."

한참을 어색하게 서 있었다.

혜정이가 먼저 오늘은 너 쉬는 날이라고 했으니까 먼저 가볼게. 라고 말하며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아 젠장. 쪽팔린 걸 떠나서... 와 진짜....

그리고 저 쓰레기는 뭔데. 담배꽁초는 또 왜 이런데 떨어져 있어.

관리실 돈 받고 뭐하는데 씨발 진짜.

*   *   *

그날 이후 혜정이와의 산책은 없었다.

나도 전국체전이 다가와 처음으로 대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느라 학교를 조퇴하고 한주고에서 지내다 싶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기록은 머릿속에서 지워라. 막상 대회나가면 숫자가 발목을 잡을 수 있으니까."

"네. 감독님."

"지금부턴 계속 대회 일정에 맞춰서 훈련한다. 그만큼 각별히 부상에 주의해야 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너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뽑아내 봐. 알겠지?"

"네..."

"목소리 왜 이래. 긴장되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오케이. 컨디션 조절 잘 하고. 운동 시작하자."

메달을 딴 선수들은 대거 빠져있었다.

지민이 형도 지난 8월 회장기 대회에서 성적을 거둔만큼 훈련에 참가하고 있진 않았다.

"형들은 수능 준비하나?"

"어. 두 달 뒤니까."

"그렇구나..."

혜정이한테 지민이 형 소식을 전해주고 싶어도, 아무리 나라고 해도 그렇지. 남의 학교 건물. 그것도 수능을 앞둔 3학년 교실을 뒤지고 다닐 순 없는 노릇이다.

그냥 운동에 집중하며, 이 감독님한테 혼나가며, 단거리와 중거리를 몸에 익히기 위해 뛰고 또 뛰어 다녔다.

"마하야. 너 진짜 400까지 나가는 거야?"

"응."

"와... 존나 빡시네. 어떻게 그렇게 다 하냐?"

"그럼 마하 형은 어떻게 되는 거에요? 우리 학교 이름 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영군 고 출신인데, 이 감독님 밑에 제자로 나가기로 했어. 성과도 그렇게 매기기로 하고."

"잘 되면 좋겠다."

"새끼야 당연히 잘 되겠지. 마하 걱정할라 말고 우리나 연습하자고."

선수의 성과는 코치의 실적으로 이어진다.

좋은 결과를 내 훈련시켜 준 감독님들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마하야. 역시 중거리를 뺄까?"

"헉! 허억. 아니요. 하겠습니다."

"음. 지금 너 100, 200기록도 전보다 떨어져. 내가 초심자한테 너무 무리한 일을 시킨 게 아닌가 싶은데..."

"괜찮습니다. 그냥 조금 힘들어서 그래요."

"오케이. 조금만 쉬고 다시 해보자. 허벅지 풀고 있어."

"네!"

호흡이나 근육이 꼬여서가 아니라 마음이 지금 운동에 집중을 못 하고 있다.

혜정이와 산책하고 다닐 때 그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말린 바나나 그거 맛있더라.)

(그치? 나도 먹어보고 엄마한테 많이 사가자고 했는데, 너무 많이 사와서 나눠줬어.)

지난 방학 해외여행을 갔었던 혜정이네 식구들.

들어볼 적에 어른들만 간 게 아니라, 얘도 같이 갔었다는 거 같다.

그럼 지민이 형이 합숙 내내 통화를 했던 사람은 대체 누구였을까?

국제전화였나? 사귀는 사이면 그렇게 비싼 전화를 계속 한다고? 학생들이?

이런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내 운동이 우선이 되야지. 전국체전이라고!

여기서 좋은 성과를 내야 사람들 눈에 띄고. 대학감독들이 알아보고, 세 종목 우승해 태릉을 갈 거 아냐!

내공을 써서 얻어지는 건 내 실력이 아니야. 이 몸으로 뛰어야 돼.

혜정이가 뭐라고...

걔가 뭐라고 내가 가슴을 졸여야 하는데...

즐겁기만 하던 운동이 참 힘들게 느껴진다.

몸이 힘든 게 아닌 집중되지 않는 상황에 뛰어야 한다는게 곤욕이었다.

"흐음..."

"주영아."

"어. 상률이 왔냐."

"마하는 좀 어때?"

"몰라 처음 나가는 대회라 그러나 마음이 완전 콩밭에 가있어. 불러다 줘 패려는 거 지금 꾹 참고 있다."

"놔둬. 그것도 선수가 감수해야 할 과제지."

"체전 때는 오냐?"

"그 다음날이 우리 운동회라. 부탁하자."

"술 사."

"당연하지."

*    *    *

"자. 이거 너 번호 표."

"감독님. 저 혼자 있을 수 있어요."

"알어 이 녀석아."

전국체전 당일. 전주 월드컵 경기장이었다.

전날 한주고 선수들과 미리 도착해 짐을 풀고 개회식을 마친 뒤 예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감독님이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엄밀히 학교가 다른지라 옆에 계시는 게 죄송스러웠다.

"어떠냐? 마음이 들썩들썩해?"

"모르겠어요."

"보는 거랑은 다르지?"

"네."

"긴장 풀고. 잘하라곤 안 할 테니까. 배운 대로만 해. 우승만 하면 돼."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자식 웃기는. 나중에 보자."

대회는 몇 번 관람했지만, 짧은 운동복에 번호표를 붙이고 있는 건 처음이었다.

엄청 기대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단 혼자라는 상황에 조금 위축되고 있었다.

전국체전 고등학교 시합이었다.

대부분은 감독님이나 인솔자 선생님들이 계시지만 가족끼리 온 선수들도 보였다.

어머니로 보이는 분들이 응원을 해주시고, 형제로 보이는 사람들이 위로를 건네고 있다.

"..."

어쩔 수 없지. 애시당초 그런 걸 기대한 것도 아니고.

"여기도 준비해 주세요. 학생? 8조 맞지?"

"네."

"준비해."

지금은 대회가 우선이다.

예선을 넘거야 준준결승을 나가고 결승까지도 장담할 수 없다.

세 종목에 출전하니까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돼.

응원 뭐. 까짓 거.

"아! 저깄다!"

"어디! 어!! 마하야!"

"야. 구마하! 여기여기!"

그때 관중석에서 들려온 목소리.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멍청하게 생긴 놈들이 싱글벙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뭐야? 너네 거기서 뭐해?"

"뭐하긴 뭐해 병신아. 응원왔지."

"하하! 야. 여기 봐봐. 사진기 보라고 새끼야. 웃어. 아 웃어 봐 좀. 좆같이 생겨가지고."

이 새끼들 반갑긴 한데, 아니 지금 수업하고 있을 시간인데. 왜 여기?

태윤이 정석이를 지나쳐 어리둥절한 얼굴로 남수를 쳐다보니 씩 웃으며 말해준다.

"그냥 하루 째고 왔어."

"학교는?"

"몰라. 어차피 이제와서 우리 다 개근상 받을 것도 아니고."

"개근상 뭐 중요하냐. 대학이나 잘 가면 그만이지."

"하하하! 이 새끼들. 몇시에 출발했는데?"

"새벽에 버스타고 왔어."

"야. 근데 너 벌써 떨어진 거 아니지? 끝났으면 죽는다."

그럴 리가 있나.

친구들이 보고 있으니 없던 기운도 샘솟는 기분이다.

당연하게 예선을 통과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관중석으로 향했다.

"오오! 구마하! 이 새끼 존나 빠른데?"

"와... 뭐지? 남수야 나 지금 마하가 사람 구실 하고 있는 거 보니까 눈물이 살짝 나는거 같은데."

"하하하! 그럼 다음은 뭐야? 결승전 나가는 거야?"

역시. 아무리 등신같은 놈들이래도 얘들이 있으면 마음이 든든하다.

"좀 어떠냐? 컨디션은?"

"모르겠어. 나쁘지 않은 거 같애."

"가만 좀 있으라고. 사진 찍는데 계속 꿈틀대 씨발놈이."

"미친놈아 내가 선수지 모델이냐고."

"마하야. 혹시 모르니까 잘 알아 봐. 정석이 어디 게이 사이트 이런 데 팔 수도 있잖아."

"너도 몇 장 구워줄까? 마하 보고 딸칠래? 병신이냐?"

그래도 우리들 있으니까 좋지? 라는 질문엔 아니. 다 꺼지라고 하면서 웃고 말았다.

안 되는데. 이런 시시껄렁한 놈들 때문에 긴장 풀리면. 앞으로 선수 일생에 이런 걸로 루틴 잡으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몰라.

"참. 마하야 우리 아까 오다가 그 형 봤다."

"누구?"

"혜정이 남친. 너 같이 운동한다는 애들이랑 저쪽에 있던데?"

"그래? 형들 공부한다고 못 온다고 했었는데."

왔으면 가서 인사해야지. 구석구석 경기장을 돌아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훤칠한 키에 멋들어진 옷차림의 지민이 형이 넘버를 달고있는 어떤 긴 머리의 여자 선수와 굉장히 친근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 보았다.

"됐어. 내가 알아서 한다고. 저리 가."

"하하! 너 그러면서 맨날 긴장해서 바톤 놓치고 그러잖아."

"미쳤냐봐. 아 장난치지 말고. 응?"

여자의 촉이란 무섭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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